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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여인.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습의 그녀와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무척이나 길고 장황한 이야기였다.
이 장소의 정체, 그녀의 정체, 내 마법과 여우의 정체, 그리고 뒤틀린 운명에 대한 것까지.
무척이나 긴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러웠고, 그녀의 말투 또한 몹시 차분해서 듣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묘한 흡입력 또한 갖추고 있었기에 나는 자리에 선 채로도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우선, 내가 존재하는 이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정령들의 세계였다.
더 정확히는 정령계에 존재하는 그녀의 보금자리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묻자, 그녀는 자기 무릎 위에서 하품하는 여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데려와 줬어.”
여우,
마리아 누나의 이론에 따르면 마력은 각자마다 다른 특징이 있다고 했고, 마법에 특출난 재능을 타고난 누나의 말이었기에 나 역시 곧이곧대로 믿었다.
실제로 얼마 전 까지는 내 불 마법이 그저 단순히 여우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불 마법에서 솟아 나온 저 꼬마 여우를 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했다.
마기에 의해 죽어가던 중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으나 마법이 자신의 의식을 갖고 실제 짐승처럼 행동하는 건 명백하게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골렘을 만든다거나 하는 등의 비슷한 마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인형일 뿐, 저렇게 개별화된 자아를 가진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 아이도 정령이란다.”
“정령? 불꽃의 정령이라던가 뭐 그런 건가요?”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불의 정령인 건 아니야. 네 불꽃을 타고 나타났을 뿐이지. 네 수호령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겠구나.”
솔직히 아리송했다.
정령이라니,
그런 비과학적이고 비 마법적인데다 비종교적인 존재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에서밖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따져 묻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히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자는 무척이나 드물다고 말했다.
“네가 나타나기 전엔 이백 하고도 삼십 칠년 전, 말리스 라는 아이가 정령을 다룰 수 있었지. 그보다 더 이전엔 천 삼백년 하고도 오십 이 년 전이었고,”
까마득한 숫자에 놀라기도 했지만,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리스.
200년 전쯤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은 현자이자 대 마법사.
마리아 누나 이전에 스태프 성씨를 받았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룻밤 만에 거대한 성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마법사를 꿈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 있는 동화이기도 했기에,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는 마법 중에 하룻밤 만에 성을 지을 수 있을 만한 마법은 없었기에, 마법 학자들 사이에선 잃어버린 마법을 찾겠다며 말 리스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과장이 섞인 전설일 뿐이라며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마법이 아니라 정령을 부린 것이었나.
학계에 발표하면 난리가 날 법한 진실을 알게 된 나는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애쉬, 너 역시 그와 같은 정령 술사란다.”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그럴 만도 하지.’ 라고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시죠?”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정령과 소통하기 위해선 재능만큼이나 환경 역시 받쳐줘야 하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던 네가 그 재능을 스스로 깨우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네 탓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아니, 제가 아니라, 제 누나였던 건,”
“네 누이는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 않았니, 그 아이는 그게 천직이었어.”
“…”
“너에게 맞는 길은 이곳에 있었단다. 애쉬.”
어느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온 여우는 내 발치로 다가와 내 종아리에 자기 몸을 비벼댔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여우를 들어 올렸다.
여우는 만족스러운 듯 야릇한 눈웃음을 띄우다 내 양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누웠다.
“애쉬, 너를 참 좋아하더구나.”
그 소리에 고개를 들자, 여인은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의 운명이 원래대로 흘러갔더라면, 여신께 이 이야기를 직접 귀띔받은 아이가 나타나 네게 이 사실을 전해줬어야 했단다. 너는 네 진정한 힘을 깨닫고 네 누이와 함께 용사의 곁을 지키며 마왕을 토벌할 운명이었어. 그랬다면, 네 누이도… 아니, 그렇게 수많은 사람 중 거의 대부분이 살아남았을 텐데,”
“…뭐라고요?”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에 나는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꿰뚫듯이 여인은 담담하게, 하지만 안타까움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의심하지 말거라. 제대로 들은 게 맞단다.”
“…”
“나는 너와 용사가 살던 그 숲 외에 다른 곳의 일은 알 수 없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쨰선지 운명이 뒤틀려 너는 네 힘을 모른 채 살았고, 이 숲에 도착했던 용사와 그 동료 중엔 여신의 뜻을 들을 그 아이가 없었지.”
확실히 들은 적 있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 기록되었던 용사 파티와 실비아씨가 이끌던 파티의 가장 큰 차이점.
실비아씨의 동료 중엔 성녀가 없었다.
이 시대의 여신교는 성녀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여신교의 기세가 많이 약해졌다고 백작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녹색의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 너도 없었고, 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그 아이도 없었기에, 나는 이 뒤틀린 운명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용사의 동료들이 죽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
“참혹하고, 슬픈 광경이었지. 네 누이를 포함한 모두가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런데도 위업을 달성한 용사는 이 숲에 갇혀 버렸으니.”
