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77

        

         “음…….”

         

         혹시 내 인식이나 암호화 해독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다시 한 번 링크를 살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도시 전체에 쫙 깔린 통신망과 기지국, 그 어느 것도 경유하지 않는 채팅 채널로 이어진 길만 보였다.

         

         “으음…….”

         

         노려본다고, 코드 덩어리와 눈싸움을 한다고 이미 일어난 일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보람찬 노동을 마무리하려던 나에게 새로운 걱정거리가 추가된 셈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수작질이냐는 정답을 알기 힘든 난제.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접선 방식인가?

         그게 아니라면 연례행사를 방해받아 생긴 불쾌감을 토로하려는 창구?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추종자들을 위한 집결지?

         

         선전물을 살펴보듯 그냥 손수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쉽게 끝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괜히 출입한 흔적을 남겼다가 엉뚱한 죄목으로 지하 조직과 엮이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왜 비슷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특정 단어만 언급되었을 뿐인데도 사람이 실종되고 끌려가는 동네가.

         가령 독립 운동이라든가… 파룬궁이라던가…. 크흠!

         

         “어쩐다….”

         

         끙끙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주 원론적인,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애당초 불법 선전물이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파이브 아이즈에서 올린 게시물이라고 단언할 수가 있나?

         

         이거 단순히 조심성 많은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놀려고 만든 채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해당 링크가 포함된 글이 업로드 된 위치 또한 해커 커뮤니티.

         

         그래도 거기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아마추어들이라면 연말마다 벌어지는 이 사이버 전쟁을 알 법도 한데…. 눈치가 없는 건지, 부주의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시기가 좋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일부러 도와줄 정도의 의리는 없지만, 아까 전에 불순한 시청각 자료 시청으로 과태료 물게 생겼다고 찡얼거리던 친구의 댓글이 떠오르자 작은 배려쯤은 해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모여서 놀아라, 이 바보들아.”

         

         화르륵!

         

         마음을 굳힘과 동시에 피어난 화마가 책을 집어삼킨다.

         

         누군가 숨겨진 채널로 입장하기 전에 게시된 글을 완전히 소각해버린다.

         따로 보고 같은 건 하지 않았기에 실적으로 추가되는 건 없었다.  

         

         나는 방금, 나 같은 것보다 더 깐깐한 다른 검열관에게. 특히나 눈도 코도 벌개졌을 용병들에게 걸렸다면 얄짤없이 벌금형에 처해졌을 과실을 덮어주었다.

         

         익명의 당사자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도 굳이 필요 없었다.

         

         다시금 말끔해진 서재를 바라보는 묘한 쾌감과 현역 넷 해커로서 누구인지 모를 아마추어 후배의 지갑 두께를 조금이나마 지켜줬다는 뿌듯함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럼 이제 정말로 좀 쉬려고 했는데.

         

         “……나 원. 고집 봐라?”

         

         방금 날려버린 것과 똑같은 채팅 채널 링크를 담은, 똑같은 글이 또 올라왔다.

         

         내가 도와준 줄도 모른 채, 아무 이유 없이 게시물이 사라졌다고 여긴 걸까? 친구야, 살벌한 커뮤니티 분위기 좀 읽어라! 다들 몸을 낮추고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안 보이니?!

         

         짜증을 참고 글을 지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동일한 게 다시 나타난다.

         사람 하나 구하는 일이라 믿고 거듭 삭제한다. 보란듯이 빈 자리가 메꿔진다.

         머리 좀 식히고 오라는 뜻으로 아예 사용자 임시차단을 먹여준다. ……새로운 계정이 또 예의 채널 링크를 올려 댄다.

         

         “허허….”

         

         이 새끼… 아주 악질이다.

         집념과 집착으로 중무장한, 자신이 무적인 줄 아는 사이버 전사. 그리고 이런 타입의 녀석에게 잘 먹히는 특효약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철저한 무관심.

         그래, 내가 널 도우려해서 뭘 하겠니… 마음대로 살다가 마음대로 가거라….

         

         체념과 함께 놈을 방치하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재깍재깍 게시글을 폭파하던 검열관이 손을 떼버리니 다른 이용자들이 조회수를 올려준다.

