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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도 먹구름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티타임용 테이블 건너편에서 아셀라가 눈총을 보내고 있으니 당연했다.

     

    이 자리에서 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상대는 공녀, 프레다이건만 그녀는 나와 마주하지 않고 어째 내 옆에 바짝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아있다.

     

    가까워, 이 여자야.

     

    프레다가 코를 시큰거리며 말했다.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건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아버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거든요. 그분이 없으시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지 상상도 못 해요.”

     

    서부 공작이 없어도 그녀는 아주 잘 산다.

     

    미래에서 프레다는 아비의 자리를 이어받아 대공이 되어 서부를 호령하고 있었으니까.

     

    서부 공작이 아셀라의 즉위 후 위축되었던 반면, 프레다는 황제 아셀라와 꽤 죽이 맞아서 다시 공작령을 키워냈다고 안다.

     

    내가 프레다와 직접 엮일 일은 없었기에 잘은 모르는 인물이다.

     

    서부의 광견이라고만 대충 전해 들었다.

     

    “바로 감사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날 선생님과 전하도 꽤 큰일이었지요. 결국 뵙지 못하고 황궁을 떠나야 했답니다. 그래도 드디어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프레다가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게는 바닐라가 아니라 흙탕물 맛이었다.

     

     

    [No. 077 : 질투의 화신 92% → 94%]

     

     

    그새 또 올랐네.

     

    슬쩍 눈치를 보니 황금빛 마나가 이글거리다 못해 흰자위를 다 덮어버릴 기세였다.

     

     

    질투의 화신 배드엔딩은 내가 아셀라를 배신했을 때 발생한다… 고 생각한다.

     

    아셀라가 본능적으로 프레다를 거물이라고 느끼고 경계하는 걸까.

     

    실제로 거물인 헤이케의 파벌로 이직을 제안받았을 때도 이랬었지.

     

    ‘내가 공작가에 관심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긴 하겠어.’

     

    월광궁은 황실의 궁이지만 그간 카밀라가 운영해와서 실속이 없다.

     

    아셀라로 전권이 옮겨온 이제야 불이 붙어 막 성장을 시작한 참이다.

     

    금화 2천 개는 황족 주치의인 나조차 평생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상당한 액수지만, 아셀라가 내게 융통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이기도 했다.

     

    반면 공작가는 1만 개를 턱 내놓았다.

    심지어 무이자에 계약서도 없다.

     

    덤으로 나를 목표로 삼은 것 같긴 한데.

     

    공작가도 이 사업의 핵심이 내 의학과 기술이라고는 알고 있다. 여차하면 나만 빼갈 밑밥을 뿌리려는 의도가 아닐까.

     

    아셀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나를 돈 때문에 배신하는 소인배로 생각하나.’

     

    아셀라의 진의까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면 조금은 실망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충성이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무턱대고 공작가의 금화를 거절하기엔 아까운데.’

     

    제약공장의 초기 기반은 가능하면 튼실하게 다져놓는 게 좋다는 네리아의 말도 옳다.

     

    돈이 없으면 당장 진행 중인 공사도 멈춰버린다.

     

    우선 공녀와 이야기를 나눠볼까.

     

    “공녀님, 파티장에서의 일이라면 충분히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괘념치 마시죠.”

     

    “어떻게 말만 가지고 입 닦겠어요. 저는 신의 있는 여자랍니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저야말로 공작 각하같은 훌륭한 분을 위해 힘쓸 수 있어 영광이었지요. 하지만 이미 공작가에서 전해주신 성의로도 충분합니다.”

     

    “어머, 조금 섭섭하게 들리는데요? 왜 선생님께서 제게 선을 그으시는 것 같죠?”

     

    프레다의 눈이 얇아졌다.

     

    왜긴 왜야, 아셀라에게 살해당할 것 같으니까 그렇지.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다.

     

    계약서가 없는 한, 초기 투자금을 빌미로 이후 우리 가업에 공작가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해오면 앞으로도 골치가 아파진다.

     

    내가 취해야 할 방향은 둘 중 하나다.

     

    공작가와 확실한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아예 금화 1만 개를 돌려주고 없던 일로 하는 방법이다.

