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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

       이제 와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도 별로 의미가 없다.

        

       나는 나대로 노력했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솔직히, 또다시 며칠이라는 시간을 돌려서 일을 해결하라고 하면 확실하게 해낼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과정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일을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별로 좋지 않았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전장으로 다시 나가는 건 한동안은 하고 싶지 않다. 냄새도, 그 특유의 축축함도, 시끄러운 소리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루카스와 헤어진 직후에 그냥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푹 자버렸다.

        

       머리가 너무 과열되어서 적어도 앞으로 몇 시간은 정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눈을 떴을 때, 몸이 정말 엄청나게 가벼웠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몇 가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명상을 배워서 피곤함을 달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명상보다는 그냥 자는 것이 훨씬 낫다. 명상 그 자체는 몸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피곤함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상으로 정신을 유지하려면 중간중간 제대로 된 휴식도 섞어야 했고, 몸의 체력도 일정 수준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사실 운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간을 언제 얼마나 되돌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체력단련을 하더라도 갑자기 터진 사고 때문에 시간을 돌리게 되면 그만큼의 노력이 날아가 버리는 셈이니까.

        

       버릇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버릇을 들이려고 몇 번이고 돌렸고, 지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주인공 일행은 따라가야 하니 억지로라도 최소한의 단련은 했지만, 그렇다고 탈인간급의 주인공들을 따라잡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어제 전장에서 그 난리를 치고, 이후에도 일행을 따라다니며 의뢰를 수행하고도 기절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최소한의 단련과 명상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명상이라도 배우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뻗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몇 시간이라도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스승님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레오와 그 일행이 돌아왔을까?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성을 만나러 간 일행의 수련이 그렇게 짧을 리는 없다. 밤새 배웠어도 아주 조금밖에 배우지 못했을 거다.

        

       뭐, 이번 이벤트는 검성과 얼굴을 텄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

        

       꼬르륵.

        

       어제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기 때문인지, 벌써 배가 울렸다.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 시였다.

        

       씻고 밥이나 먹으러 갈까.

        

       *

        

       평소에 아무리 규율 잡힌 생활을 해왔다고 해도, 정말 성실한 극소수의 인간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풀어주는 순간 그 규율을 확 벗어나게 된다.

        

       아카데미 기숙사에서는 오전 일곱 시 반까지는 일어나서 준비하고 식사한 뒤, 아홉 시까지 교실에 출석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 이 지역을 담당한 제니퍼는 학생들을 굳이 그렇게까지 잡는 성격은 아니었다.

        

       원한다면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도 상관없다. 자기네 성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래 자건, 얼마나 즐겁게 놀고 쉬다 가건 제니퍼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학생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어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던 거겠지. 안 그러면 최소 점수도 맞추지 못할 테니까.

        

       윈터필드 성의 식당이 한산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학생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게임이었다면 그냥 리소스를 그만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학생이 고작 세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이유가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두 명은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 애들이었다. 같은 귀족 A반이었으니까. 게임에서도 봤고, 설정집으로도 읽은 애들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깊은 대화를 하던 사이는 아니었다. 사실 스토리에 크게 관여하는 네임드 캐릭터들도 아니고.

        

       여자애와 남자애가 마주 앉아서 식사 중이었는데, 성이 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딱히 남매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사귀는 것 같은 분위기도 아니고…… 어쩌면 일행이 몇 명 더 있는데 아직 기숙사에 퍼져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외에 다른 한 명은…….

        

       …….

        

       어.

        

       누구지?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서 숏컷을 하고 있는 그 애는, 머리카락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얼굴에 그 얼굴에 미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긴, 머리카락이 짧다고는 해도 웬만한 남자애들보다는 긴 편이었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입고 있는 교복도 여성용 교복이었고.

