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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지상으로 올라온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음흉한 미소로 엘리와 리디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기합이 잔뜩 들어가 나란히 열중쉬어 자세로 있는 레몬과 애플.

       

       뭐지. 배빵을 해달라는 것인가.

       

       툭툭.

       

       괜히 둘의 배를 주먹을 때리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러자 몸을 배배 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레몬과 애플.

       

       “아앙! 거긴 안 되는 검다….”

       “요나넴 음흉한 검다….”

       

       “아니, 그냥 배거든?”

       

       “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한 검까?”

       “옷으로 가려져 있잖습니까. 어쩌면 요나넴이 생각한 것보다 더 아래일 수도….”

       

       “지랄노.”

       

       펄럭.

       

       애플의 헛소리에 코웃음 치며 둘의 옷자락을 동시에 들췄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군살 하나 없는 하얀 배뿐.

       

       엘리처럼 근육이 붙어있다거나, 리디아처럼 탄탄한 느낌은 아니다. 그저 얇고 가녀린 느낌.

       

       물론 그렇다고 봐주진 않았지만.

       

       “에잇!”

       

       찰싹! 찰싹!

       

       요나의 배북! 효과는 굉장했다….

       

       “꺄흑?!”

       “흐이잇!”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배를 직접 맞을 줄 몰랐던 걸까. 새된 비명과 함께 몸을 움츠리는 둘.

       

       남녀역전 세계답게 여자의 노출에 관대한 판그레이브에서는 보기 드문 반응이다.

       

       하긴. 반대로 생각해 봤을 때 어떤 여자가 갑자기 내 옷을 들추고 배를 때리면 나라도 비슷한 소리를…내지는 않겠지. 응.

       

       그냥 와악! 흐억! 같은 놀란 소리만 냈을 거다. 저렇게 앙칼진 교성이 아니라.

       

       “흐응. 뭐야 그 야한 소리. 설마 맞으면서 느낀 거야?”

       

       “아, 아님다! 그게 무슨 소림까!”

       “공공장소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검까…!”

       

       자신의 배를 스윽 가리며 빼액 소리 지르는 둘.

       

       오히려 그 반응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걸 모르는 걸까.

       

       낄낄 웃으며 둘의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팡!

       

       “히양!”

       “왜, 왜 또….”

       

       억울해하는 말. 하지만 묘하게 목소리가 상기된 것이 영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이 세계에서는 여자가 남자 엉덩이 때리는 거면 모를까, 남자가 여자 엉덩이 때리는 건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니까.

       

       하물며 내 외견만큼은 어린아이 아니던가. 이 정도면 이상한 생각을 하는 쪽이 이상한 거다.

       

       …레몬과 애플은 좀 이상한 사람 같지만.

       

       “흐이…히. 히히.”

       “연줄, 발 닦개라도 권력자…히힛.”

       

       멍하니 허공을 보며 헤실거리는 둘. 미궁에서 볼 때마다 묶여있는 걸 봐서 혹시나 싶었는데…역시 이상한 취향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앞장섰다.

       

       “에휴…됐으니까 빨리 와. 에덴으로 가야지.”

       

       “앗! 혼자 가면 안 됨다!”

       “저희가 지켜드리겠슴다.” 

       

       “?”

       

       순간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멈칫했다.

       

       “지켜?”

       

       “그렇슴다!”

       “요나넴이 다치면 안 됨다!”

       

       “너희가?”

       

       “뭐, 뭐가 문제임까?”

       “알려주시면 시정하겠슴다.”

       

       “나를?”

       

       “…아.”

       “너무함다….”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추욱 어깨를 늘어뜨린 둘.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레몬과 애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니까…!

       

       “힘의 차이를 알겠어?”

       

       “…….”

       “…….”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고는 조금 속도를 낮춰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대충 알겠어. 벌써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으니 뭐라도 하고 싶은 것 같은데…쓸데없는 짓은 됐어. 그냥 하던 대로 해.”

       

       “앗. 그러고 보니….”

       “쉿. 조용히 하는 검다 레몬.”

       

       레몬이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리려다 애플에게 저지당했다.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저번이야 이브 씨에게 목숨값을 대신 받았지만, 그때 여윳돈을 다 가져갔으니 이번에는 뭐 가게라도 털어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겠지.”

       

       “그, 그렇슴다!”

       “잘못하면 보스가 파산해버리는 검다!”

