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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67

        

       『 너희는 라트와 웃자를 보았으며

       세 번째 우상 마나트를 보았느냐?

       너희에게는 남자가 있고 하나님에게 여자가 있느냐?

       실로 이것은 부당한 구별인즉

       이것들은 너희와 너희 선조들이 고안했던 허상이요 위대하신 분께서는 그것들에 아무런 권위를 주지 아니하셨다. 불신자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복음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억측과 저속한 욕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니라. 』

         

       무슬림들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꾸란의 53수라 19절부터 23절.

       한때 숭배하고 숭앙하였던 과거를 부정하듯이 새긴 글자.

       돌에 새겼기에 수백 년이 지나도 그 글자는 쇠할 일이 없이 우상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정된 우상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역사를 품은 돌.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언정 주술적인 가치는 없는 물건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숭배받는다고 그것이 특별한 힘을 품는다면 특별하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커다란 고목 앞에서 치성을 드렸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알비노나 돌연변이 동물이 나타나기만 하면 호들갑을 떨면서 사악한 존재의 저주를 받았으니 신성한 존재의 축복을 받았느니 하면서 난리를 피우지를 않던가.

         

       그러하니 기원과 숭배가 꼭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을 보았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구려. 구도자여, 그곳에서 바나트 알라의 인도를 느끼지 못하였소? 그곳에서 세 우상의 인도를 느끼지는 못하였소? ]

         

       아슈토쉬 싱은 박진성의 말을 듣고는 이야기가 편해지겠다는 듯 반색하며 말했다.

       그러고는 거기서 무언가 특이한 것을 보지는 못했는지, 무언가 특이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물었다.

       거기에 의구심은 없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박진성이 그것을 보고 어떠한 것을 얻었으리라는 것을.

       그것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든, 영적이든, 혹은 직감이나 심상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하하.”

         

       박진성은 그러한 아슈토쉬 싱의 말에 웃었다.

         

       특별한 것.

       특별한 것이라.

         

       그런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이교도를 증오하는 사람들의 흔적이었고, 정으로 돌을 쪼아 그린 반달리즘(Vandalism)의 표상이었다.

       그 성스러우면서도 그 거석의 주인들을 처절할 정도로 능욕하고 부정하는 글귀들로 그려진 초상을 보고 어찌 무언가 특별함을 느낄 수 있을까? 거기에는 참담함만이 존재하였으며, 글귀에 새겨진 것처럼 선조들이 그렸던 허상이며 알라가 아무런 능력도 주지 않은 이름뿐인 존재임을 널리 알리는 선전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무덤이요 비석이라.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린 신앙의 대상에 대한 조롱.

       명복조차 빌어주지 않고 일말의 존중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 흔적에서는.

         

       아무런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 굳이 재료로 사용하려면 사용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특별함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문화재로 잘 보존되고 있는 옛적 타이프, 나클라, 쿠다이드에서 세워졌던 바나트 알라의 또 다른 거석을 재료로 사용한다면 그와 관련된 주술을 훨씬 잘 사용할 수 있을 테고, 아브라함 계통의 주술을 사용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한다고 치자면…그것보다 훨씬 좋은 재료가 널려있는데 말이다.

       아마 예루살렘에 있는 건물에서 돌을 빼다가 글귀 새긴 다음 사용해도 저 거석보다는 효과가 좋을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특별함?

       없다.

         

       그는 아슈토쉬 싱의 말처럼 어떠한 직감과도 같은 것을 내려받지 못했고, 바나트 알라의 속삭임이나 상징을 듣지 못하였으며, 그 어떠한 영감조차 받지 못하였다.

         

       그것을 보고 느낀 실망조차도 핵의 폭발이 지나간 뒤 흉하게 변해버린 박물관의 모습을 보고 느낀 감정보다도 덜한 것이었으니, 과연 그것은 정말로 박진성에게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군.’

         

       세간에서는 이러한 것을 가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영감을 주지도 못하고, 경험을 안겨주지도 못하고, 기억에 남을 그 어떠한 특별함조차 가지지 못한다. 금전적으로도 쓸모가 없고, 그 어떠한 곳에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쓰임새가 없는 물건이니 이것을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가치가 없다 말을 할 수 있으랴?

         

       아나스타시아를 통해 자신에게 말을 하는 아슈토쉬 싱은 그것의 특별함을 어떻게든 그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모양이지만….

         

       하하.

