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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

       그……

        

       만약 누군가 이 세상을 보고 있거나, 조정하고 있으면, 이쯤 돼서 이런 장난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뭐, 내 앞에 있는 애가 원작 바깥에 있는 애라고 해도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다. 원래 게임 속이나 소설 속의 세상에 들어오면 그 안에서 등장한 적은 없지만 개 쩌는 능력이나 실력을 갖춘 캐릭터와 친해지게 되는 건 거의 클리셰에 가까우니까.

        

       내 앞에 있는 이 레나 마이어라는 애가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는 모르겠다.

        

       리클란트 자치국의 사령관의 딸이라는 거야 조금 전에 본인에게 들었으니 그렇다 치겠지만.

        

       리클란트 자치국은 후속작에서 가볼 수 있게 될 지역 중 하나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곳 중 하나였으니 이런 애와 만나게 되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어쩌면 그냥 게임 외적인 인물이 아니라, 후속작에서 추가될 인물 중 하나였을지 모르겠다.

        

       작중에서 황제와 싸워 음모를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히로인이나 주요 등장인물들이 사망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해당 세계관은 완결이 나지 않았으니, 황제 말고 다른 문제가 후속작에서 이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문제가 뭔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리클란트 자치국의 사령관의 딸이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뜻은, 리클란트 자치국에서도 나를 요주의 인물로 판단했다는 거겠지. 나 한 사람이 벌였던 일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들기는 했지만.

        

       “귀족 A반의 정원은 이미 가득 찼습니다만.”

        

       후속작에서는 히로인이 몇 명 죽어서 반의 정원수가 비었기 때문에 편입생이 오는 것이 자연스럽긴 했다. 원작에서 클레어가 편입되는 과정에서 귀족 중 하나가 집안일로 아카데미를 그만두었다는 언급이 나오니까.

        

       그런데, 아직은 한 사람도 아카데미를 그만두지 않았다. 당연히 이 레나 마이어라는 애가 들어오면 정원 초과가 되어버린다.

        

       “총독님의 은혜와 황제 폐하의 넓은 아량 덕분에 황립 론다리움 아카데미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내 질문에 딱딱 대답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 별로 나쁜 감정은 없는 모양이었다. 레나 마이어의 아버지와 그 총독이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애는 나에게 별다른 감정을 품지 않은 것 같았다.

        

       식사로 나온 것은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레나 마이어라는 애는 그걸 먹을 때도 엄청나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먹었다. 나이프로 고기를 써는데 접시와 나이프가 부딪치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식사 매너만 두고 보면 거의 귀족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기에 얼마나 엄한 가정에서 확실하게 교육받으며 자랐는지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 가는 것에 별다른 불만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나의 질문에 그 애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서려 있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황립 론다리움 아카데미는 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싫어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만약 저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이 없었다면, 나는 이 애가 이 말도 외워서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표정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지만, 태도에서 느껴지는 감정도 있는 법이다.

        

       이 아이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대감이었다.

        

       “…….”

        

       설마 앨리스가 나의 그런 태도를 구분해낼 수 있는 걸까?

        

       ……내가 앨리스한테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앨리스가 느꼈을 압박감이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한다면, 앨리스 혼자 나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애들도 나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그리고?

        

       이 무표정한 애가 아주 조금 망설이는 것 같은 분위기를 보이길래,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황녀님을 만나 뵙게 된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장에서의 활약은 들었습니다. 분명 황녀님과 같은 영웅은 세상에 몇 사람 없겠지요. 특히 저희 자치국의 기준으로 보면, 황녀님은 수많은 신민의 은인이시기도 합니다.”

        

       “…….”

        

       순간 손이 오그라들어서 식기를 놓칠 뻔했다.

        

       뭘까.

        

       왜 자꾸 얘랑 대화하는데 기시감이 드는 걸까?

        

       왠지, 내가 저런 태도로 말을 했던 적이 꽤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그렇다. 내 머릿속에는 자꾸 앨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팬그리폰의 피가 흐르시기에 그런 위대한 위업을 세우실 수 있으셨던 거겠죠. 그런 분과 함께 같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니, 그런 영광은 없을 겁니다.”

        

       아니, 한 방울도 안 흐르는데. 사실 루카스 아니었으면 남이었을걸?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도 없었다.

        

       아까 전까지 조금은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두 명의 귀족 학생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가서 한마디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나가 일어나려고 하기에,

        

       “괜찮습니다.”

        

       얼른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너무 급하게 말을 건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다리에 긴장을 주었던 레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말투랑 태도에서는 분명히 감정이 느껴지는데, 정작 얼굴에는 표정이 없으니 뭔가 엄청나게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뭐, 앳되어 보이는 표정이나, 말투나 몸에 밴 매너는 어른스러운데 정작 말하는 내용이 미숙해서 귀엽기는 했다.

        

       귀엽기는 한데, 문제는 그런 귀여운 행동에 내가 휘말리면 나도 엄청나게 쪽팔린다는 것이다.

