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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73

        

         

       반크로프트 사상충은 아주 쓸만한 수단이다.

       사람 몸에 파고들어 성장하기 시작한 기생충이 얼마나 자랐느냐에 따라서 숙주의 시력을 앗아갈 수도 있고, 안구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 때에도 유리하겠지만…. 그 자체로도 매우 쓸만한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

       사람에게 있어서 시력이라는 것은 큰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곧 비전투 인원을 양산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그 비전투 인원들이 전쟁터에서의 군인들처럼 함부로 잘라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종교라는 틀에 한데로 묶여서 ‘형제’로 취급받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전우조차도 쉬이 버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정인데 어찌 하나의 종교, 하나의 성으로 묶여있는 이들을 함부로 버리겠는가.

         

       기생충 하나만으로 ‘장작’이 될 이들을 무력화시키는 효과가 있으니.

       과연 잘 마른 장작에 물을 흠뻑 적셔 불이 붙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느냐?

       심지어 물에 젖는다고 한들 장작이라는 본질이 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생충에 감염된다고 하여 사람이 죽거나 하는 일은 없음이니 이 역시도 좋은 일이다.

         

       ‘괜히 죽어 나가면 저주를 받을 수도 있으니.’

         

       저주라는 것은 인과가 성립되었을 때 극대화된다.

       다른 주술들보다도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인과가 충족되기만 한다면야 아주 효과적인방법. 그렇기에 저주가 성립될 일을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음이니.

         

       ‘그리고…. 그래. 현자여, 불꽃의 현자여. 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으렷다….’

         

       그렇기에 박진성이 진정으로 사용하려는 것은 상식과 편견의 맹점을 이용한 일격.

       시크교가 한국까지 진출한 종교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세울 수 있는 계획.

       박진성이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불꽃’들이다.

         

         

         

        * * *

         

         

         

         

       일본이라는 나라는 인구수는 내수 시장이 충분히 돌아갈 정도로 많고, 땅 역시 꽤 넓은 편이다. 게다가 땅도 비옥하지는 않지만, 농사짓고 살기에 충분한 수준이며, 맹수라고 해 봤자 늑대나 여우, 멧돼지 정도였으니 사람이 살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땅이었다.

       게다가 섬나라 특성상 외부의 바다라는 천연의 방벽이 그들을 일차적으로 둘러싸며 지켜주고 있기까지 했으니…. 그래. 객관적으로 나쁜 환경은 아니다.

       장단점을 따져보았을 때 의견이 갈릴 정도는 충분히 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 열도에 관해서 물었을 때 정말 좋은 땅이라고, 최고의 땅이라고 말하는 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당장 다른 나라 사람들만 하더라도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자기 고향 땅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최고라고 말하곤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겉으로는 좋다고 말을 하면서도 철저하게 익명이 보장되는 설문조사에서는 그리 긍정적인 대답을 적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재해(災害).

         

       자신이 살아가는 땅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살아가는 사람들마저도 치를 떨게 만드는 그 끔찍한 경험이 바로 그들이 익명이 보장되는 설문조사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는 이유였다.

         

       쓰나미.

       지진.

       태풍.

       화산 분화.

         

       환태평양지진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태생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수많은 재해.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지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활화산이 있는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치고 화산 분화의 공포에 떨어보지 않은 이가 없다. 거기에 해마다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태풍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고, 한 번 들이닥치면 사람과 재산을 쓸어버리는 쓰나미는 이미 일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재해는 섬나라라는 장단점이 존재하는 지형조차 감옥처럼 만들어버린다.

       안전하게 고립되어 있다면 그것은 안식처지만, 위험하게 고립되어 있다면 그것은 감옥이요 처형장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일본에 살아가는 이들은 재해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였다.

       어쩌면 이들이 대륙 진출을 시도하였던 것도 이러한 재해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으로 진출을 꾀했던 것도, 돈이 넘치던 시절 일본 정부가 외국에 땅을 사서 일본인을 이주시키려 했던 것도, 인공섬이나 해저 도시를 건설해 터전을 넓히려는 시도 역시 위험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시도이리라.

         

       하지만 어디 모든 이들이 돈 많고 권력이 많을 수 있겠는가.

