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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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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사람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어어?’ 하다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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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자마자 여관 문이 거칠게 닫히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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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봐도 당장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제스와 아이리스에게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제스처를 한 후,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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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검은 집회는 입증된 실력을 갖춘 자들만 엄선되었다. 그만큼 이번 임무가 위험하고 보수가 높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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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쏟아내는 말에 여관 안에 모인 이들이 전부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무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 후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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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검은 집회는 강한 용병들을 몰래 모으기 위해 데비아탄이라는 곳에서 만든 괴상한 모임이라는 거네. 이 모임의 목표는 서쪽의 땅을 차지한 네스트라는 조직을 쓸어버리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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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데비아탄의 보스는 우리 집 마검처럼 중2병이 심하게 온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은 로브를 착용한 이들만 집회에 참여가 가능하다는 조건을 걸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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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관에 모인 검은 로브의 인간들…엄청 수상해 보여서 정보 다 빠져나갈 것 같은데. 거기다 전혀 연관성도 없는 우리가 여기 앉아있다는 건, 집회가 엄청 허술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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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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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아무도 이 모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사람만 모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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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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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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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환기도 하지 않아 떠다니는 먼지 때문에 제스가 귀여운 기침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제스의 로브 후드가 뒤로 넘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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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뭐야!”
    “저 녀석 로브를 벗었어…”
    “그보다.. 저런 녀석이 용병 중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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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빨간 머리카락과 수인의 귀가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다급히 제스의 후드를 씌워주며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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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애새끼 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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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로 목소리 높여 말하던 남자가 속삭이듯 뱉어낸 말에 여관 내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범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나는 조용히 마검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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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소환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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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촤르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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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등의 문양이 환하게 빛나더니 영롱한 와인색을 닮은 붉은 핏물이 허공에 치솟았다. 예술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타인의 시선을 현혹하며 솟아난 핏물은 이내 화려하게 검의 형태로 바뀌어 내 손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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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몸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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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빈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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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거 미안하군.”
    “…?”
    “하얀 머리카락과 손등의 문양을 보고 바로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보가 느려서 실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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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들어 헛소리를 늘어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관 내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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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놈을 알고 있는 건가?”
    “아아 -, 글을 읽을 줄 아는 놈들은 지나가다 봤을 거다. 투기장에서 수십, 수백의 몬스터를 썰어버린 하얀 머리를 가진 검투사의 이야기를, 그 신문에 나왔던 ‘학살자’가 저 녀석이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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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감탄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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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이들도 다른 이들에게 설명을 듣고는 뒤늦게 감탄을 터뜨리며 납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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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옆에 있는 붉은 머리는 붉은 여왕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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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여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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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어이가 없어 목이 턱 막혀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그들끼리 웅성거리며 붉은 여왕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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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승의 투기장을 전부 털어버렸다던…”
   “그 무시무시한 아셸리칸도 단번에 목이 뜯겼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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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흉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제스를 바라보았다. 제스는 “헤헤”하는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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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자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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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한 명은 ‘광검사’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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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 쪽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 나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여긴 미친 중2병 모임일 뿐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학살자, 붉은 여왕, 광전사 따위의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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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닌가? 설마 이게 다크 판타지 세계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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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큰 성인들이 진지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혼란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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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셋이 검은 집회에 참여해준다면 이번 싸움의 승리는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군.”
   “크흐흐…일이 더 쉬워지겠네.”
    “어이! 환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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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험한 상황에선 벗어난 것 같아 안도의 숨이 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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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마저 설명하도록 하지. 우리가 노려야 하는 건 네스트 조직의 보스 ‘노아.’라는 놈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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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하기 무섭게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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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래 간부 ‘네로’,‘릴리’,‘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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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줄 이어지는 단어를 듣자 동공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전부,전부…자신과 함께했던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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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간부는 반드시 살려서 잡아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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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말하며 벽 쪽에 붙어있는 게시판에 초상화를 하나하나 붙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던 것보다 조금 더 성장한 얼굴이지만 확실히 자신이 찾던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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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스트의 보스는 애새끼답게 제 부하들이 처참한 꼴로 당하는 걸 참지 못하니, 간부를 붙잡기 힘들다면 네스트의 보스 앞에서 직접 죽여버려도 상관없다. 흥분한 적만큼 상대하기 쉬운 것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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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걸 느끼며 마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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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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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낮게 가라앉은 제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제스가 이를 내보인 채 떠들어대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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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나 아이리스가 다치지 않게 처리하는 건 숫자가 너무 많아서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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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적으론 당장 이곳을 벗어나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쉽게 흥분을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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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이렇게 정을 줘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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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스는 쭉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리스는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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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언제나 옆에 있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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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과 신뢰가 가득 담긴 말을 듣자 도리어 손에 힘이 풀렸다. 아이리스와 제스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머뭇거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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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우리보다 강한 사람은 없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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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가 내 손등을 덮으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 맥이 탁 풀리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엔 어떠한 근거도 없었지만, 왠지 믿음이 갔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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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사고를 쳐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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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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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정리가 끝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스가 귀와 코를 씰룩거리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반동으로 후드가 다시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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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할 말이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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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작전에 대해 떠들던 남자가 내 쪽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나는 말없이 단검 형태가 된 마검을 역수로 들고 테이블 위에 꽂아버렸다. 마치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마검이 테이블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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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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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러드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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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주문을 외운 순간 마검의 날 부분에서 붉은 핏물이 그림자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테이블을 따라 바닥까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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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여관 내부 공간이 핏물 색으로 물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발목까지 핏물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마비시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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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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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촤아아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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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여관 내부 공간은 순식간에 핏물에 집어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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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허억…!”
    ​“끄아악!”
   “자,잠깐 살려…!”
   
