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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

       *

        

        테러의 목적은 단순했다. 외국 사절과 연합왕국의 귀족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테러의 과격함은 다소 둔화될 수 밖에 없다. 인명 피해가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연합왕국은 크라실로프를 비난하기보다 테러 단체에 분노하는 것을 우선할 테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슬한 선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의거(義擧)다. 지난 전쟁 시절 대왕과 왕실근위대, 그리고 희생당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투쟁이다.

        

        따라서, 연합 왕국이 크라실로프를 비웃고 규탄할 수는 있어도 테러범 자체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도록.

        

        최대한 절제된, 오직 크라실로프의 군대만을 목표로 정밀하게 조직된 테러다.

        

        

        “…라는 것이 변명인가?”

        

        

        엘리자베타는 혼란에 휩싸인 광장을 내려보며 말했다.

        

        무릎 꿇은 파벨과 그의 목덜미에 총구를 들이민 이반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반카. 아니… 이반 페트로비치 경. 그대는 대체 왜 잔당 검거를 수행하지 않았지?”

        

        

        그건.

        

        음.

        

        이반은 말을 골랐다. 이세계 사람들에게 상식에 대해 설명할 때면 언제나 느끼곤 했던 당혹감을 담아서.

        

        아카데미 축제에서 테러가 일어나는 것은 상식이고.

        

        그 상식에 따르자면, 이 테러는 아카데미 학생에 의해 진압되며 그들의 전투 경험과 소정의 보상으로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 아마도, 이번 스테이지의 보스였을 파벨은 명백히 적정 난이도를 초과한 설계였으므로 사전에 교전을 차단했다.

        

        ‘주인공’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벤트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겠지만, 그건 정량적인 난이도 설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다.

        

        이반은 과학지상주의의 21세기를 살아온 현대인이다. 사람이 근성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수용 가능한 한계 자극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법이다.

        

        

        라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이반은 그저 가만히 엘리자베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엘리자베타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부왕(키릴)이 선대왕(이반)에게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했고, 선대왕의 전사와 함께 왕실근위대 거의 전원이 전역에서 산화했다고….’

        

        

        엘리자베타는 떨리는 손을 애써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쥐었다. 맑은 홍차에 찰랑이는 물결이 일었다.

        

        그녀는 그 위로 잔상이 일그러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왕실근위대의 입장에서 그건….’

        

        

        버림받은 것이다. 아니 보다 명확히 설명하자면, 배신당한 것이다. 왕권강화라는 명목으로, 권력욕에 미친 왕자가 제 아비와 함께 병력을 갈아 넣은 것이다.

        

        변명하자면 가능한 일이다. 당시 왕실은 그런 악수를 차악으로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태로웠으니까. 천천히 무너지느냐, 비정한 결단을 내리느냐. 당시 키릴의 마음을, 이제 성장한 엘리자베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귀족들은 더 이상의 소모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병력 소모가 없었다면 크라실로프는 전쟁 시절 멸망한 망국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모두를 휘어잡을 강력한 명분과 권한이 필요했다. 선왕과 왕실근위대 전원을 도려낸 것은 아마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판단이었을 터.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마저도 혐오감이 치솟아 오르는 과거지만.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그녀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왕혈을 이은 그녀는 이들의 분노에서 당당할 수 없다.

        

        분노? 당연히 그녀 또한 분노한다. 그녀는 조부를 기억하고 있으니. 왕실근위대가 어떤 이들이었는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는 정치적인 동물이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반카. 그대 또한 그러한가?’

        

        

        왕실근위대 출신으로 한 차례 버림받았고,

        절멸부대 출신으로 다시 한 차례 죽기를 강요 받았던 너 또한.

        

        감정 없이 정치적 당위성을 고려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당위성이란 허울 좋은 낱말을 이해해줄 수 있는가? 이 나라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고, 오직 의무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가?

        

        그 헌신이 세상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엘리자베타는, 세상을 잃은 텅 빈 눈으로 이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슬픔을 애써 숨긴, 냉철한 군주의 표정으로.

        

        상식적으로 이반이 그녀를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테러 진압을 방기하고, 테러의 수괴를 내 눈 앞에 대령했구나.’

        

        

        왕혈 앞에서 무장한 채로.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엘리자베타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것이 대가라면 대가이리라. 그녀는 슬프게 웃었다.

        

        

        “파벨 세르게예비치 올로브. 고개를 들라.”

