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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성도 밖을 나가기엔 딱 좋은 날씨이리라.

         

        헤를라인은 창공을 바라보며 출전을 준비했다. 방향은 북쪽, 암흑의 땅이었다. 

         

        ‘제발 살아만 있기를.’

         

        황실의 안일한 대처로 골든 타임을 놓쳐버렸다. 그런데도 헤를라인은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자신의 친우라면 반드시 그 설원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거라고, 그리 믿는다.

         

        클라이스가 행방불명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 헤를라인이 에테르를 이곳에 입학시켰다. 조수와의 틀어진 관계를 복구하는 것을 한 학기의 책무로 삼았어야 했다. 

         

        헤를라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목구멍 밖으로 날숨이 새어 나왔다.

         

        시간은 되감지 못한다. 이런 생각 하고 있을 바에야 움직이는 편이 낫다.

         

        군장을 점검하다 보니 점심이 훌쩍 지나간 시각이다. 끼니를 세 번 걸렀음에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도저히 음식을 입에 넣을 기분이 아니었다.

         

        “헤를라인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두 학생이 자신에게로 달려왔다.

         

        클라이스가 자신에게 맡긴 특별반 학생. 입학 수석인 버멜과, 친구의 조수였던 에테르. 금안으로 빛나는 눈빛을 보자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듯했다.

         

        그래, 표정. 웃어야 한다.

         

        “어머. 너희가 여긴 웬일이니?”

        “선생님께서 북방으로 향하신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그건 에테르에게만 한 이야기일 텐데. 헤를라인은 에테르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그녀가 씨익 웃었다.

         

        이사장을 포함한 여러 귀족과 모여 반역을 도모했던 날. 그날 에테르도 지하실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다. 헤를라인은 에테르에게 하스펠트 교수를 찾으러 북방으로 향한다고 말했다. 그때 금안족 소녀는 자신의 출정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클라이스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 자신이 그녀와 똑같이 되어버릴까 봐?

         

        친우가 사라진 지점은 3차 저지선 부근이다. 거기까지 뚫고 들어가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에테르가 우려하는 일이 자신에게도 닥칠 지 모른다.

         

        어떤 의미로 순수하구나. 역시 여기서 말리려는 거겠지?

         

        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선 나아가야 한다. 헤를라인은 설득을 거절할 준비를 미리 해 두었다.

         

        그리고.

         

        “무사히 다녀오시길 기원할게요.”

        “어?”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주춤하고 말았다.

         

        그래, 이럴 수도 있지. 헤를라인은 쓴웃음을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버멜이 헤를라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엘프어로 쓰인 부적이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부적을 받아서 들자 경건한 힘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에테르가 마전지를 뭉텅이를 꺼냈다. 어림잡아 수십 장.

         

        마감 처리가 잘 되어 있는 스크롤이다. 헤를라인은 자기 친구에 비하면 스크롤 마법 자체에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기하학적으로 복잡한 형상을 보고 있자니 어떤 마법인지 예상이 갔다.

         

        “혹시 플레어니?”

        “그거보다 더 센 거예요.”

         

        소녀는 치열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화계마도를 아예 모르더라도 상관없어요. 혼성마도 형태로 구축한 술식이니까요. 마력을 조금만 흘려 넣어도 격발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걸 사용하면 절멸급도 한 번에 잡아낼 수 있을지 몰라요.”

         

        금안족 소녀의 그 말에 헤를라인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원래라면 말이 안 된다. 플레어가 개발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걸 완성했단 말인가?

         

        다른 학생이 이런 걸 내밀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테르만큼은 다르다. 이 소녀가 하는 말에는 그만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럼, 저희는 가 볼게요.”

         

        두 학생은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점으로 변할 때까지 헤를라인은 지평선 너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양손에는 스크롤 묶음과 세계수 가지를 엮어 만든 듯한 고급스러운 호부가 들려있었다.

         

        “아.”

         

        나는, 좋은 학생을 두었구나.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신도 더욱 분발해야 한다. 헤를라인은 군마로 쓰는 골렘을 정비했다.

         

        상급 골렘 렉슨. 말 이상의 속력을 내면서도 역참을 가질 필요가 없는 군용 말. 비록 길들이기는 어렵지만, 오랫동안 군 생활을 했던 헤를라인에게는 승마 따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헤를라인은 안장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안장 앞뒤로 철판이 덧대어져 있는 탓에 시승감은 별로였다.

         

        “끄르륵.”

        “으…!”

         

        하마터면 무게중심을 잃고 고꾸라질 뻔했다.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앞발을 쳐드는 렉슨을 진정시켰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거의 3년 만에 들어보는 투레질이었다. 이 골렘은 기분 언짢은 일이 있으면 이렇게 앞발굽을 쳐올리면서 입술을 떨곤 했다.

         

        골렘도 어쨌거나 반쯤은 동물로 분류되는 존재. 감이 인간보다 좋을 수밖에 없다. 출정하는 날 애마가 이러고 있으니 헤를라인 입장에서는 난처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한데. 그녀는 버멜이 선물로 준 호부를 품 안으로 넣었다.