        

       코트는 벗어서 비어있는 옆자리 의자에 얌전하게 걸쳐두고 있었기에 안에 입고 있는 교복이 확 드러나 보여서, 그 모습을 보고 굳이 남자라고 착각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귀족 반에 저런 애가 있었나?

        

       일전에 이야기했듯, 게임 내에서 귀족 반 애들은 조연이라도 모두 각자 다른 모델링을 가지고 있었다. 설정집이니 공략집이니 해서 몇 번이나 게임을 플레이하고 온갖 책들을 읽은 내 머릿속에는 그 애들의 리스트가 여전히 들어있었다.

        

       그리고 저 애는 그 리스트 중에는 없었다.

        

       평민 반 애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그 애들도 지금 다른 곳으로 파견 실습을 하러 갔을 테니까. 가까운 곳에서 굳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만약 정말로 사람을 보내 전해야 할 정보가 있다면 굳이 그걸 학생한테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편견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에게서 느껴지는 어딘가 귀족스러운 분위기도 있었고.

        

       “…….”

        

       음.

        

       좋지 않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엮이면 곤란해지는 거 아닐까?

        

       안 그래도 어제 온갖 일을 겪은 나는 적어도 오늘까지는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기에, 일부러 그 애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판이 있어서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여기는 누군가가 돈을 받고 운영하는 식당이 아니니까.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면 금방 급사가 오고, 식사 메뉴를 알려준 뒤 거기서 빼고 싶은 것과 더 넣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면 가져다준다. 아침이 부담스럽다면 커피 한잔으로 때워도 된다.

        

       자리에 멍하니 앉아 앞을 가만히 바라보며 급사가 다가오길 기다리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몹시 정갈하고 규칙적인 발소리였다. 게다가 급사의 또각거리는 걸음걸이와는 또 달랐다. 급사가 신고 다니는 구두는 보통 회사원들이 신을 법한 말 그대로의 ‘구두’였으니까. 학생들이 신는 것도 일단은 구두였지만, 그래도 정장용 구두보다는 훨씬 움직이기 편하고 부드러운 재질이었다.

        

       그렇기에 걸을 때도 또각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교내에서도 선생들과 학생들의 발소리는 생각보다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들렸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발소리는 그 ‘학생들’의 발소리였다.

        

       “…….”

        

       불안하다.

        

       왠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또 벌어질 것 같은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황녀님.”

        

       그리고 나의 예감은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어깨를 움찔거리지 않았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아마 전날에 못 볼 꼴을 다 보고, 폭탄 터지는 소리나 총소리를 질리도록 들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던 거겠지.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나를 부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늠름한 미소녀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꼿꼿하게 서 있는 그 태도를 빼놓고 보면 얼굴은 조금 앳되어 보였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항상 보는 수많은 앳된 얼굴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것은, 적어도 나보다 한 살은 어리다는 뜻이었다.

        

       키는 생각보다 컸고, 신체 자체도 꽤 발달해 있기는 했지만,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어린 분위기는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척.

        

       그리고 그 어리고 보이시한 미소녀는 나에게 아주 멋들어지게 경례했다. 그냥 손만 올라가는 게 아니라 발뒤꿈치를 부딪혀서 딱! 하는 효과음까지 들렸을 정도다.

        

       경례 방식이 제국식은 아니었다.

        

       “…….”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올려다보고 있으니, 그 애도 경례한 자세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거 지금 인사하고 있는 건가?

        

       “편하게 있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그 애는 손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내렸다. 이번에도 옷이 움직이며 ‘척!’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저게 현실에서도 들릴 수 있는 소리였구나.

        

       “용건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옛!”

        

       “…….”

        

       그 각 잡힌 대답에 그대로 손을 올려 이마를 짚을 뻔했지만, 나는 꾹 참았다.

        

       “저는 레나 마이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그런 질문이 튀어나올 뻔했다.

        

       “저희 아카데미의 학생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나의 질문에 레나 마이어가 대답했다.

        

       “이번에 편입하게 되어서 인사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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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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