         뭐, 그 중에 저 채팅 채널을 찾아 헤매던 애들은 알아서 링크를 타고 들어가던가 말던가 하겠지. 더는 내 알 바가 아니다.

         

         화륵…!

         

         “엥…?”

         

         하지만 이 웃긴 작자는 오히려 글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 노출되자 스스로 지워버렸다.

         별…. 변덕도 죽 끓듯 하는 놈도 다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감상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거늘, 이제는 원하는 대상을 딱 꼬집는 제목을 달은 것들이 나타났다.

         

         [ 이… 씨이이이발 새끼야! 치사하게 공권력 뒤에 처숨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실력만으로 싸우라고!! ]

         

         [ 쫄았냐?! 쫄았냐고! 나도 본부에 두고 온 장비들만 있었으면 이런 멀티태스킹 교전 정도는 가뿐했어! ]

         

         화가 단단히 난 상태로 화면 너머의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악질 유저.

         싸울 상대를 잃어버린 그 비통한 절규에, 싸움 구경이라면 환장하는 이들이 몰려들 건 뻔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간과하기 힘들었던 나는 튀어나오는 모난 돌을 계속 짓뭉갤 수밖에 없었다.

         

         [ 이제야 좀 제대로 할 마음이 들었…. ]

         [ 아이씨, 비겁하게 끝까지…. ]

         [ 잠깐! 내 말 ㅈ…. ]

         

         확인부터 제거까지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단말마도 점차 짧아졌다.

         이 영양가 없는 반복 행위가 얼마나 길게 지속되었을까, 일단 나보다는 확실히 근성이 모자란 게 분명한 저쪽에서 먼저 접근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 야 이 괴물딱지 같은 년아!! 그만 때리고 얘기 좀 하자니까?! ]

         

         [ ……잘못했어요. 슬슬 들어와 주시지 않으면 저 진짜 혼나요! ]

         

         “이거 참….”

         

         어색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점점 공손해지는 태도와 숙여지는 고개를 즐기느라 바쁜 건 아니었고, 그저 저쪽이 결단을 내릴 확신을 주지 않았기에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다.

         

         채팅 채널과 부착된 링크가 초대장이었던 건 명백했다.

         실시간으로 예절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미지의 인물이 부디 펼쳐 달라고 예쁘게 접어 놓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문.

         

         하지만 그것의 수신인이 나라는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면, 구태여 피곤한 자리에 발을 들이밀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나는 이만 너를 다른 검열관한테 떠넘겨버리고 도망치겠….

         

         [ 아ㅏㅏㅏㅏ 전직 경찰 A양님! 제발요!! ]

         

         “…….”

         

         머리가 뉴스 속보식 호칭 비스무리한 걸 완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내 의식은 벌써 채널 접속과 그 통로의 폭파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놈과 대면할 준비를 마쳤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는지는 몰라도 저쪽은 나를 깔끔하게 특정하는데 성공. 하지만 나는 저들의 조직과, 운영 방식과, 일부 핵심 구성원과, 몇몇 사령관만을 알 뿐 당장 활용할 만한 정보는 별로….

         

         ……뭐야, 나 별로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 댁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도대체 내가 얼마나 애걸복걸해야 움직여주는 건데!

         > 어… 미안합니다?

         

         굳었던 몸이 풀어지니 상황이 좀 냉정하게 판단되었다.

         

         비밀 결사니, 지하 조직이니 해도 결국 그들은 메가 코프 타도를 외치는 유사 의용군.

         썩어빠진 인물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굳이 편을 가르자면 한없이 아군에 가까운 집단이다.

         

         솔직히 도시 생활 반 년 경력 이민자가 파이브 아이즈와 척을 질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고작해야 전투경찰 일 좀 열심히 하고, 뿌리던 선전물 몇 만 개 삭제한 게 전부지.

         

        ……개인이 아닌 집단의 시선으로 보면 굉장히 사소한 충돌사고라 주장할 수 있는 수준의 우연이라고 본다.

         

         > 흥…! 가진 실력에 비하면 꽤 겸손하네. 역시 한 번 납작 엎드려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 나, 다시 나갈까?