   
   
   
    촤아아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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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 소리인지 아니면 살점이 썰려 나가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여관에 웅웅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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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이 꽂힌 테이블을 중심으로 반구 형태의 보호막이 만들어져 우리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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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뼛조각 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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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촤아아악,츄르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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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의 파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핏물이 순식간에 마검에게 빨려 들어갔다. 색을 잃었던 세계가 점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여관 안에는 네 명의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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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아이리스와 제스 그리고 -… 검은 집회의 대표로 추정되던 남자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머지는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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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히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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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내 의지 덕분에 죽지 않았지만, 피의 파도에 잠겼다가 빠져나온 상태였다. 뭘 보고 겪은 건지 완전히 겁에 질려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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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를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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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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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동료를 위협하는 놈에게 존댓말을 쓰고 싶지 않아 반말로 부르자, 상대가 경기를 일으키듯 반응하며 파바박 뒤로 물러나려 했다. 나는 마검을 든 채 쭈그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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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도망가면 이거 바닥에 꽂는다?”
    “아아,아아악! 안돼..! 안됩니다! 제,제발 그런 끔찍한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차,차라리 죽여! 죽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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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이쯤 되면 그 안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 조금 궁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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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을 살포시 내려놓은 채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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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 거 다 알려주면 살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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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말을 뱉고 나서야 너무 악당스럽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런 건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노아를 비롯한 아이들의 안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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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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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서쪽 여관에서 비안 조직의 오크 부대를 썰어버린 하얀 머리의 남자가 검은 집회에 참여했고, 이후 검은 집회가 흔적도 없이 증발 해버렸다…라는 말인가?”
   “예,예…”
    “하얀 머리를 가진 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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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신문에는 피바다가 된 투기장의 사진과 수 십, 수 백의 몬스터를 학살한 리안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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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스트의 뒤에 학살자가 있었던 건가? 아니,아니야. 이 경우엔 학살자가 네스트의 사냥개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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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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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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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 귀찮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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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네스트의 사냥개’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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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ㄱ)

이제 시작이라는 걸 모르고..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사람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어어?’ 하다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고말았다.

앉자마자 여관 문이 거칠게 닫히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딱 봐도 당장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제스와 아이리스에게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제스처를 한 후,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 검은 집회는 입증된 실력을 갖춘 자들만 엄선되었다. 그만큼 이번 임무가 위험하고 보수가 높다는 말이지.”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쏟아내는 말에 여관 안에 모인 이들이 전부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무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 후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러니까…검은 집회는 강한 용병들을 몰래 모으기 위해 데비아탄이라는 곳에서 만든 괴상한 모임이라는 거네. 이 모임의 목표는 서쪽의 땅을 차지한 네스트라는 조직을 쓸어버리는 거고.’