        

       등에 식은땀이 날 것 같은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레나 마이어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그런 태도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다닐 학교는 황립 론다리움 아카데미입니다. 아주 많은 귀족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곳이기에, 다른 이의 행동이나 말에 신경 쓰는 이도 많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모든 상황에 하나하나 반응하게 된다면 학교생활이 무척 피곤해질 겁니다.”

        

       나의 조언에 레나 마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

        

       이거 컨셉인가?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표정이랑 태도가 좀 따로 노는 것 같은데.

        

       …….

        

       설마 나도 이런 식으로 티가 나고 있나?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해주고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오늘 저희가 가는 편으로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레나 마이어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이미 포장되어 기차역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

        

       어…… 음.

        

       그렇, 구나.

        

       “다시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만.”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레나 마이어에게 물었다.

        

       “어느 학급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까?”

        

       “귀족 A반입니다.”

        

       “…….”

        

       아…….

        

       그렇구나.

        

       음.

        

       그래.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

        

       “꺄악!”

        

       방으로 들어온 한 소녀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얼른 입을 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녀가 오전 몇 시간 동안 머무를 방은 개인 방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의 두께를 보면 바깥에서 소리를 들었을 가능성도 적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소녀는 방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소녀는,

        

       “멋져!”

        

       다시 한번 소리쳤다.

        

       레나 마이어는 어린 시절을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군부대 근처에서 지냈다.

        

       주변에 또래의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놀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리클란트 자치국의 군의 사령관 중 한 명이었고, 총독의 심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늘 레나 마이어를 조심스럽게 대했고, 아버지는 엄하게 대했다. 레나 마이어의 일상은 거의 군대 스케쥴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가면을 쓴 채 딱딱한 군인 흉내를 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레나를 칭찬해주었다. 늠름하고, 사령관의 집안을 잇기에 충분한 인재라고. 실제로 재능도 있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레나는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어 버둥거렸다.

        

       아버지는 엄했지만, 어머니는 레나의 어리광을 받아주곤 했다. 어머니가 3년 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적어도 어머니 앞에서 레나는 또래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이렇게 혼자 있을 때 푸는 식으로 지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레나가 군인이라는 직업에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오히려 동경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아왔기에 그런 직업이야말로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레나 마이어는 영웅을 만났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황녀 실비아 팬그리폰의 실력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영웅 그 자체.

        

       게다가 제국군과 함께 싸운 소수의 자치국 병사들의 증언이나 생존한 용병의 증언에서도 황녀의 모습이 몇 번이나 등장했다.

        

       혼자 참호를 돌파하고, 내부에서 붕괴시켜 승리의 열쇠가 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군인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오늘 만나서 잠깐 대화해 본 그녀의 모습은 황족으로서의 위엄마저 갖춘 완벽 초인 그 자체였다.

        

       “…….”

        

       그런 분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것인가.

        

       “끄으으으!”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레나는 다리를 몇 번이나 버둥거렸다.

        

       그런 그녀의 책상 위에서, 한 강아지 인형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땅을 아주 잘 판다는, 그 꽤 유명한 만화 속 개 모습의 인형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진짜’

    =

    Ilham Senjaya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 주셨기에 독자 닉네임 기능으로 인사드립니다!

    오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진작에 수정 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나중에서야 눈치채고 수정하게 되어서 부끄럽네요… 글을 올리기 전에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보고, 글을 한 번 쭉 훑어보기도 하는데 올리고 나서야 보이는 실수들이 아주 많습니다. 글 쓰다 보면 글을 쓴 직후에 다시 읽어본 글에서는 별다른 잘못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캐릭터 이름 헷갈리는게… 이건 꼭 고쳐야 하는 실수인데 작품마다 이런 실수가 일어나네요. 앞으로는 더 신경을 써서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돈 받고 글 쓰는 입장에서 이렇게 실수하면 안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더 주의하여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deadly우박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의 검기만으로 총알을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총알이 가진 에너지의 양을 줄일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이라면 맞고 죽어야 할 총알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는 있습니다. 다만 결국 ‘총알을 맞는 것’은 동일하기에 목숨이 아깝다면 총 앞에 대놓고 돌아다니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겠죠. 게임에서는 사실 적이 총알을 쏘건 검을 휘두르건 마법을 쓰건, HP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쓰러지지 않았기에 적이 총을 들고 있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작에서 목적지 A에서 B로 가는 과정은 컷신이 아니라 실제 플레이상에서 길을 가며 적을 쓰러뜨리는 식이었기에 그런 연출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죠.

    다만 컷신에서 ‘적이 쏘기 전에 벤다’ 혹은 ‘적이 쏘기 전에 피한다’ 라는 식으로 묘사되었기에 플레이어들은 그냥저냥 이해하고 넘어갔었습니다.

    ‘개인의 검기’만으로는 총알을 막아낼 수 없기는 하지만, 일정 수준의 경지에 이른 이가 고대 유물이라고 불리는 검들을 이용할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원작에 클레어가 쓰던 사복검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지금은 클레어가 아니라 원 주인이 그대로 가지고 있죠.

    오늘도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설명이 독자님께서 작품을 읽어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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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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