       

       “…아니. 파산까지 갈 정도로 이브 씨에게 빌붙으려는 거야? 다 큰 어른이 부끄럽지도 않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다문 레몬과 애플. 하기야. 이제 막 양아치 생활을 청산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미궁에 드나드는 초보 모험가에게 뭘 얼마나 바라겠는가.

       

       “됐어. 어차피 이번에도 돈으로 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딱 하나만 지켜주면 돼.”

       

       “뭐든 말만 하는 검다.”

       “반드시 지키겠슴다!”

       

       “별거 아냐. 그냥 오늘 있었던 일 전부를 비밀로 하라는 거지.”

       

       “전부라면….”

       “어디까지를 말하는 검까?”

       

       “말 그대로 전부야. 누구에게 잡혔는지, 어떻게 우리에게 구해졌는지, 오늘 싸운 적, 그 결과 등등. 전부 말이야.”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레몬과 애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슴다. 맹세하는 검다.”

       “오늘 있었던 일은 죽어도, 보스에게도 비밀로 하는 검다.”

       

       “좋은 자세야. 근데 이브 씨는 예외로 쳐도 괜찮아.”

       

       “엣. 왜 임까?”

       “역시 보스랑….”

       

       멍청히 눈만 깜빡이는 레몬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히죽이는 애플.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오답이라는 건 알겠다.

       

       “왜긴 멍청아. 내가 저번에 이브 씨랑 했던 약속 기억해?”

       

       “어…만날 때마다 단검을 보여주는 거임까?”

       “정확히는 아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거였슴다!”

       

       “둘 다 아냐 이 멍청이들아! 머리속에 그런 거밖에 안 들었어?!”

       

       빠악!

       

       레몬과 애플의 머리를 동시에 후려쳤다. 크게 때린 것 같진 않은데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진 소리.

       

       “윽엑.”

       “껙.”

       

       그리고 두 쌍둥이 엘프도 꽤 충격이 컸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어…어어?”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당황해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늘다 못해 가녀려 보이는 팔뚝과 평생 빛을 받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함이 나를 반길 뿐이다.

       

       즉,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는 뜻. 굳이 이전과의 차이점을 꼽는다면….

       

       “아하?”

       

       던전의 성장 보상이구만.

       

       이번에 다른 잡다한 몬스터는 전부 피해 간 대신, 계층 수호자를 혼자 쓰러뜨리지 않았나. 거기에 한 놈뿐이지만 황혼을 삼키는 자의 멘토급 인원…시나도 내 손으로 죽였고.

       

       순수한 전투 경험치, 계층 수호자 최초 소환이라는 업적, 그리고 보스 솔킬 업적까지.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져 성장치로 주어졌을 텐데, 거기에 이번에 얻은 권능인 바실리우스로 성장 폭이 뻥튀기되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많이 아팠어? 지금 좀 힘 조절이 안 돼서 말야. 미안.”

       

       “지금은 괜찮슴다.”

       “머리 말고 엉덩이는 생각날 때마다 때려주셔도 괜찮슴다.”

       

       “뭐?”

       

       “…사실 애플이 제일 위험한 것 같으니 도망치는 검다!”

       “흐흐흐. 레몬이라고 다를 것 같슴까? 정작 기회가 오면 제일 먼저 동참할 거 다 알고 있슴다.”

       

       기겁하는 레몬과 이제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도 않는 애플.

       

       평소대로라면 평소대로인 모습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멀쩡한 거 같으니 됐어. 빨리 가기나 하자.”

       

       “가, 같이 가는 검다!”

       “방치 플레이는 별로인 검다!”

       

       허둥대며 따라오는 둘을 대동한 채, 에덴으로 향했다.

       

       ***

       

       짤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

       

       통일감 없이 어수선하게 진열된 물건들. 곳곳에 설치한 화분에서 흘러나오는 풀 냄새, 그리고 뒤편의 작은 쪽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들고 이쪽을 마중 나온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실눈 엘프 음험(아님)노괴.

       

       “어머?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왔나 했더니, 요나 씨였군요? 반가워요.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나요? 설마 레몬과 애플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니겠죠?”

       

       칫! 방해하다니(X)

       반갑다(O)

       

       지금 이순간에도 사람 하나 담근 것처럼 검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단검과, 항상 웃는상인 얼굴에 튄 몇 방울이 미치도록 신경 쓰이지만…분명 별거 아닌 일이겠지.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레몬과 애플 또한 기겁하며 따라 고개를 젓는다.