         

       아무리 입바른 말을 하고 그것의 가치를 높이 치켜올린들 당사자가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는데 그 어떠한 쓸모가 있으리오? 바다 위에 표류하는 이에게 엄청난 속도의 스포츠카를 안겨주며 그 쓸모를 말한다 한들 무용하며,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사람에게 먼 곳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를 준다고 한들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거룩함과 권능, 경외와 경악과 공포의 속성은 우리의 창조주이자 면류관을 쓰신 아도나이(Adonai)가 걸치신 의복에 불과함을 알라.”

         

       박진성은 천천히 입을 열어 옛적 신비주의자들이 목 놓아 불렀을 시의 일부를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입 모양 조각상을 바라보며 말한다.

         

       “옷조차도 안과 밖의 형태가 다르고, 그 형태 또한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며, 그 입은 형상조차도 다름이라. 그렇다면 과연 옷으로 그려진 형상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하물며 의복이란 언제든 입고 벗을 수 있는 물건이니 그러하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함은 무엇인 것인가?”

         

       [ 그러한가, 구도자여. ]

         

       의미 없어 보이는 박진성의 말.

       하지만 아슈토쉬 싱은 이해했다는 듯 말을 줄였다.

         

       [ 의복이라. 과연 그와 같구려….]

         

       의복은 야생과 문명을 가르는 상징이다.

       의복은 나의 자아를 실현이자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의복의 안은 나를 감싸고 밖으로는 외부의 것에서 주인을 보호한다.

         

       하지만 묻는다.

       의복의 안과 밖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그것의 안과 밖을 뒤집는다면 과연 그것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뒤집는 것으로 나를 감싸지 아니하고 밖의 이물을 나에게 인도하기라도 하는가?

       뒤집는다면 타자의 시선을 실현하고 나의 자아를 바라보게 되기라도 하는가?

         

       과연 그러한가?

       그러하지 않다면.

       그러하다면.

         

       그렇다면 의복의 의미가 무엇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안과 밖의 그렇게 차이가 없다면, 그렇다면 안과 밖이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면.

       그렇다면 언제든 벗고 다른 의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의복의 속성임을 인지하고 있다면, 그러하다면 과연 진실로 추구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그러한 물음을 입에 담은 박진성의 의도란 과연 무엇인가?

         

       [ 구도자가 하려는 말은 잘 알겠소. ]

         

       그것은 아슈토쉬 싱이 입에 담은 바나트 알라라는 신성을 말함이다.

       그것은 박진성이 보았던 바나트 알라의 거석을 말함이다.

       아슈토쉬 싱의 시선에서 그것은 인도였으며 능히 마주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당당하게 박진성에게 그것을 알려주어도 될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진성이 보기에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며, 아무런 쓸모조차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본질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느끼는 쓰임이 달라도, 각자가 받는 인상이 달라도, 각자가 본 그것의 형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의복이라는 하나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의복의 본질은 언제든 입고 벗을 수 있으며, 그 형태를 달리고 형상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 중국에 손을 뻗으려 드는군…. 아. 불꽃이여, 불꽃이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아슈토쉬 싱이 보인 ‘옷’은 정작 그것을 입어야 할 박진성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줌으로써 아슈토쉬 싱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게 되었다.

         

       [ 하지만 불꽃이여! 구도자여! 알아야 할 것이오. 불꽃은 모든 것을 불사르지만 단 하나, 불꽃이 지나가 더 타버릴 것이 없으면 그곳만은 범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한 불꽃은 더더욱 강렬한 불꽃에 잡아먹히게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컫기를. ]

         

       방화선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아슈토쉬 싱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진다.

         

       파스슥.

         

       이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서서히 분해되며 허물어지는 조각상과 함께.

         

       [ 아…. 불꽃, 사람, 마음의 불꽃, 사람의 띠, 방화선…구도자여, 장작들이…기다리고…있을 것이오…구도자여…. ]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이제는 한껏 집중해야 들릴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가 되었다.

       마치 꿈결에 들었던 속삭임처럼, 꿈에서 깨어나면 순식간에 잊혀버릴 잔향과도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아슈토쉬 싱은 박진성에게 자신의 의지를 내보인다.

         

       그리고 박진성은 그에 답한다.

         

       “장작이라니.”

         

       그것 또한 앞서 말한 것과 이치가 같다.

         

       아슈토쉬 싱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장작이겠지만.

         

       “의복이라네.”

         

       박진성에게 있어서 그것은 또한 옷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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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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