     

    후자는 당장 불가능하기도 하고, 공작가와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즉 필요한 건 문서.

     

     

    내가 가볍게 웃으며 프레다에게 말했다.

     

    “선을 긋다니요, 다만 전해주신 과분한 보답이 폐가 될까 그렇습니다.”

     

    “후훗, 그 정도 금화라면 당연히 드려야 할 원조이니 마음 두지 마세요.”

     

    “그러기엔 지나치게 큰 액수입니다. 행여나 추후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수령 증서라도 써 놓는 게 어떨지요.”

     

    프레다의 얼굴이 조금 쌀쌀하게 변했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기에 돌려 표현했어도 내 말뜻을 이해했다.

     

    문서는 금화 1만 개를 나중에 확실히 갚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 속에는 이 이상 우리 사업에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고 프레다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선생님, 그런 문서 따위 없어도 될 방법을 제가 알아요.”

     

    그런데 프레다가 세 번째 방안을 제안했다.

     

    슥, 그녀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내 팔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려놓았다.

     

    “하, 지금 무슨.”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아셀라의 열기가 나를 녹일 정도라고 느껴졌다.

     

    프레다가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가와 후작가가 혈족으로 이어지면 사소한 돈이나 사업은 문서 없이도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잖아요?”

     

    우당탕!

     

    아셀라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프레다는 그런 아셀라를 즐겁다는 듯 쿡쿡대며 바라봤다.

     

     

    [No. 077 : 질투의 화신 94% → 98%]

     

     

    점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한다.

     

    “아, 공녀님께서 남동생이 계신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제 여동생인 네리아는 아직 혼약자를 구하기에는 이릅니다.”

     

    “정말, 선생님. 계속 모른 척하시기에요?”

     

    프레다가 내 시선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 바람에 깊게 패여 음영이 진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프레다의 말뜻은 잘 안다.

     

    정치적인 혼약을 빌미로 내 의학을 공작가에 귀속시키고 싶다는 소리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셀라와 혼약 관계인 건 잘 알 텐데, 조금도 주저않고 제국의 황녀에게 대놓고 싸움을 걸었다.

     

    왜 광견이라고 불렸는지 이해가 간다.

     

    “공녀, 그 다음 말은 잘 생각해서 골라야 할 것이야.”

     

    아셀라가 낮은 톤으로 읊조렸다.

     

    여태 아셀라를 반쯤 무시하던 프레다가 도발하듯 대답했다.

     

    “왜 그렇게 흥분하셨나요, 전하. 제가 임자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고트베르크 영식과 3황녀 전하가 비즈니스 때문에 혼약을 맺은 건 사교계에서 유명하다구요.”

     

    “뭐어?”

     

    “전 거짓말 안 했어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정말, 애초에 전하께서 영애들의 접근을 막으려 공자님이 망나니라는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구요.”

     

    역시 프레다 슈바르츠슈바이크.

     

    공작령을 다스리게 될 여자는 아셀라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기가 쎘다.

     

    황족인 아셀라가 표면적인 계급은 더 높지만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하면 둘의 위치는 사실상 동급이다.

     

    저 아셀라를 상대로 조금도 기죽지 않고 목적을 위해 멋대로 행동한다.

     

    미래에서는 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도 있었을 텐데, 첫 단추를 잘못 끼워버렸다.

     

    문제는 그 고래 싸움으로 지금 내 등이 터지게 생겼다는 거지.

     

    “전쟁을 선택했구나, 슈바르츠슈바이크.”

     

    “평소에 그렇게 화내시면 피부에 안 좋아요. 남자에게 인기도 없답니다?”

     

    “걱정 말거라. 그대가 본녀의 매끈한 피부를 확인할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니.”

     

    아셀라의 눈에서 빙글, 마나가 회전한다.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당장에라도 마법을 발동할 셈이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아셀라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코를 들썩인다.

     

    “헤엣치.”

     

    그녀가 조그맣게 재채기를 하고는 코를 훌쩍였다.

     

    적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창피한 때문인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인상을 잔뜩 구긴다.

     

    ‘바람이 차긴 하네.’

     

    벌써 또 그런 계절이지. 북쪽이기도 하고.

     

    나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찬 곳에서 너무 오래 계셨군요.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직 이 요물과 이야기가 안 끝났어.”