       

       “설마요. 기쁜 소식이 있어서 그거 알려드리러 온 것뿐이에요.”

       

       “비, 비밀임다! 목숨만은 살려주는 검다!”

       “멍청한 레몬! 이럴 때는 그냥 괜찮다고 하면 되는 검다! 보스의 다음 사냥감이 되고 싶은 검까?!”

       

       숨 쉬듯 음해당하는 이브. 그런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으며 주제를 전환했다.

       

       “이브 씨. 대체 그 단검은 뭔가요? 자꾸 피가 떨어지니 조금 무서운데….

       

       “별거 아닙니다. 좋은 아이가 들어와서 잠시 손질하던 중이었을 뿐이니까요.”

       

       “좋은 아이라 하심은…?”

       

       “그야 당연히 만드라고라지요?”

       

       “…….”

       

       무슨 제물 하나 뚝딱 조진 것처럼 말해놓고 만드라고라인가. 일단 만드라고라의 체액도 빨간색이니 저렇게 흔적이 남은 거겠지.

       

       뭐, 이브는 원래 이런 녀석이니까 당연한 일이긴 한데 조금 김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피식 웃으며 자연스레 쇼파에 몸을 파묻고 앉았다.

       

       “이브 씨.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요나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없어도 만들어야지요.”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X)

       프러포즈 각인가?!(O)

       

       음. 오늘도 어김없이 고장난 뇌내 번역기를 대충 흘려 넘겼다. 대신 오리너구리 눈물만큼 회복된 신성력으로 바실리우스를 실체화시켰지.

       

       화아악!

       

       은은한 녹광과 함께 내 머리에 씌워지는 투박한 물푸레나무 왕관.

       

       땡그랑!

       

       누구의 권능인지 알아챈 이브가 가는 눈을 번쩍 뜨며 단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저, 정말로 프러포즈일 줄이야…!”

       

       1층의 계층 수호자가 실존했던 건가!(X)

       이제와서 세계수의 권능이라니!(X)

       

       “?”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뭐야. 내 눈물 돌려주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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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

EP.76





       지상으로 올라온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음흉한 미소로 엘리와 리디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기합이 잔뜩 들어가 나란히 열중쉬어 자세로 있는 레몬과 애플.


       


       뭐지. 배빵을 해달라는 것인가.


       


       툭툭.


       


       괜히 둘의 배를 주먹을 때리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러자 몸을 배배 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레몬과 애플.


       


       “아앙! 거긴 안 되는 검다….”


       “요나넴 음흉한 검다….”


       


       “아니, 그냥 배거든?”


       


       “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한 검까?”


       “옷으로 가려져 있잖습니까. 어쩌면 요나넴이 생각한 것보다 더 아래일 수도….”


       


       “지랄노.”


       


       펄럭.


       


       애플의 헛소리에 코웃음 치며 둘의 옷자락을 동시에 들췄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군살 하나 없는 하얀 배뿐.


       


       엘리처럼 근육이 붙어있다거나, 리디아처럼 탄탄한 느낌은 아니다. 그저 얇고 가녀린 느낌.


       


       물론 그렇다고 봐주진 않았지만.


       


       “에잇!”


       


       찰싹! 찰싹!


       


       요나의 배북! 효과는 굉장했다….


       


       “꺄흑?!”


       “흐이잇!”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배를 직접 맞을 줄 몰랐던 걸까. 새된 비명과 함께 몸을 움츠리는 둘.


       


       남녀역전 세계답게 여자의 노출에 관대한 판그레이브에서는 보기 드문 반응이다.


       


       하긴. 반대로 생각해 봤을 때 어떤 여자가 갑자기 내 옷을 들추고 배를 때리면 나라도 비슷한 소리를…내지는 않겠지. 응.


       


       그냥 와악! 흐억! 같은 놀란 소리만 냈을 거다. 저렇게 앙칼진 교성이 아니라.


       


       “흐응. 뭐야 그 야한 소리. 설마 맞으면서 느낀 거야?”


       


       “아, 아님다! 그게 무슨 소림까!”


       “공공장소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검까…!”


       


       자신의 배를 스윽 가리며 빼액 소리 지르는 둘.


       


       오히려 그 반응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걸 모르는 걸까.


