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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

       헤를라인의 사망 플래그를 한 번 봉쇄한 것만으로는 끝이 아니다. 버멜은 헤를라인 선생님을 살피기 위해 수도에 남기로 했다.

         

        반면에 나는 이곳을 잠시 떠난다. 마수의 감시도 피할 겸 본격적인 움직임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동안에는 서로 떨어져 지내야만 한다. 이건 이것대로 문제였다. 미래를 알고 있는 버멜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은,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릇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우리 둘은 점차 밀회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잠은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에 자기로 하고, 그전까지는 버멜에게서 가능한 많은 정보를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만큼 우리가 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 걸까? 요 며칠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저기, 둘이 사귄다는 게 정말 진짜야?”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들을 정도로.

         

        난데없이 나타난 여학생 무리가 나를 붙잡아두더니 그런 질문을 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일종의 반항 표시였다. 정말로 걔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뜻.

         

        물론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아닌 건 아니다. 우리 둘 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온 동향 출신이고, 심지어 국적까지 같다. 동향 사람으로서 유대감이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둘이 요 며칠 새에 하루 종일 붙어 다녔잖아. 방학 기간이면 모를 줄 알고?”

        “난 예전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저번 종강 파티에서도 그렇고, 둘이 사귀는 거 맞다니까? 이 연애 박사 클로에의 눈으로 봤을 때 확실해!”

        “근데 클로에는 모솔이잖아.”

        “입 닥쳐, 리에라.”

         

        내 앞에서 잘못된 추리를 하기 시작한 두 여학생. 그들의 추리는 곧 본연의 목적을 잃고 언쟁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한숨을 쉬고 도망치려는 찰나. 다른 여학생이 기습을 걸어왔다.

         

        “그래서?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어?”

         

        어그로를 끄는 말이었다. 세 여학생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수첩과 펜까지 꺼내 들며 필기할 준비를 끝마쳤다.

         

        수첩과 깃펜이라.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저러고 다니는 애들 대다수가 문예부거나 신문부 소속이다.

         

        문예부라면 소설 창작할 때 소재거리를 삼는 애들일 것이고, 신문부라면… 두말할 것도 없지. 틀림없이 특종을 찾는 것이리라.

         

        “엘프 수석과 금안족 차석의 사랑 이야기! 이거 소설감으로 딱 아니니?”

         

        그 여학생의 말에 나는 이들이 문예창작부 소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난데없이 로맨스 소설의 소재거리가 되어버리다니, 연애와 담을 쌓고 지내온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금 반항했다.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남녀 둘이서 온종일 붙어 다니는데 그게 연애가 아니면 뭐니?”

         

        아, 골때리네.

         

        버멜과 내가 동향 사람이라는 걸 밝혀봤자 얘네들은 안 믿는다. 오히려 지금 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수의 눈에 그 소식이 들어갔다가는 괜한 의심만 사게 된다.

         

        “우리에게만 슬쩍 얘기해 줘. 학생회에는 말 안 할 테니까!”

        “학생회?”

        “교내에서는 연애 금지잖아. 꼰대 같은 교칙 지키는 학생회 애들 때문에 짜증 나.”

         

        이젠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고 싶은데.

         

        비록 지금은 소녀의 몸에 들어와 있다지만, 어쨌거나 본래의 나는 남자. 여성의 사고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존재한다. 바로 얘네는 내가 버멜과 열애하고 있다는 루머를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유죄 추정의 원칙이었다.

         

        나는 현재 시각을 훑었다. 일 분 일초가 아깝다. 

         

        어쨌거나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이 나다. 큰 그림을 위해서라도 여기선 말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너희만 알고 있어.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오!”

         

        나는 입술에 검지를 가져가며, 쉿 하고 소리를 냈다. 거기에 여자애들은 머리가 꽃밭으로 변해 이리저리 날뛰었다. 나는 어깨를 몇 번 얻어맞은 뒤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인생 시발.

         

         

        **

         

         

        로즈마리가 스크린을 붙잡으며 몸을 떨었다.

         

        “뭐, 뭐, 뭐… 뭐야아아아악!!”

         

        그녀답지 않은 비명이었다.

         

        스크린을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가. 같은 동작을 한참이나 반복한다. 기계인 몸으로 수전증이 있을 리가 없는데, 손이 계속해서 떨리고 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마왕님을 부활시킬 계획을 준비하면서 큰 언니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

         

        ─ 너희만 알고 있어.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글쎄 이 언니가 난데없는 사랑 고백을 해 버린 것이었다.

         

        “아아아악!!”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른 종족 간의 이야기도 아니고, 엘프족과 금안족 사이에서 그렇고 그런 관계라니!

