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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

       드워프는 내 오른눈을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움찔거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ㅡ잠깐. 이거 술냄새잖아?

       

       말 그대로 딱 한 잔 했을 뿐인데, 그는 그 희미한 냄새를 포착하고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ㅡ아니, 치사하게 자네들만 그 좋은 걸 마셨다고?

       “그, 저희도 조금 얻어마신 게 다라서요.”

       ㅡ끄응. 술이 남아돌면 좀 얻어마실 수 없을까 했는데. 거 참 유감이구만.

       

       에틀락은 원통한 낯으로 입맛을 다셨다.

       

       ㅡ보다시피 여긴 황무지라서 말이야. 술은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아주 좆같은 땅이라네.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지내시는 겁니까?”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이 행성은 생명체가 살 만한 환경은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런 마당에 이 아저씨는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걸까 싶어 묻자,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ㅡ아, 그건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좀 어렵거든. 그러니까 우선… 앉아서 얘기하지.

       “?”

       

       어디에 앉아서 얘기하란 거지. 설마 돌침대에 옹기종기 모여앉자는 소리는 아닐 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에틀락을 바라보자, 그가 두터운 손을 한 번 쭉 폈다 꽉 쥐었다.

       

       쿠르르ㅡ

       

       그 직후, 근처의 지면이 굉음과 함께 솟아나더니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나갔다. 그렇게 부서진 돌무더기들 사이에는, 놀랍게도 두 개의 매끈한 석재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

       

       방금 땅에서 솟았다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그야말로 장인이 공들여 조각했다고 해도 무방한 퀄리티. 마냥 평면이 아니라 살짝 파인 곡면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딱 보기에도 앉기 괜찮아 보였다.

       

       실제로 앉아보자 매끈하고 편안한 것이, 마치 딱 나를 위해 만든 것만 같았다. 혹시나 좀 차가울까봐 걱정했는데, 그런 것도 없이 적당히 시원했고. 옆에 앉은 천마도 꽤나 감탄한 눈치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가 앉은 의자는 나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것이, 아무래도 양산형이 아니라 체구에 맞춰 제작한 것 같았다.

       

       “이거 대단한데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즉석에서 이런 의자를 만들어낸 것에 감탄하며 묻자, 그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ㅡ뭐, 별 거 없지. 그냥 자네들 체형을 보고 적당히 맞춤형으로 깎아봤을 뿐이야. 어때, 좀 앉을 만하지?

       “안락감이 장난 아니네요.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을 정도예요.”

       ㅡ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게. 그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묘기가 가능한지는, 음.

       

       드워프는 잠시 풍성한 수염을 매만지더니,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ㅡ내 이야기를 들으면 알 걸세. 뭐,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서도.

       

       그는 돌침대의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고선 말을 이어나갔다.

       

       ㅡ이런 썰은 원래 맥주 한 잔 땡기면서 푸는 게 최곤데. 킁. 없는 걸 가지고 징징대봐야 별 수 없으니 후딱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다시 지면을 융기시켰다. 세 명 사이의 땅바닥이 이리저리 솟아오르더니, 이내 흰색으로 물든 채 깨져나갔다. 깨져나간 파편들이 다시 지면에 흡수되고 나자, 남은 것은 작은 석재 인형들이었다.

       

       짜리몽땅한 키에 근육질인, 에틀락 본인을 똑 닮은 드워프 인형들이 몇 백 개고 도열해 있었다. 그 광경에 감탄하고 있자니, 에틀락이 헛기침을 하며 첨언했다.

       

       ㅡ그냥 말로 하는 것보단 시각적인 자료가 있는 게 더 직관적일 테지. 어차피 말로 이야기해봐야 별로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이니, 이렇게라도 흥미를 부여함세.

       

       그가 돌침대에 대고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자, 인형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뽈뽈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ㅡ이 별에 아직 문명이 건재할 시절, 문명의 주인 되는 종족은 드워프였다네. 다른 지성체 종족들이 여럿 있긴 했지만, 치열한 경쟁 끝에 죄다 도태되고 드워프들만 남았지.

       

       드워프 인형들은 제각기 작은 망치와 정을 가지고 지면을 일궈내기 시작했다. 대장간을, 거리를, 성을, 그리고 도시를. 순식간에 그럴싸한 수준을 넘어 수준급의 공예품에 가까운 미니어처 도시가 완성되는 모습에, 나는 그저 감탄하며 그 과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ㅡ그런데 이 드워프란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대장장이이며, 예술가이고, 또 광부들이란 말이지. 비슷한 놈들끼리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놀다 보면, 하는 짓이 다 그게 그거란 말이야.