       


       낄낄 웃으며 둘의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팡!


       


       “히양!”


       “왜, 왜 또….”


       


       억울해하는 말. 하지만 묘하게 목소리가 상기된 것이 영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이 세계에서는 여자가 남자 엉덩이 때리는 거면 모를까, 남자가 여자 엉덩이 때리는 건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니까.


       


       하물며 내 외견만큼은 어린아이 아니던가. 이 정도면 이상한 생각을 하는 쪽이 이상한 거다.


       


       …레몬과 애플은 좀 이상한 사람 같지만.


       


       “흐이…히. 히히.”


       “연줄, 발 닦개라도 권력자…히힛.”


       


       멍하니 허공을 보며 헤실거리는 둘. 미궁에서 볼 때마다 묶여있는 걸 봐서 혹시나 싶었는데…역시 이상한 취향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앞장섰다.


       


       “에휴…됐으니까 빨리 와. 에덴으로 가야지.”


       


       “앗! 혼자 가면 안 됨다!”


       “저희가 지켜드리겠슴다.” 


       


       “?”


       


       순간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멈칫했다.


       


       “지켜?”


       


       “그렇슴다!”


       “요나넴이 다치면 안 됨다!”


       


       “너희가?”


       


       “뭐, 뭐가 문제임까?”


       “알려주시면 시정하겠슴다.”


       


       “나를?”


       


       “…아.”


       “너무함다….”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추욱 어깨를 늘어뜨린 둘.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레몬과 애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니까…!


       


       “힘의 차이를 알겠어?”


       


       “…….”


       “…….”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고는 조금 속도를 낮춰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대충 알겠어. 벌써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으니 뭐라도 하고 싶은 것 같은데…쓸데없는 짓은 됐어. 그냥 하던 대로 해.”


       


       “앗. 그러고 보니….”


       “쉿. 조용히 하는 검다 레몬.”


       


       레몬이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리려다 애플에게 저지당했다.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저번이야 이브 씨에게 목숨값을 대신 받았지만, 그때 여윳돈을 다 가져갔으니 이번에는 뭐 가게라도 털어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겠지.”


       


       “그, 그렇슴다!”


       “잘못하면 보스가 파산해버리는 검다!”


       


       “…아니. 파산까지 갈 정도로 이브 씨에게 빌붙으려는 거야? 다 큰 어른이 부끄럽지도 않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다문 레몬과 애플. 하기야. 이제 막 양아치 생활을 청산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미궁에 드나드는 초보 모험가에게 뭘 얼마나 바라겠는가.


       


       “됐어. 어차피 이번에도 돈으로 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딱 하나만 지켜주면 돼.”


       


       “뭐든 말만 하는 검다.”


       “반드시 지키겠슴다!”


       


       “별거 아냐. 그냥 오늘 있었던 일 전부를 비밀로 하라는 거지.”


       


       “전부라면….”


       “어디까지를 말하는 검까?”


       


       “말 그대로 전부야. 누구에게 잡혔는지, 어떻게 우리에게 구해졌는지, 오늘 싸운 적, 그 결과 등등. 전부 말이야.”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레몬과 애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슴다. 맹세하는 검다.”


       “오늘 있었던 일은 죽어도, 보스에게도 비밀로 하는 검다.”


       


       “좋은 자세야. 근데 이브 씨는 예외로 쳐도 괜찮아.”


       


       “엣. 왜 임까?”


       “역시 보스랑….”


       


       멍청히 눈만 깜빡이는 레몬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히죽이는 애플.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오답이라는 건 알겠다.


       


       “왜긴 멍청아. 내가 저번에 이브 씨랑 했던 약속 기억해?”


       


       “어…만날 때마다 단검을 보여주는 거임까?”


       “정확히는 아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거였슴다!”


       


       “둘 다 아냐 이 멍청이들아! 머리속에 그런 거밖에 안 들었어?!”


       


       빠악!


       


       레몬과 애플의 머리를 동시에 후려쳤다. 크게 때린 것 같진 않은데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진 소리.


       


       “윽엑.”


       “껙.”


       


       그리고 두 쌍둥이 엘프도 꽤 충격이 컸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어…어어?”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당황해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늘다 못해 가녀려 보이는 팔뚝과 평생 빛을 받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함이 나를 반길 뿐이다.


       


       즉,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는 뜻. 굳이 이전과의 차이점을 꼽는다면….