     

    “황녀님, 주치의의 말은?”

     

    “…들어야지.”

     

    아셀라는 못마땅한 듯 프레다를 노려봤다.

     

    내가 아셀라의 팔을 문질러 열을 내주니 그나마 조금 얌전해진다.

     

    어째선지 정작 프레다도 득의양양하던 태도가 사라진 후였다.

     

    “흥. 제도에서만 지내시는 황녀님은 이 정도 추위도 힘드신가 봐요. 그렇게 항상 주치의가 필요하셔서 어떡해요. 몸이 얇으셔서 그러신 거니 운동을 하시면 어떨까요?”

     

    프레다가 길고 튼실한 다리를 반대로 꼬며 과시했다.

     

    끝까지 도발하는구나. 아셀라의 스트레스는 어차피 내가 넘겨받게 될 텐데.

     

    그리고 정작 프레다도 더운 지방에서 산다.

     

    하지만 아셀라는 화를 내리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프레다를 향해 여유롭게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그만한 미로 공자를 유혹하려고?”

     

    “겨우라니요. 황녀 전하보다야….”

     

    “나중에 봐. 누가 이기는지.”

     

    아셀라가 턱을 치켜올리고는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프레다에게 몸짓으로 이 이상 아셀라를 건드리지 말라고 전달하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걸으니 아셀라가 말을 걸어왔다.

     

    “공자, 저 토실토실한 애가 나보다 이뻐?”

     

    흠.

     

    다른 할 이야기가 많이 있을 텐데 그 주제부터 나온 건 조금 의외였다.

     

    아셀라도 외모부심이 긁히면 못 참는구나.

     

    지금이야 프레다가 훨씬 여성스럽지만 나는 아셀라가 어떻게 클지 잘 안다.

     

    “물론 황녀님께서 어느 누구와 비견할 필요도 없이, 하늘 아래 최고의 미를 지니셨습니다.”

     

    “흥, 그렇지?”

     

    아셀라는 내 대답에 조금 만족한 듯했다.

     

    “공녀는 사업 수완이 좋은 자입니다. 저희 제약공장에서 가능성을 보고 숟가락을 얹을 생각이겠지요. 공작이 쾌척한 초기 투자금을 빌미로 앞으로 간섭하면 귀찮아지기에 문서로 떼놓을 생각이었습니다만.”

     

    내 말에 아셀라가 의외라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설마 제 의도를 모르셨어요?”

     

    “아니, 그건 알았지. 지금은 공자가 내 생각보다 한참 바보라서 놀랐어.”

     

    “대체 뭐가요.”

     

    “흐응… 그럼 공녀의 혼약 신청은 어떻게 이해했는데?”

     

    “공녀가 비즈니스 혼약이라는 단어도 썼잖아요. 그런 의미였겠죠.”

     

    “받아들일 생각은 안 들었어?”

     

    “제겐 황녀님이 있는데 뭐하러 그래요.”

     

    혹을 떼기도 바쁜데 하나 더 붙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금화 십만 개를 줘도 사절이다.

     

    “흐, 흐응.”

     

    내 대답을 들은 아셀라는 입술을 꼬물거리는 게 어쩐지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No. 077 : 질투의 화신 98% → 22%]

     

     

    다행히 확률은 꽤 떨어졌다.

     

    또 원래대로는 안 돌아갔지만.

     

    터지기 직전에 막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저 여자는 꽤 완고해서 골치 아프네요. 마음 같아서는 초기 사업구조를 맘대로 건드린 것까지 책임지게 하고 싶습니다만.”

     

    “지게 만들자.”

     

    “방법이 있으세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아셀라가 악마 같은 미소를 띄우며 품에서 수첩과 깃펜을 꺼내들었다.

     

    “수첩도 들고 다니셨나요.”

     

    “응. 공자 거가 편해 보여서.”

     

    아셀라가 수첩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뭐 하셔요?”

     

    “아빠한테 이르려고.”

     

    엥.

     

    “황제 폐하께요? 겨우 이런 일을요?”

     

    “아니.”

     

    아셀라는 그새 즐거워졌는지 쿡쿡댔다.

     

    “쟤 아빠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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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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