         > …죄송합니다! 그러시면 전 리더한테 죽어요!!

         

         접촉해온 목적을 육하원칙에 따라 매끄럽게 설명하라고는 안 할 테니, 슬슬 용건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천방지축 깐족거리는 짓궂은 말투… 짐작가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잠시동안 채널에 새로운 대화문이 올라오는 게 멈췄지만. 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라면, 보나마나 아주 긴 일장연설을 준비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 흠흠…!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또 다른 이름은 최근 두각을 나타낸 초신성 해커 아이보리. 파라다이스 산하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결국엔 굴복, 심지어 가족이 그들의 부주의로 인해 희생됐는데도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하고 퇴직하셨더군요.

         

         > ………응, 그래. 맞아.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고심하다가 그냥 대충 수긍해버렸다.

         우리 깡통한테도 다 해명 못한 걸 여기서 구구절절 풀어놓을 쏘냐… 마음대로 생각하렴.

         

         > 그 타고난 재능을 썩히거나, 기업을 위해 사용하는 건 죄악!

         > 당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암담한 현실의 벽도. 우리 파이브 아이즈의 일원이 되면 언젠가 뛰어넘을 수 있어요!

         

         감청 대비는 나름대로 완벽하다고 자신하는 걸까.

         민감한 이야기를 꺼냄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오히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자신감이 마구 흘러 넘쳤다.

         

         건너편에서 자랑스럽게 가슴을 쫙 피고 검지손가락을 이쪽을 향해 내민 여성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결코 주역이 될 수 없는 스토리 탓에 최저의 선호도를 가진 집단이자.

         소속된 세력의 본격적인 등장마저 느려 터져서, 그 분량조차도 가장 적은 비운의 소녀.

         

         파이브 아이즈 본부 출신 해커 동료이자 초 마이너 히로인, 로잘린.

         

         > 그러니… 내 손을 잡고, 같이 리더한테 가서 인사부터 하시죠!

         > 미안. 싫어.

         

         주인공과 얼굴 마주보고 해야 할 극적 대사를, 단순 채팅으로 재잘거린 그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아무래도 인텔리 타입 동료치고 허당 끼가 많이 심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 어쨰서죠?! 왜!

         > 왜긴…… 특별한 메리트가 없는 앞길이라? 나중에 협력 관계 정도는 맺을 의향이 있어.

         

         당황한 로잘린이 반문해오는 와중에도 내 상념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 있었다.

         

         그럼… 여태 나랑 사이버 대리 전쟁을 치른 것도 로잘린인가?

         아까 장비가 없다고 투덜거리긴 했던 것 같아도, 그녀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면 나도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대한 취급이 너무한 건 아니냐고 따지면 나도 떳떳하게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로잘린은 정말 호감도 시스템만 존재했다 뿐이지, 엑스트라에 더 가까운 캐릭터였던 데다가. 하필 아나스타샤로 게임을 클리어한 탓에 특성이 중복된 그녀는 동료 엔트리에조차 넣지 않았었다.

         

         막상 직접 만나게 되면 또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음, 왠지 미안하네.

         

         > 그렇다면 아나스타샤, 당신은 파이브 아이즈의 적이군요!

         > …나도 주워들은 말이지만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회심의 영업 멘트가 수포로 돌아간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나를 거칠게 몰아세웠다.

         다짜고짜 날을 세우려 드는 로잘린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되짚어보니 그녀는 아직 제대로 된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는 척을 해봐야 좋은 결과를 얻기는 요원해보였으니.

       

         얘를 설득자로 내세운 하베스트 플래닛 지부장은 정말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 변명은…! 약삭빠르게 전투 드로이드까지 풀어 저희를 쫓은 이유가 가입을 원한 게 아니었다면, 당연히 음습한 의도겠죠!

         > ……뭐라고??

         

         씩씩거리는 로잘린은 잠깐 방치해두고, 얼른 사이버웨어를 조작해 내 소유물로 등록된 케어봇의 위치를 확인한다.

         

         …….

         

         너 거기서 뭐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느새 예고드렸던 휴재일이 와버렸습니다.

    …예비군 훈련, 너무 가기 싫어요!! 으아아아악!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