       돈이 많은 이들은 한 줌에 불과하며, 권력이 많은 이들은 한 꼬집이나 될까 말까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들은 저러한 거창한 시도를 생각조차 못 한 채, 그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자연재해를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유치원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지겹게 들어왔던 지진 대피 요령.

       매년 TV를 틀면 나오는 쓰나미 경고 방송.

       여름마다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태풍 이야기.

       그냥 화산도 산이고 우리 때에 터질 위험은 적다며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

         

       하지만 그렇게 일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게 쉬이 받아들여지겠는가.

       아무리 안전불감증이라고 한들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속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매달리는 것이다.

       위험한 현실을 속이고, 자신에게 안락함을 가져다줄 무언가에.

         

       하지만 매달리되 초월적인 존재를 신앙하지는 않는다.

       일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종교가 없는 이들이 많은 민족이고, 종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설문조사를 하면 종교가 없다고 대답하는 이들이 항상 60% 이상, 세대에 따라서는 80% 까지 치솟기도 한다.

         

       대신에 이들은 말한다.

       이르기를 일본에는 팔백만의 신이 있어 그들을 수호하니.

       일본의 수많은 신민은 팔백만 신의 축복과 수호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음이라.

       그저 기도할 일이 있다면 신사로 가서 기도를 올리면 그만이고, 조금 전통적인 집안에서는 집 안에 모셔둔 분께 기도를 올리거나 조상께 기도를 올리면 그만이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특별한 종교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이며, 종교가 없는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하였다.

         

       …

       …

         

       그래.

       눈치챈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인식은 비틀려 있다.

         

       이들의 일상에 녹아든 팔백만의 신들은 종교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조상에 대한 기도 역시 종교다.

       설령 기도하지 않아도, 참배하지 않아도 이들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이름이나 모습을 떠올리는 것 역시 종교의 일종이다.

         

       어디 유일하게 오롯이 존재하는 분을 모시는 것만 종교인가?

       제우스니 헤라니 하는 인격신을 모시는 것만 종교인가?

         

       그렇지 않다.

       숭배하고, 신앙하고, 기원하고, 소망하는 것.

       자신이 행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신비에 매달리는 것.

         

       그것은 원시적이라 할 수 있을지언정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창작물에서부터 일상까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종교적 색채가 녹아있음에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자신이 사는 물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문화에 녹아있기에,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기에 그러하다.

         

       불교 문화권에서 불교 관련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하듯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기독교 관련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하듯이.

       일본 역시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 * *

         

         

         

       도쿄도 미나토구.

       일본에서 부유한 동네를 논할 때 반드시 나오는 이름.

       부촌(富村)임과 동시에 권력자들이 많기로 유명했던 곳.

         

       하지만 그것은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권력의 향기가 물씬 풍겼던 과거의 찬란한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에 몸이 시릴 정도의 썰렁함과 황량함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하잘것없는 식품조차도 하품(下品)을 들여놓지 않았던 가게들은 일전에 있었던 폭동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었으며, 예전 같았으면 금방 나갔어야 정상인 물건들은 지금까지 재고로 남아 상점 주인들의 주름살을 깊게 만든다.

         

       곳곳에 붙여져 있는 수배지.

       구석진 곳에 붙여졌다가 떼어진 흔적이 남아있는 폴리스 라인 테이프.

       생화학 오염을 경고하는 경고문구와 마크.

       수질 오염을 체크하는 아티팩트와 기계들….

         

       일본 전역을 뒤흔들었던 테러.

       미나토구를 중심으로 부촌으로 퍼져나갔던 수질 오염.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 폭동까지.

         

       이곳 미나토구에서 일어난 사건은 한국과의 전쟁으로까지 번지려 했던 시작점이며, 동시에 이곳을 부촌으로 불리지 못하게 만드는 재해와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시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시간이 지났다.

         

       테러는 수습되었고, 오염은 필사적인 노력 끝에 정화되었고, 폭동은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한국과는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었고, 아직은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같이 북한에 작전을 투입하는 등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곳 미나토구 역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마 그것은 길지 않을 것이다.

         

       『 간이 신사 』

         

       그들을 응원하듯 미나토구 한복판에 간이 신사들이 세워지고, 무녀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으니까.

       그들을 위해 신께 간절히 빌고 있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앗 제목에 오타가 생기다니…!
    깜짝놀랐네요…!
    즉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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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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