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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

       *

        녹색의 여인.

        ​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습의 그녀와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그녀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무척이나 길고 장황한 이야기였다.

        ​

        이 장소의 정체, 그녀의 정체, 내 마법과 여우의 정체, 그리고 뒤틀린 운명에 대한 것까지.

        ​

        무척이나 긴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러웠고, 그녀의 말투 또한 몹시 차분해서 듣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묘한 흡입력 또한 갖추고 있었기에 나는 자리에 선 채로도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

        우선, 내가 존재하는 이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정령들의 세계였다.

        ​

        더 정확히는 정령계에 존재하는 그녀의 보금자리라고 했다.

        ​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묻자, 그녀는 자기 무릎 위에서 하품하는 여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

        ​

        “이 아이가 데려와 줬어.”

        ​

        ​

        ​

        여우,

        ​

        마리아 누나의 이론에 따르면 마력은 각자마다 다른 특징이 있다고 했고, 마법에 특출난 재능을 타고난 누나의 말이었기에 나 역시 곧이곧대로 믿었다.

        ​

        실제로 얼마 전 까지는 내 불 마법이 그저 단순히 여우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

        그러나 내 불 마법에서 솟아 나온 저 꼬마 여우를 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했다.

        ​

        마기에 의해 죽어가던 중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으나 마법이 자신의 의식을 갖고 실제 짐승처럼 행동하는 건 명백하게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

        물론 골렘을 만든다거나 하는 등의 비슷한 마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인형일 뿐, 저렇게 개별화된 자아를 가진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

        ​

        ​

        “이 아이도 정령이란다.”

        ​

        “정령? 불꽃의 정령이라던가 뭐 그런 건가요?”

        ​

        ​

        ​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

        ​

        ​

        “딱히 불의 정령인 건 아니야. 네 불꽃을 타고 나타났을 뿐이지. 네 수호령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겠구나.”

        ​

        ​

        ​

        솔직히 아리송했다.

        ​

        정령이라니, 

        ​

        그런 비과학적이고 비 마법적인데다 비종교적인 존재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에서밖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

        내가 따져 묻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히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자는 무척이나 드물다고 말했다.

        ​

        ​

        ​

        “네가 나타나기 전엔 이백 하고도 삼십 칠년 전, 말리스 라는 아이가 정령을 다룰 수 있었지. 그보다 더 이전엔 천 삼백년 하고도 오십 이 년 전이었고,”

        ​

        ​

        ​

        까마득한 숫자에 놀라기도 했지만,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말리스.

        ​

        200년 전쯤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은 현자이자 대 마법사.

        ​

        마리아 누나 이전에 스태프 성씨를 받았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

        하룻밤 만에 거대한 성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마법사를 꿈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 있는 동화이기도 했기에,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는 마법 중에 하룻밤 만에 성을 지을 수 있을 만한 마법은 없었기에, 마법 학자들 사이에선 잃어버린 마법을 찾겠다며 말 리스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과장이 섞인 전설일 뿐이라며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

        과연, 마법이 아니라 정령을 부린 것이었나.

        ​

        학계에 발표하면 난리가 날 법한 진실을 알게 된 나는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그리고 애쉬, 너 역시 그와 같은 정령 술사란다.”

        ​

        “…”

        ​

        ​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여인은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그럴 만도 하지.’ 라고 중얼거렸다.

        ​

        ​

        ​

        “거짓말이시죠?”

        ​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정령과 소통하기 위해선 재능만큼이나 환경 역시 받쳐줘야 하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던 네가 그 재능을 스스로 깨우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네 탓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 아니, 제가 아니라, 제 누나였던 건,”

        ​

        “네 누이는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 않았니, 그 아이는 그게 천직이었어.”

        ​

        “…”

        ​

        “너에게 맞는 길은 이곳에 있었단다. 애쉬.”

        ​

        ​

        ​

        어느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온 여우는 내 발치로 다가와 내 종아리에 자기 몸을 비벼댔다.

        ​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여우를 들어 올렸다.

        ​

        여우는 만족스러운 듯 야릇한 눈웃음을 띄우다 내 양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누웠다.