       

       광물을 가공하는 노하우를 개발하고, 석상을 조각할 때의 기법을 연구하고, 희귀한 소재를 찾아 헤매고. 드워프 인형들이 그 외에 하는 일이라곤 맥주를 마시는 것과, 이따금 술기운이나 예술적 가치관 차이 탓에 화끈한 주먹다짐을 하는 것뿐이었다.

       

       ㅡ참 단순한 인생들이지, 그렇지 않나?

       “…도대체 종족 간 경쟁은 어떻게 이긴 겁니까?”

       

       암만 생각해도 저 낙천적이고 제 분야에만 관심 있는 괴짜들이 전쟁을 잘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내 의문에, 에틀락은 껄껄거리며 답했다.

       

       ㅡ운이 좋았지. 종족들끼리 초반에 조우했거든.

       “초반이요?”

       ㅡ그래. 서로 문명 발달 초기에 만나면 드워프가 제일 유리하다네.

       

       그는 새로운 인형들을 만들어내 종족 간의 전쟁을 시연하며 설명을 곁들였다.

       

       ㅡ게임으로 치면, 드워프는 초반과 후반에 강한 종족이지. 초반에는 남들 석기 들고 싸울 때 철기 테크를 타고 있고, 남들이 조잡한 활이나 쏠 때 대포를 펑펑 쏘고 있거든.

       “그럼 중반은요?”

       ㅡ중반에는 좀 후달려. 딱 이때쯤 인간이나 오크 같은 종족들이 포텐을 터뜨리거든. 일단 출산율부터 드워프나 엘프랑은 차원을 달리 하고, 전쟁에 있어 단합력도 비교가 안 되지.

       “그러다 후반에는 다시 강해지고요?”

       ㅡ그렇지. 중반에 멸종하지만 않으면 그 사이에 기술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서 이동요새나 공중전함 같은 걸 띄워버리니까. 그쯤 되면 머릿수는 거의 의미가 없어지고.

       

       그의 설명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표했다.

       

       “그럼 엘프는요?”

       

       듣자 하니 인간이나 오크들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중반에 특히 강한 것 같던데, 그럼 엘프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 내 의문에, 에틀락은 난감한 낯으로 말했다.

       

       ㅡ으음. 사실 자네도 눈치챘겠지만, 이미 말했듯이 우리 문명은 초반에 기술력을 바탕으로 나머지 종족들을 다 제쳐서 말일세. 다른 종족들이 실제로 문명을 계속 쌓아올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다네.

       “그러면…?”

       ㅡ대충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던 다른 갤럼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말하는 게지. 아무튼, 나도 직접 본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남한테 들은 거지만…

       

       그는 사뭇 조심스런 말투로 결론을 논했다.

       

       ㅡ그… 엘프들은 일종의 극후반 원툴 종족이라고 하더군.

       “극후반…이요?”

       

       드워프가 이동요새에 공중전함까지 테크를 올리는 게 후반인데, 그보다 더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고? 의아한 얼굴로 에틀락을 쳐다보자, 그는 손을 까딱여 다시금 지면을 솟아오르게 했다.

       

       ㅡ원래 엘프들은 극초반부터 후반까지 시종일관 숲에만 처박혀 있지. 유닛 하나하나의 스펙은 월등한데, 숲 밖으로 나와서 다른 종족들의 숨통을 끊지를 않다 보니 결국 중후반에 대수림 밖에서 자유롭게 성장한 타 종족들한테 쉼없이 두들겨맞는단 말이야.

       

       그의 손짓을 따라 솟아오른 것은, 거대한 나무를 본뜬 석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성장이 멈추질 않는.

       

       ㅡ그런데 그 모멸과 핍박의 시간을 기어코 견뎌내고 나면… 세계수가 기다린 값을 하거든.

       

       순식간에 하늘을 뚫을 만큼 거대해진 세계수 등신대 피규어의 모습에, 나는 절로 입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ㅡ장성한 세계수는 아홉 세계에 가지를 뻗는다고들 하지. 극후반의 엘프는… 지들 멋대로 차원을 옮겨다니며 멀티를 짓는다.