        

        

        파벨은 분노와 슬픔이 담긴 눈으로 엘리자베타를 올려보았다.

        

        경위와 의도가 무엇이었건간에 그는 반역자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떠난 대왕과 부하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와 있으며, 다만 능력이 부족했을 뿐 그의 목표는 왕가의 몰락이었다.

        

        그것은 변치 않는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슬픈 눈으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대의 과오는 이 나라의 과오로 덮겠다. 그대는 언제든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 이 나라는 더 이상 그대를 억류하지 않으리라.”

        “…나 하나에게 자비를 보인다 한들 왕가의 죄를 모두 대속할 수 있다 여기시오?”

        “그럴리가.”

        

        

        엘리자베타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가의 과오를 대속하는 것은 온전히 본인의 권리다. 그러니 반카, 경은 해야 할 일을 하라.”

        “해야… 할 일 말씀이십니까?”

        “내 오라비는 계승권을 잃었고, 내 아비는 이제 늙고 병약하다. 본인이 이 나라에 남은 마지막 국본이니, 경은 바라는 바를 이루라. 크라실로프를 단죄하고자 한다면, 그리하라.”

        

        

        엘리자베타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슬픔으로 떨리는 손을 꾹 누르며, 그녀는 부서질 듯 화려하게 웃었다.

        

        마지막 모습만큼은 아름다워야 한다. 장절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왕가의 의무다.

        

        이반이 이 상황에 말을 고를 때, 파벨은 타오르는 눈으로 낮게 물었다.

        

        

        “그건 위선이오. 왕녀. 그대는 그대의 목숨으로 왕가의 죄를 대속한다 하였지만, 내겐 그저 도망치는 것으로 보이오.”

        “그렇다면 경은 경이 바라는 바를 말하라.”

        “내가 바라는 것은….”

        

        

        파벨은 엘리자베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을 삼켰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왕가의 명예를 바닥에 처박고, 키릴이 벌였던 참람한 죄악을 징치하고, 왕혈을 손수 끝내는 것.

        

        오직 복수.

        

        그것 만이 그가 가장 바라왔던 것이었다.

        

        감히 대왕의 이름을 팔고, 지난 시대의 영웅들을 칭송할 권리가 이 나라엔 없으니.

        

        그러나, 파벨은 엘리자베타의 얼굴을 올려보며 생각했다. 그녀 또한, 대왕의 혈육이 아니던가.

        

        대왕이 그다지도 바라왔던 모습을 온전히 품고 있는, 어쩌면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이 아니겠는가.

        

        그는 복수를 윈했다. 분명코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대왕에게 품었던 충절을 흐리게 하진 못했다.

        

        그 시절 왕실근위대는 찬란했던 대왕의 모습을 동경해 모인 자들이었으므로.

        

        

        “위선이라 하였느냐. 경의 말이 옳다. 본인은 위선자다.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왕가의 모든 권리를 손짓으로 치울 수 있으면서도 민중에겐 헌법을 받아들인 최초의 군주라는 이름으로 칭송받는다. 이보다 더한 위선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엘리자베타는 창가 너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광장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으나, 방첩사령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테러는 진압되고 있었다.

        

        

        “이 나라의 모든 정보는 본인에게 흘러들어온다. 이 나라의 모든 총부리는 본인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본인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필연적으로 위선이다. 무릇 권력이란 주께서 인간에게 허락한 가장 사특한 악덕이 아니겠느냐.”

        “….”

        “그러니 본인은 위선자임을 자부하며, 본인의 위선을 부정하지 않겠다. 본인의 위선이 이 나라를 풍요롭게 한다면, 본인은 마땅히 위선의 대가를 치루겠노라.”

        

        

        엘리자베타는 손을 뻗어 파벨의 팔을 쥐었다.

        

        이반이 움찔거리며 그녀를 만류하려 할 때, 엘리자베타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이반을 뒤로 밀어냈다.

        

        그녀는 파벨을 일으켜 세웠다. 그를 이끌어 창가로 향했다.

        

        프리첸카야의 광장이, 공원이, 그리고 저 멀리 가로와 시내가 보인다.

        

        대학의 혼란으로 모여든 군대와 별개로, 군대가 만들어낸 차단선 너머엔 여전히 평화로운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이 자리의 혼란은 지엽적이다. 프리첸카야는 연합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는 대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지 고작 4년이 흘렀을 뿐임에도.