         

        “이건 금안의 수치야!!”

         

        로즈마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씩씩거렸다. 때마침 그 옆에 있던 블랜튼 공작은 한심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분이 엘프 곁을 맴도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밀회까지 벌였다고?!”

        “그게 아니면 어떻게 설명을 드립니까? 헤를라인 교수에게 갔을 때도 늘 붙어 있던 걸 보면 답이 나오지요.”

         

        블랜튼 공작의 말에 로즈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블랜튼 공작으로서 제국에 숨어든 지 수십 년.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로즈마리보다 해박했다. 

         

        블랜튼이 지닌 식견에는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감정도 포함된다. 사랑으로 가문이 흔들리고, 질투로 일을 그르치는 인간들. 블랜튼은 그 광경을 봐 오면서 체내 데이터로 저장했다.

         

        수십 년에 달하는 감정의 파도를 분류하고 습득한 그였다. 4석의 스코프로 본 결과가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아마….

         

        “금안족과 엘프 사이에서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는 너도 알 텐데?”

         

        로즈마리는 알사탕을 입에 넣으며 항변했다.

         

        “그리 생각하지 마시고 남녀 간의 일로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인간들의 역사에선 적국의 남녀끼리 서로 사랑하여 조국을 배신하고 도주한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로즈마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어쩔 수 없다. 계속해서 설득하는 수밖에.

         

        “저 버멜 호르데라는 소년, 확실히 여성 편력이 있을 만한 엘프입니다. 이목구비도 또렷하고, 키는 종족 중에서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편이지요. 성격도 나쁘지 않고, 학업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채 가려는 여자가 도처에 널려 있을 것이다. 실제로 로즈마리가 문예부인가 뭔가 하는 곳을 둘러보았을 땐 이미 몇몇 여학생이 그를 소재로 로맨스 소설을 썼을 정도였다.

         

        그 내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 당시의 로즈마리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저 엘프 면상이면 여자가 꼬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까진 잘 알아.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네, 기술고문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여신과 마왕이 유일하게 입을 모아 각자의 세력에게 가르쳤던 교리.

         

        [정신은 신체를 따라간다.]

         

        “몸이 변해야 마음이 변하는 법이지.”

        “어찌 보면 타락을 겪지 않아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을 했구나. 잭, 너 같은 녀석을 부관으로 둬서 나름 다행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로즈마리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작은 체구만큼이나 손도 가늘었다.

         

        “바이올린.”

         

        블랜튼에게서 바이올린을 받은 로즈마리는 창가에 앉아 현을 소나무 가루로 손질했다. 

         

        그녀는 곧 바이올린을 켰다. 보름달이 뜬 밤에 어울리는, 적적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그녀의 연주 솜씨는 세뇌에 걸리지 않은 자들이라도 절로 갈채를 보낼 만큼 뛰어났다.

         

        로즈마리는 한동안 눈을 감으며 티네엘라의 진혼곡을 연주했다. 

         

        “좋은 계책을 생각해 내셨습니까?”

         

        이윽고 연주를 마친 그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푸른색이었던 로즈마리의 눈빛이 다시 한번 노란색으로 바뀐다.

         

        “그래.”

         

        예술을 하니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다시 원래의 차분한 상태로 돌아온 소녀가 자신의 책략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여태 에테르를 둘러싼 모든 게 의미심장했다.

         

        에테르와 버멜은 왜 같이 움직이는가? 어떻게 자기 눈을 피해 밀회할 생각을 한 것일까? 완전히 인류 측에 붙어버린 걸까? 또 헤를라인에게 갔을 땐 둘이 동시에 움직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

         

        확실히 그 감정이라면 수월하게 설명이 된다.

         

        그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은 로즈마리는 창문을 닫고 술잔에 고급휘발유를 따라 마셨다. 그녀는 블랜튼에게도 잔을 건네며 입매를 비틀었다.

         

        “축배를 들어라, 잭. 이 위령(慰靈)의 로즈마리가 일석삼조의 계를 짜냈으니까.”

         

        블랜튼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저번에 4석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에테르를 다시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인간들에게 완전한 배신감을 느끼게 해 주면 된다는 말.

         

        “호오.”

        “이해한 모양이네.”

         

        그걸 어떻게 수행해 주느냐가 관건이었다. 로즈마리는 그 말을 한 기점으로 여러 책략을 짜내고 있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모든 일이 한결 쉬워졌다.

         

        “서쪽에 들리기 전에 작은 언니께 전해. 큰 언니가 마탑으로 돌아가는 건 12월 초가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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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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