         

        어쨌거나 가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클라이스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그 때문에 사비를 털어 수인 용병을 구할 준비까지 마쳤다. 그들과는 북방 전선으로 가는 길에 합류할 계획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백작이라는 사회적 지위. 전략급 마도사들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불릴 정도로 드높은 군사적 지위. 골렘을 정비하는 능력으로 벌어들인 경제적 지위. 이 모든 걸 때려 박아서 이번 두 달에 건다.

         

        설령 이번 일을 계기로 파산하더라도 상관없다. 이미 파산에서부터 시작한 인생이다.

         

        어느덧 저물녘이 됐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북쪽 성채로 향하는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명이십니다. 이곳 군대의 북방 진군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뭐?”

         

        난데없는 소리.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경비병이 한 말에 다시 질문했다.

         

        “무슨 소리야? 황제께서 내 출정을 허가하셨다. 당장 안 열어?”

        “결정이 바뀌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헤를라인 백작님을 성도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이가 없었다. 소식을 듣기 무섭게 준비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 보고받은 바대로 할 뿐입니다. 폐하의 명이 있으신 이상 백작님이라고 할지라도 내보내 드릴 순 없습니다.”

         

        그래, 경비를 쪼아봤자 뭐가 나온다고. 헤를라인은 가만히 앉아 상황을 생각해봤다.

         

        자신도 어쨌거나 이사장과 뜻을 함께하는 인물. 아직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이지, 척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현재 황실이 마수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블랜튼, 그놈인가.’

         

        클라이스는 잘도 향하게 놔두더니, 자신은 못 나가게 막으려고 한다.

         

        그러나 헤를라인은 잠깐의 생각 끝에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클라이스의 구출. 설사 그녀가 봉변을 당했더라면 주검이라도 회수해야 한다. 지금까진 그 생사를 알 수 없었으니 막막했지만, 이걸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클라이스는 분명히 살아 있다.

         

         

        **

         

         

        같은 시각, 로즈마리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선생님!]

         

        분명 저 엘프는 자신의 스코프 능력을 알고 있다. 일부러 본심과 반대되는 말을 해서 자신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로즈마리 자신은 그걸 알면서도 걸려버린 것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야말로 계륵이었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 

         

        “이런다고 내가 성문을 닫을 줄 알고?”

         

        초심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상황을 관조했다.

         

        다음 장면에서 버멜이 헤를라인에게 부적을 건네줬다. 이해할 수 없는 엘프족의 문화다. 저런 거 몸에 지닌다고 해서 총탄이 피해 가는 것도 아닐 텐데.

         

        “참 어리석은 족속… 응?”

         

        로즈마리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갔다. 뚜득, 하고 입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 넣어 굴리고 있던 알사탕이 깨져버린 것이다.

         

        스코프 너머 화면에서는 에테르가 헤를라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었다. 종이처럼 생겼는데, 평범한 건 아니었다.

         

        “스크롤?”

         

        어떤 스크롤이냐가 중요하다. 두 손을 밀쳐내며 화면을 확대했다. 높은 해상도로 줌인이 되자 스크롤의 문양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헀다.

         

        그리고 로즈마리는 그 스크롤에 새겨진 무늬를 보자마자 겁에 질리고 말았다.

         

        복잡하다. 그냥 복잡한 것도 아니고, 정말 더럽게 복잡하다.

         

        행성 단위로 3차원 축조식을 구축해낼 수 있는 자신조차도 해석해내지 못할 만큼 난해한 장치. 개화부를 얼핏 보니 플레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플레언가? 플레어겠지? 

         

        [그거보다 더 센 거예요.]

         

        머리속에 떠오른 의문에 즉답하는 에테르. 로즈마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크린을 최대한 끌어당겼다.

         

        “서, 설마… 흑주생성진은 아니겠지……?”

         

        흑주(黑晝)와 백야(白夜), 자신이 유이하게 스크롤로 구축할 수 없었던 최상위 마법진. 

         

        로즈마리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머그잔을 들어 고급휘발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뒷맛은 좋지 않았다.

         

        “어, 언니, 헛짓거리하지 마…. 동포를 다 쳐 죽일 셈이야…?”

         

        역시, 저 엘프 놈과 했던 밀회는 흑주를 인공적으로 작동하는 스크롤을 개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다. 전신에서 오한이 들었다. 위계에 새겨진 본능적인 공포였다.

         

        “블랜튼!!”

        “부르셨습니까?”

        “성채로 나가는 길을 전부 폐쇄해! 지금 당장!”

         

        저게 진짜 흑주를 격발하는 스크롤이라면 마왕군 본진은 털린다. 현재 탑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료들도 모두 죽는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현상을 유지하자. 여기선 반 년만 버티면 되잖아.

         

        까드득, 로즈마리는 손톱을 깨물며 모니터링을 일시 정지했다.

         

         

        **

         

         

        “그래서, 그 스크롤에 쓰인 마법이 진짜 플레어보다 센 거 맞아?”

        “당연히 구라지.”

        “뭐?”

         

        플레어보다 강한 걸 당장 어떻게 만들어? 그럴 시간도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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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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