       


       “아하?”


       


       던전의 성장 보상이구만.


       


       이번에 다른 잡다한 몬스터는 전부 피해 간 대신, 계층 수호자를 혼자 쓰러뜨리지 않았나. 거기에 한 놈뿐이지만 황혼을 삼키는 자의 멘토급 인원…시나도 내 손으로 죽였고.


       


       순수한 전투 경험치, 계층 수호자 최초 소환이라는 업적, 그리고 보스 솔킬 업적까지.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져 성장치로 주어졌을 텐데, 거기에 이번에 얻은 권능인 바실리우스로 성장 폭이 뻥튀기되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많이 아팠어? 지금 좀 힘 조절이 안 돼서 말야. 미안.”


       


       “지금은 괜찮슴다.”


       “머리 말고 엉덩이는 생각날 때마다 때려주셔도 괜찮슴다.”


       


       “뭐?”


       


       “…사실 애플이 제일 위험한 것 같으니 도망치는 검다!”


       “흐흐흐. 레몬이라고 다를 것 같슴까? 정작 기회가 오면 제일 먼저 동참할 거 다 알고 있슴다.”


       


       기겁하는 레몬과 이제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도 않는 애플.


       


       평소대로라면 평소대로인 모습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멀쩡한 거 같으니 됐어. 빨리 가기나 하자.”


       


       “가, 같이 가는 검다!”


       “방치 플레이는 별로인 검다!”


       


       허둥대며 따라오는 둘을 대동한 채, 에덴으로 향했다.


       


       ***


       


       짤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


       


       통일감 없이 어수선하게 진열된 물건들. 곳곳에 설치한 화분에서 흘러나오는 풀 냄새, 그리고 뒤편의 작은 쪽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들고 이쪽을 마중 나온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실눈 엘프 음험(아님)노괴.


       


       “어머?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왔나 했더니, 요나 씨였군요? 반가워요.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나요? 설마 레몬과 애플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니겠죠?”


       


       칫! 방해하다니(X)


       반갑다(O)


       


       지금 이순간에도 사람 하나 담근 것처럼 검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단검과, 항상 웃는상인 얼굴에 튄 몇 방울이 미치도록 신경 쓰이지만…분명 별거 아닌 일이겠지.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레몬과 애플 또한 기겁하며 따라 고개를 젓는다.


       


       “설마요. 기쁜 소식이 있어서 그거 알려드리러 온 것뿐이에요.”


       


       “비, 비밀임다! 목숨만은 살려주는 검다!”


       “멍청한 레몬! 이럴 때는 그냥 괜찮다고 하면 되는 검다! 보스의 다음 사냥감이 되고 싶은 검까?!”


       


       숨 쉬듯 음해당하는 이브. 그런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으며 주제를 전환했다.


       


       “이브 씨. 대체 그 단검은 뭔가요? 자꾸 피가 떨어지니 조금 무서운데….


       


       “별거 아닙니다. 좋은 아이가 들어와서 잠시 손질하던 중이었을 뿐이니까요.”


       


       “좋은 아이라 하심은…?”


       


       “그야 당연히 만드라고라지요?”


       


       “…….”


       


       무슨 제물 하나 뚝딱 조진 것처럼 말해놓고 만드라고라인가. 일단 만드라고라의 체액도 빨간색이니 저렇게 흔적이 남은 거겠지.


       


       뭐, 이브는 원래 이런 녀석이니까 당연한 일이긴 한데 조금 김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피식 웃으며 자연스레 쇼파에 몸을 파묻고 앉았다.


       


       “이브 씨.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요나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없어도 만들어야지요.”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X)


       프러포즈 각인가?!(O)


       


       음. 오늘도 어김없이 고장난 뇌내 번역기를 대충 흘려 넘겼다. 대신 오리너구리 눈물만큼 회복된 신성력으로 바실리우스를 실체화시켰지.


       


       화아악!


       


       은은한 녹광과 함께 내 머리에 씌워지는 투박한 물푸레나무 왕관.


       


       땡그랑!


       


       누구의 권능인지 알아챈 이브가 가는 눈을 번쩍 뜨며 단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저, 정말로 프러포즈일 줄이야…!”


       


       1층의 계층 수호자가 실존했던 건가!(X)


       이제와서 세계수의 권능이라니!(X)


       


       “?”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뭐야. 내 눈물 돌려주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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