        ​

        ​

        ​

        “애쉬, 너를 참 좋아하더구나.”

        ​

        ​

        ​

        그 소리에 고개를 들자, 여인은 말을 이었다.

        ​

        ​

        ​

        “이 세상의 운명이 원래대로 흘러갔더라면, 여신께 이 이야기를 직접 귀띔받은 아이가 나타나 네게 이 사실을 전해줬어야 했단다. 너는 네 진정한 힘을 깨닫고 네 누이와 함께 용사의 곁을 지키며 마왕을 토벌할 운명이었어. 그랬다면, 네 누이도… 아니, 그렇게 수많은 사람 중 거의 대부분이 살아남았을 텐데,”

        ​

        “…뭐라고요?”

        ​

        ​

        ​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에 나는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꿰뚫듯이 여인은 담담하게, 하지만 안타까움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

        ​

        “의심하지 말거라. 제대로 들은 게 맞단다.”

        ​

        “…”

        ​

        “나는 너와 용사가 살던 그 숲 외에 다른 곳의 일은 알 수 없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쨰선지 운명이 뒤틀려 너는 네 힘을 모른 채 살았고, 이 숲에 도착했던 용사와 그 동료 중엔 여신의 뜻을 들을 그 아이가 없었지.”

        ​

        ​

        ​

        확실히 들은 적 있다.

        ​

        지금까지 역사 속에 기록되었던 용사 파티와 실비아씨가 이끌던 파티의 가장 큰 차이점.

        ​

        실비아씨의 동료 중엔 성녀가 없었다.

        ​

        이 시대의 여신교는 성녀를 배출하지 못했다.

        ​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여신교의 기세가 많이 약해졌다고 백작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

        녹색의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

        ​

        ​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 너도 없었고, 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그 아이도 없었기에, 나는 이 뒤틀린 운명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용사의 동료들이 죽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

        “…”

        ​

        “참혹하고, 슬픈 광경이었지. 네 누이를 포함한 모두가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런데도 위업을 달성한 용사는 이 숲에 갇혀 버렸으니.”

        ​

        “…아,”

        ​

        ​

        ​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

        마치 그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재생되는 모양이었다.

        ​

        그녀의 말처럼 내게 정령과 소통하는 힘이 있는 탓일까.

        ​

        나는 그녀가 느끼는 그 거대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

        ​

        ​

        “정령은… 아무리 내가 정령의 여왕이라 해도… 그 힘을 다뤄줄 사람이 없다면, 현실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네가 내게 오기만을…”

        ​

        ​

        ​

        하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녀는 나와 실비아씨가 살던 이 누운 나무 숲의 정령 여왕이다.

        ​

        이 숲의 끝자락에 마왕의 성이 세워지는 것도, 이 숲이 마기로 오염되는 것도, 용사와 동료들, 하다못해 이 숲을 지나가는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

        그리고 마왕의 저주를 받은 실비아씨와 내가 무고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도, 그녀는 전부 보았을 것이다.

        ​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녀의 그 커다란 슬픔을 느끼면서도 어째선지 나는 속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불만 가득한 의문을 따지듯이 외쳤다.

        ​

        ​

        ​

        “운명이라고 하셨나요?”

        ​

        “그래.”

        ​

        “정령의 여왕인 당신도… 그리고 여신도… 그 위대한 두 분도 운명이 이렇게까지 뒤틀리는 걸 막지 못한단 말입니까?”

        ​

        “…그래.”

        ​

        “고작 성녀가 나오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제 부모님, 마리아 누나, 그리고 라일라… 모두 죽었단 말입니다. 실비아씨도… 그렇게나…”

        ​

        “미안하구나… 정말 유감이야.”

        ​

        “신적인 존재가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위대한 신들조차 인간의 뒤틀린 운명을 수정하지 못한다면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그걸 어떻게 이겨낸단 말입니까!”

        ​

        “…오, 애쉬.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단다.”

        ​

        ​

        ​

        속이 끓어오른는 것 처럼 답답해져 왔다.

        ​

        어느샌가 내 손바닥 위의 여우는 사라져 있었다.

        ​

        어쩌면 내 마력으로 돌아간 걸까.