“…아,”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재생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내게 정령과 소통하는 힘이 있는 탓일까.
나는 그녀가 느끼는 그 거대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정령은… 아무리 내가 정령의 여왕이라 해도… 그 힘을 다뤄줄 사람이 없다면, 현실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네가 내게 오기만을…”
하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나와 실비아씨가 살던 이 누운 나무 숲의 정령 여왕이다.
이 숲의 끝자락에 마왕의 성이 세워지는 것도, 이 숲이 마기로 오염되는 것도, 용사와 동료들, 하다못해 이 숲을 지나가는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그리고 마왕의 저주를 받은 실비아씨와 내가 무고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도, 그녀는 전부 보았을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 커다란 슬픔을 느끼면서도 어째선지 나는 속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불만 가득한 의문을 따지듯이 외쳤다.
“운명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정령의 여왕인 당신도… 그리고 여신도… 그 위대한 두 분도 운명이 이렇게까지 뒤틀리는 걸 막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래.”
“고작 성녀가 나오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제 부모님, 마리아 누나, 그리고 라일라… 모두 죽었단 말입니다. 실비아씨도… 그렇게나…”
“미안하구나… 정말 유감이야.”
“신적인 존재가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위대한 신들조차 인간의 뒤틀린 운명을 수정하지 못한다면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그걸 어떻게 이겨낸단 말입니까!”
“…오, 애쉬.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단다.”
속이 끓어오른는 것 처럼 답답해져 왔다.
어느샌가 내 손바닥 위의 여우는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내 마력으로 돌아간 걸까.
나는 빈손으로 꾹 주먹을 쥐고는 팔을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떨어진 고개에서 비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명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서 인간들이 꼭두각시처럼 따르게 했다면, 적어도 지키기라도 하셨어야죠.”
녹색의 여인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얇은 나뭇가지 하나만 달린 그녀의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거대한 뿌리가 그녀의 다리 끝에서 솟아 나와 그녀를 지탱했다.
그녀는 한손은 자기 가슴에, 다른 손은 내 어깨를 향해 뻗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마침내 내 어깨에 그녀의 손이 닿을 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쉬,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해. 네 분노를 이해할 수 있어. 부디 나의 무능을 용서해 주렴.”
“…”
“그래도 내게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나조차 그리고 여신께서조차 이 운명이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단다. 심지어 마족들의 신조차도 이 망가진 운명에 당황했을 정도였으니까.”
“…뭐라고요?”
“지금의 용사와 대립한 그 마왕은, 운명에 예정되어있던 마왕이 아니었어. 나는 물론, 여신께서도, 그리고 마신조차도 이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단다.”
“…”
“인간들이 수많은 타락과 기행으로 운명을 빗겨나가게 했듯이 마족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는 것만 간신히 알게 되었단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인간을 저버리거나 내버려 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
그녀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감돌았다.
녹색의 여인은 슬픈 목소리로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다.
“얼마 전, 여신님께선 이 뒤틀린 운명을 고쳐보기 위해 인간과 접촉해선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교황에게 경고를 남겼단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성을 잃어버리는 벌을 받았어, 아마 나중엔 돌아오실지도 모르지만…”
“잠깐… 그럼… 지금은 여신께서 존재하지 않는단 뜻인가요?”
“…나같은 말단만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기 위해 남았지.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지만…”
녹색의 여인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방금 전까지의 인자함과 자상함이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자리를 채운 건 단호함과 근엄함, 그리고 서슬 퍼런 독기가 서린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림은 결실을 보았다.”
“…”
“애쉬, 너는 그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내 숲에 나타났지. 마치 운명처럼.”
“아…”
“라일라의 일은 유감이구나…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어디서든 사랑받는 운명이었던 아이였는데…”
“…”
아, 라일라.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모를 이 운명의 실타래가 엉킨 순간,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다가온 이 거대한 운명의 파도에 그녀는 그저 휩쓸려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정말로,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건가.
그녀는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네가 내 앞에 서 있으니, 뒤틀린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그 많은 이들의 영혼이 마침내 의미 있는 희생이 되는 순간이 온 것이란다.”
“의미라니, 이제 와서 무슨,”
“비록 네가 네 안에 잠든 힘을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지만, 네 몸속을 파고든 채 곪아가던 마기가 네 재능을 자극해준 덕분에, 우리는 만나게 되었어. 이제 모든 걸 바르게 고칠 때가 온 거야.”
“바르게? 고친다고? 무슨 소리예요. 이미 다 끝났잖아요. 마왕은 죽고 없어요. 제 가족도 이미 다 죽었고, 실비아씨도 너무나 오랜 시간 고통받았고, 이 빌어먹을 이야기는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
“아니. 그렇지 않아.”
녹색의 여인은 내 말을 우악스럽게 끊었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문장이, 그녀의 노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마왕은 죽지 않았어. 애쉬. 실비아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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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