       “멀티…”

       ㅡ그래, 멀티. 보통 고마나 차원군에서 차원간의 이동은 한 줌의 초월적인 강자들에게나 허용된 영역이야. 차원 간에 병력을 우수수 보내고 노는 건 저기 저마나지대 SF친구들이나 그런 거고.

       

       하긴, 이렇게 갤럼들과 만나러 다닐 때도 천마의 조력이 없으면 마나 농도가 높은 곳은 가지도 못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엘프의 무서움이 바로 이해가 됐다.

       

       “종족 단위로, 자유자재로 차원이동을 한다…”

       ㅡ그래. 그렇게 찾아낸 다른 차원에서, 다시 수림을 가꾸고 세계수의 묘목을 심지. 그렇게 테라포밍을 하면서 녹지를 늘리면, 그게 바로 엘프들 앞마당이다 이거야.

       “다른 차원의 저항이라든가는…”

       ㅡ어림도 없지. 안 그래도 장생종이라 오래 사는데, 극후반 단계까지 존속했다는 것 자체가 힘의 증명이나 다름없네. 생각해보게. 천 년 동안 검이든 마법이든, 뭐라도 하나 파고들면 그게 약할 것 같나?

       “아.”

       ㅡ개나소나 소드마스터가 되고, 대마법사가 되고, 신궁이 된단 말일세. 심지어 안 그래도 긴 수명이 더 늘어나서 무슨 드래곤만큼 오래 사는 노괴들이 건너가는데, 그쯤 되면 현지 세력 입장에선 답이 없지.

       “……”

       ㅡ그곳에 어떤 문명이 있었든 상관없네. 일단 다 때려부수고 그 위에 나무를 심으면 되니까. 그렇게 모두 대수림의 주민이 되는 걸세.

       

       갤러리에서 보고, 또 실제로 만난 엘프의 사례가 있다 보니 그런 뒷사정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쪽은 변종 괴물나무한테 지력을 다 빨리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세계수의 저력을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 변종도 일종의 세계수라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무서운 종족이었구나, 엘프. 차원 단위로 활동하는 그린ㅡ에코 테러리스트들의 위엄에 전율하고 있자니, 에틀락이 주의를 덧붙였다.

       

       ㅡ물론 어디까지나 나도 갤에서 주워들은 거니까, 너무 맹신하지는 말고. 그냥 재미있는 소문 정도로 생각하게나.

       “아, 넵.”

       

       썰은 어디까지나 썰이다 이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하고 있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뭔가 어느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은데?

       

       “…그런데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죠?”

       ㅡ자네가 물어봤잖나!

       “아.”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하는 에틀락의 모습에, 나는 그만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가 어떻게 종족 전쟁을 이겼는지, 엘프는 대체 문명 테크트리를 어떻게 타는지. 둘 다 내가 물어본 거였구나.

       

       이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떠들면 안 되는데. 무안한 낯으로 화제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저희가 어디까지 얘기하고 있었죠?”

       ㅡ드워프들이 장인 노릇에 진심인 괴짜들이라는 부분까지 이야기했지. 어디보자, 그 다음이…

       

       에틀락은 재빨리 세계수 등신대를 철거하고선,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강제로 아싸가 된 종붕이들특)정모하면 하나같이 신나서 주절주절 떠들고 놂
    세계수는 아홉 가지를 구천에 뻗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환경적으로)

    먹저칩님, 데차앗님, OPER591님 후원 감사합니다…!! 좀붕이는… 음, 멋진 남캐를 기대하셨다면 유감입니다! 하지만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혼자 살아남은 간지남캐는 갤에다 좆반인 타령을 하며 오열하지 않는 겁니닷… 처음부터 암컷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죠…!

    은빛함대님, 팬아트 감사합니다…!! 엘프 그랜절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꼴림력이란 말인가? 토실토실한 엉덩이랑 그랜절 탓에 아래로 살짝 쳐진 가슴이 일품입니다…! 팬아트 공지란에 추가하도록 하겟읍니다…!!

    아, 그리고 아마 조만간 이번 용사 에피소드를 살짝 수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쓰면서도 살짝 애매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괜찮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아직 모르겠지만, 수정한 걸 반영하게 되면 따로 공지해드리겠습니다! 평소에 하는 연재랑은 별개로 짬짬이 하는 걸로…!

    다음화 보기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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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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