아무래도 데비아탄의 보스는 우리 집 마검처럼 중2병이 심하게 온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은 로브를 착용한 이들만 집회에 참여가 가능하다는 조건을 걸진 않았을 것이다.

‘여관에 모인 검은 로브의 인간들…엄청 수상해 보여서 정보 다 빠져나갈 것 같은데. 거기다 전혀 연관성도 없는 우리가 여기 앉아있다는 건, 집회가 엄청 허술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심해졌다.

‘정말 아무도 이 모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사람만 모인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핫츄!”

제대로 환기도 하지 않아 떠다니는 먼지 때문에 제스가 귀여운 기침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제스의 로브 후드가 뒤로 넘어가 버렸다.

“뭐,뭐야!”

“저 녀석 로브를 벗었어…”

“그보다.. 저런 녀석이 용병 중에 있었나?”

새빨간 머리카락과 수인의 귀가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다급히 제스의 후드를 씌워주며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애새끼 하나라…”

대표로 목소리 높여 말하던 남자가 속삭이듯 뱉어낸 말에 여관 내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범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나는 조용히 마검을 소환했다.

아니 소환하려 했다.

촤르륵 -..

손등의 문양이 환하게 빛나더니 영롱한 와인색을 닮은 붉은 핏물이 허공에 치솟았다. 예술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타인의 시선을 현혹하며 솟아난 핏물은 이내 화려하게 검의 형태로 바뀌어 내 손에 떨어졌다.

[ 이 몸 등장! ]

나는 빈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 이거 미안하군.”

“…?”

“하얀 머리카락과 손등의 문양을 보고 바로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보가 느려서 실수했어.”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들어 헛소리를 늘어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관 내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저놈을 알고 있는 건가?”

“아아 -, 글을 읽을 줄 아는 놈들은 지나가다 봤을 거다. 투기장에서 수십, 수백의 몬스터를 썰어버린 하얀 머리를 가진 검투사의 이야기를, 그 신문에 나왔던 ‘학살자’가 저 녀석이다.”

“….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감탄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이들도 다른 이들에게 설명을 듣고는 뒤늦게 감탄을 터뜨리며 납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 옆에 있는 붉은 머리는 붉은 여왕이겠지.”

“…??”

‘뭔,여왕이요?’

너무 어이가 없어 목이 턱 막혀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그들끼리 웅성거리며 붉은 여왕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짐승의 투기장을 전부 털어버렸다던…”

“그 무시무시한 아셸리칸도 단번에 목이 뜯겼다지…”

흉흉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제스를 바라보았다. 제스는 “헤헤”하는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똥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자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한 명은 ‘광검사’겠군.”

아이리스 쪽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 나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여긴 미친 중2병 모임일 뿐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학살자, 붉은 여왕, 광전사 따위의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아닌가? 설마 이게 다크 판타지 세계의 문화?’

다 큰 성인들이 진지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혼란이 찾아왔다.

“너희 셋이 검은 집회에 참여해준다면 이번 싸움의 승리는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군.”

“크흐흐…일이 더 쉬워지겠네.”

“어이! 환영한다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험한 상황에선 벗어난 것 같아 안도의 숨이 뱉어졌다.

“그럼 마저 설명하도록 하지. 우리가 노려야 하는 건 네스트 조직의 보스 ‘노아.’라는 놈이다.”

‘어…?’

안도하기 무섭게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아래 간부 ‘네로’,‘릴리’,‘코안’…”

줄줄 이어지는 단어를 듣자 동공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전부,전부…자신과 함께했던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이상의 간부는 반드시 살려서 잡아 와야 한다.”

그리 말하며 벽 쪽에 붙어있는 게시판에 초상화를 하나하나 붙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던 것보다 조금 더 성장한 얼굴이지만 확실히 자신이 찾던 얼굴들이었다.