        

        이 도시는 일어나고 있다. 일어날 것이다. 일어나야만 한다.

        

        인간은 결코 무너지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보아라, 이것이 선왕께서 바라셨던 풍경이며, 선왕의 죽음으로 완성된 평화로다. 선왕의 덕이 쌓아 올린 도시다. 왕가의 과오는 본인에게 전가하고, 그대는 그대와 그대의 전우들이 이룩한 이 도시에서 살아가라. 그것이 본인의 위선이다.”

        

        

        집무실의 책상 서랍엔 상아색 권총이 한 정 보관되어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파벨의 손에 쥐어주며 뒤를 돌았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경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 본인은 지금껏 수많은 이들에게 ‘죽으라’ 명해왔으니, 본인은 결코 죽음의 앞에서 타인의 뒤에 숨지 않겠다.”

        

        

        파벨은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쥐고 움찔거리다가, 곧 고개를 떨어트리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철컥, 권총이 힘 없이 바닥에 뒹굴었다.

        

        파벨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

        

        

       -짐이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서서 죽으라! 죽음 앞에서 도망치지 말라. 서서 그대들의 죽음을 받아들여라!

        

       -짐은 그대들의 목숨과 안전을 보전해주는 임금이 아니다. 짐을 폭군이라 말하더라도 좋다. 그 말이 옳도다!

        

       -짐은 오직 그대들의 가족과 터전, 그리고 이 나라의 신민들을 보전하는 것에도 충분히 벅차다. 짐이 이토록 무능한 임금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서서 죽으라!

        

       -그러나 명심하라. 짐은 결코 그대들의 뒤에서 죽지 않으리라. 짐은 그대들의 목숨을 원한다. 그 대가로 짐의 목숨을 내어주겠노라. 이 나라를 위해, 그대들의 목숨을 짐에게 바쳐라!

        

       -짐과 그대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스러지겠으나, 크라실로프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짐을 따르겠느냐? 기꺼이 죽음을 향해 진군하겠느냐?

        

        

        그 말에 무어라 대답했더라.

        

        파벨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래, 가자. 짐은 오늘 이 나라의 가장 위대한 사내들과 함께 죽는구나!

        

        

        아 그래, 그렇게 말했더란다.

        

        이반 대왕 만세. 크라실로프여 영원하라.

        

        주여, 우리의 왕을 가호하소서!

        

        거대한 군마 위에서, 이반 대왕은 고개를 저으며 호탕하게 웃었더란다.

        

        

       -주여, 인류를 가호하소서!

        

        

        이제 곧 죽을 노인을 가호할 힘이 있다면 그 대신.

        

        이제 태어날 아이들이 제 나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 말하며 왕은 달렸다. 칠용장의 면전을 향해 달렸다.

        

        현실에 도래한 관념을 향해 달렸다. 신이라 불리던 괴수들을 향해 달렸다.

        

        이 전선이 붕괴된다면 프리첸카야에 적의 군세가 도달할 때 까지 막아설 수 있는 병력이 없었으므로.

        

        단지 며칠이라도 더, 이 나라의 죽음에 유예를 가져올 수 있다면 아쉬울 것 없다 말하며 달렸다.

        

        함께 진군하던 사내들이 하나 둘 사라져갈 때에도, 군기를 들고 목소릴 높여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달렸다.

        

        여길 보라. 나를 보라, 그대들의 왕이 여기에 있노라.

        

        힘이 다해 쓰러지는 병사들에게, 너흰 홀로 죽지 않으리라 약속이라도 하려는 듯이.

        

        뒤에서 죽지 않으리라, 그런 공허한 말이 거짓이 아니였다고 말하려는 듯이.

        

        

       *

        

        그래, 영웅은 죽었다. 하지만 왕혈은 이어진다.

        

        

        “주여, 크라실로프를 가호하소서.”

        

        

        파벨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엘리자베타는 이반을 향해 물었다.

        

        

        “귀관의 충성은 어디로 향하는가.”

        “오직 이 나라의 국본에게 향하나이다.”

        “귀관의 헌신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충성 그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도록 배웠나이다.”

        

        

        이반은 담담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베타는 한참 이 사내들을 내려보다가, 저 멀리 프리첸카야의 정광을 굽어보다가.

        

        울며, 웃었다.

        

        

        “본인의 어깨가 이토록 무겁구나.”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카데미

    그리고 한 가지 욕심을 더하자면 감히.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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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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