        ​

        나는 빈손으로 꾹 주먹을 쥐고는 팔을 떨어트렸다.

        ​

        그와 동시에 떨어진 고개에서 비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운명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서 인간들이 꼭두각시처럼 따르게 했다면, 적어도 지키기라도 하셨어야죠.”

        ​

        ​

        ​

        녹색의 여인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

        얇은 나뭇가지 하나만 달린 그녀의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거대한 뿌리가 그녀의 다리 끝에서 솟아 나와 그녀를 지탱했다.

        ​

        그녀는 한손은 자기 가슴에, 다른 손은 내 어깨를 향해 뻗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

        마침내 내 어깨에 그녀의 손이 닿을 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애쉬,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해. 네 분노를 이해할 수 있어. 부디 나의 무능을 용서해 주렴.”

        ​

        “…”

        ​

        “그래도 내게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나조차 그리고 여신께서조차 이 운명이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단다. 심지어 마족들의 신조차도 이 망가진 운명에 당황했을 정도였으니까.”

        ​

        “…뭐라고요?”

        ​

        “지금의 용사와 대립한 그 마왕은, 운명에 예정되어있던 마왕이 아니었어. 나는 물론, 여신께서도, 그리고 마신조차도 이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단다.”

        ​

        “…”

        ​

        “인간들이 수많은 타락과 기행으로 운명을 빗겨나가게 했듯이 마족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는 것만 간신히 알게 되었단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인간을 저버리거나 내버려 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

        ​

        ​

        ​

        그녀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감돌았다.

        ​

        녹색의 여인은 슬픈 목소리로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다.

        ​

        ​

        ​

        “얼마 전, 여신님께선 이 뒤틀린 운명을 고쳐보기 위해 인간과 접촉해선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교황에게 경고를 남겼단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성을 잃어버리는 벌을 받았어, 아마 나중엔 돌아오실지도 모르지만…”

        ​

        “잠깐… 그럼… 지금은 여신께서 존재하지 않는단 뜻인가요?”

        ​

        “…나같은 말단만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기 위해 남았지.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지만…”

        ​

        ​

        ​

        녹색의 여인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그녀의 표정에는 방금 전까지의 인자함과 자상함이 사라져 있었다.

        ​

        그 대신 자리를 채운 건 단호함과 근엄함, 그리고 서슬 퍼런 독기가 서린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

        ​

        ​

        “그리고 마침내, 기다림은 결실을 보았다.”

        ​

        “…”

        ​

        “애쉬, 너는 그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내 숲에 나타났지. 마치 운명처럼.”

        ​

        “아…”

        ​

        “라일라의 일은 유감이구나…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어디서든 사랑받는 운명이었던 아이였는데…”

        ​

        “…”

        ​

        ​

        ​

        아, 라일라.

        ​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모를 이 운명의 실타래가 엉킨 순간,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다가온 이 거대한 운명의 파도에 그녀는 그저 휩쓸려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

        정말로,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건가.

        ​

        그녀는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

        ​

        “하지만 지금 네가 내 앞에 서 있으니, 뒤틀린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그 많은 이들의 영혼이 마침내 의미 있는 희생이 되는 순간이 온 것이란다.”

        ​

        “의미라니, 이제 와서 무슨,”

        ​

        “비록 네가 네 안에 잠든 힘을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지만, 네 몸속을 파고든 채 곪아가던 마기가 네 재능을 자극해준 덕분에, 우리는 만나게 되었어. 이제 모든 걸 바르게 고칠 때가 온 거야.”

        ​

        “바르게? 고친다고? 무슨 소리예요. 이미 다 끝났잖아요. 마왕은 죽고 없어요. 제 가족도 이미 다 죽었고, 실비아씨도 너무나 오랜 시간 고통받았고, 이 빌어먹을 이야기는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

        ​

        “아니. 그렇지 않아.”

        ​

        ​

        ​

        녹색의 여인은 내 말을 우악스럽게 끊었다.

        ​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문장이, 그녀의 노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

        ​

        ​

        “마왕은 죽지 않았어. 애쉬. 실비아는 실패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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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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