“네스트의 보스는 애새끼답게 제 부하들이 처참한 꼴로 당하는 걸 참지 못하니, 간부를 붙잡기 힘들다면 네스트의 보스 앞에서 직접 죽여버려도 상관없다. 흥분한 적만큼 상대하기 쉬운 것도 없으니.”

그 말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걸 느끼며 마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크르릉..”

그때 낮게 가라앉은 제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제스가 이를 내보인 채 떠들어대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스나 아이리스가 다치지 않게 처리하는 건 숫자가 너무 많아서 어려워.’

이성적으론 당장 이곳을 벗어나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쉽게 흥분을 가라앉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정을 줘 버린 거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스는 쭉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리스는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언제나 옆에 있을게.”

“…”

믿음과 신뢰가 가득 담긴 말을 듣자 도리어 손에 힘이 풀렸다. 아이리스와 제스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머뭇거림을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보다 강한 사람은 없어.”

“아.”

아이리스가 내 손등을 덮으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 맥이 탁 풀리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엔 어떠한 근거도 없었지만, 왠지 믿음이 갔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여기서 사고를 쳐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덜컹!

생각 정리가 끝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스가 귀와 코를 씰룩거리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반동으로 후드가 다시 벗겨졌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한참 작전에 대해 떠들던 남자가 내 쪽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나는 말없이 단검 형태가 된 마검을 역수로 들고 테이블 위에 꽂아버렸다. 마치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마검이 테이블을 파고들었다.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블러드 웨이브.”
“블러드 웨이브.”

짧은 주문을 외운 순간 마검의 날 부분에서 붉은 핏물이 그림자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테이블을 따라 바닥까지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여관 내부 공간이 핏물 색으로 물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발목까지 핏물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마비시킬 것 같았다.

“이,이게 무슨….”

촤아아악 -.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여관 내부 공간은 순식간에 핏물에 집어삼켜졌다.

“크허억…!”

​“끄아악!”

“자,잠깐 살려…!”

촤아아악 -…

파도 소리인지 아니면 살점이 썰려 나가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여관에 웅웅 울려 퍼졌다.

칼이 꽂힌 테이블을 중심으로 반구 형태의 보호막이 만들어져 우리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뼛조각 조차도.

촤아아악,츄르르릇!

한 번의 파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핏물이 순식간에 마검에게 빨려 들어갔다. 색을 잃었던 세계가 점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여관 안에는 네 명의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나, 아이리스와 제스 그리고 -… 검은 집회의 대표로 추정되던 남자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머지는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히,히이익..”

남자는 내 의지 덕분에 죽지 않았지만, 피의 파도에 잠겼다가 빠져나온 상태였다. 뭘 보고 겪은 건지 완전히 겁에 질려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봐.”

“힉!”

제 동료를 위협하는 놈에게 존댓말을 쓰고 싶지 않아 반말로 부르자, 상대가 경기를 일으키듯 반응하며 파바박 뒤로 물러나려 했다. 나는 마검을 든 채 쭈그려 앉았다.

“계속 도망가면 이거 바닥에 꽂는다?”

“아아,아아악! 안돼..! 안됩니다! 제,제발 그런 끔찍한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차,차라리 죽여! 죽여요!”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이쯤 되면 그 안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 조금 궁금할 지경이었다.

의문을 살포시 내려놓은 채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는 거 다 알려주면 살려줄게.”

나는 말을 뱉고 나서야 너무 악당스럽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런 건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노아를 비롯한 아이들의 안전이었다.

***

“그러니까 -…서쪽 여관에서 비안 조직의 오크 부대를 썰어버린 하얀 머리의 남자가 검은 집회에 참여했고, 이후 검은 집회가 흔적도 없이 증발 해버렸다…라는 말인가?”

“예,예…”

“하얀 머리를 가진 남자라…”

한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신문에는 피바다가 된 투기장의 사진과 수 십, 수 백의 몬스터를 학살한 리안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네스트의 뒤에 학살자가 있었던 건가? 아니,아니야. 이 경우엔 학살자가 네스트의 사냥개겠군.”

쯧.

남자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일이 귀찮게 됐어.”

리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네스트의 사냥개’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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