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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

       “네네. 이브 씨가 여왕이던 시절의 이야기죠?”

       

       “……?”

       

       선수를 빼앗긴 이브가 일시 정지라도 걸린 것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맞다. 이거 일단은 비밀이었지?

       

       뭐,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특급 기밀 같은 건 아니고, 알 사람만 아는 고오급 정보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확한 햇수는 설정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브가 은퇴한 지 엘프 기준으로도 꽤 시간이 지났다는 설정은 있다.

       

       미궁에서 장난 좀 쳤더니 레몬과 애플이 돈 못 벌어오는 왕은 필요 없다고, 400년 전부터 엘븐 포레스트는 공화정이었다고 했던가.

       

       그럼 이브가 여왕직을 때려치운 지 400년이 좀 넘었다고 보면 되겠지.

       

       인간 기준으로는 왕국 하나가 멸망하기도 하는 오랜 시간이지만, 엘프 기준으로는 한두 세대가 지난 시점일 터.

       

       착착 맞춰지는 기억의 조각들.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는 사이. 이브가 당황으로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 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며, 손을 배 앞쪽에 단정히 모은다.

       

       자세가 바뀌었을 뿐인데 이브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와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과연. 여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닌, 여왕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건 이런 느낌인가.

       

       나조차 명확한 이미지를 그리지 못한 채, 끼적였던 설정이 이렇게나 완벽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섰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나도 모르게 히죽 올라가는 입가. 그 미소를 받은 이브가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실의 눈.

       

       세계수의 유산이 내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파헤치며, 무엇하나 남김없이 끄집어낸다.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고유한 영역을 흙발로 쳐들어오는 듯한 불안감과 무력감. …혹은 경외심.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신대의 기적을 아낌없이 드러낸 이브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요?”

       

       좀 더 빨리 처리했어야 했다(X)

       

       아무리 엘프라도 나이가 네 자릿수라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다(O)

       

       귀엽다면 귀여운 속내에 낄낄 웃으며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이브에게로 향했다. 내 걸음 걸음마다 발끝에서 피어나는 작은 새싹들.

       

       마지막 남은 모든 신성력을 쥐어짜 만든 최후의 연출인데…생각보다 멋있네.

       

       그렇게 도착한 이브의 앞. 퀸 사이즈 가슴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멈춰서서는 슬쩍 뒷짐을 지고 이브를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라고 하면 믿으시겠나요?”

       

       “…….”

       

       이브의 눈에서 느껴지는 격의 차이가. 압박감이 한층 더 심해진다.

       

       미궁의 왜곡된 시공 속에서 간신히 건져낸 권능의 파편이 아닌, 온전히 지상에 남은 진짜 신의 기적.

       

       일전에 잠깐 마주했을 때는 잠깐이나마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는데…이제는 그 정도는 아니다.

       

       뭐랄까. 조금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내가 그사이에 강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어쩌면 풀돌 여신상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여신의 힘일 수도 있고……어쩌면 같은 신의 권능을 품은 자끼리의 이끌림일지도 모른다.

       

       뭐어. 어찌됐건 이브의 눈에는 내가 진실을 고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브와 그녀의 과거는 내가 짠 설정이니 처음 만난 순간부터…아니, 그 이전부터 알고 있는 게 당연하잖나.

       

       “…진실이군요.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고, 제 과거 또한 그러하지만…그렇다고 아무나 알고 있을 내용은 아니랍니다. 무엇보다 요나 씨 당신은 레몬과 애플과 같은 길바닥 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느 조직에서 보낸 요원이냐(X)

       

       꺄아! 운명인가 봐!(O)

       

       이 와중에도 돌아가는 천 년 묵은 처녀 무빙이 참 한결같단 말이지.

       

       아무튼 이런 질문을 받았으면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무언가를 보여주긴 해야 한다.

       

       물푸레나무 왕관은 이번에 얻은 거라 설득력이 부족하려나. 그럼 결국 남은 건 하나뿐이네.

       

       여기서 이브에게 가장 먼저 보여줄 줄은 몰랐는데.

       

       팔찌의 아공간에서 손을 집어넣었다.

       

       우웅-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허공에 퍼지는 파문. 그 안으로 손목까지 집어넣었다가 뺐다.

       

       말랑쫀득무저항따끈미니사랑의여신조각상을 쥔 채로 말이다.

       

       화아악-!

       

       꺼내 든 것만으로도 이브가 지배하던 공간이 단숨에 개변된다.

       

       세계수의 힘을 비집고 몰아내는 사랑의 신의 신성력.

       

       분명 무드등마냥 은은한 신성력을 내뿜던 녀석이 다른 신의 힘을 만나자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나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며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아니지? 설마 진짜 그런 이유로 성물에 힘을 좀 더 내려보내는 거 아니지?

       

       속으로 삐질삐질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숨기며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조금 높으신 분에게 사랑받는 체질이라서 말이죠. 계시…같은 건 아니지만 그냥 이것저것 알게 되더라구요.”

       

       “세계수시여….”

       

       세계수의 권능을 이어받은 이가 다른 신의 사도라니…인정할 수 없다(X)

       

       이러면 100년 착정의 대계는 나가리인가…(O)

       

       ???

       

       그게 무슨 소리니 이브이브야….

       

       100년 착정의 대계는 또 무슨 흉흉한 소리야. 그보다 저 짧은 말에 저런 뜻이 담겨있다고?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데…번역기 이거 사실 고장난 거 맞고 조금 전에는 우연히 맞아떨어진 거 아냐?

       

       속으로 현실을 부정하던 것도 잠시. 이브가 부릅뜬 눈을 다시 감으며 평소의 실눈으로 돌아왔다. 은연중에 느껴지던 위압감 또한 사라졌고.

       

       “후우…이해했습니다. 사랑의 여신께서도 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겠죠. 저희 엘프가 여전히 영면에 들어가신 세계수님을 잊지 못할 때도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니.”

       

       사랑의 여신의 총애만 아니었어도…아쉽게 됐다(X)

       

       아무리 천년 만에 세계수님의 권능을 이어받았다지만 인간이라 불안했는데…성자면 다들 납득하겠지(O)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김칫국만 사발 채 들이키는 이브. 보고 있으면 재밌긴 한데 계속 이렇게 보고만 있다가는 진짜 큰일 날 것 같단 말이지.

       

       지난 천 년간 처녀로 살아오느라 남미새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브의 반응은 좀 과하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1. 이브가 작은 남자아이에게 흥분하는 위험한 변태다.

       

       2. 세계수의 권능에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아닌 거 맞지…?

       

       슬그머니 차오르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아까 하던 말을 이어해 주시겠나요? 엘프에게 세계수의 권능이 뜻하는 의미 말이에요.”

       

       “이런. 제가 너무 놀라 말이 옆으로 새고 말았네요. 다시 한번 멸신전쟁 직후의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어지는 이브 말은 흥미롭다면 흥미롭고 애처롭다면 애처로운 것이었다.

       

       세계수는 죽었지만,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미궁의 1층. 그리고 다른 층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다른 죽은 신의 흔적과 권능의 파편.

       

       아직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엘프들은 거기서 떠올렸다. 만약 세계수의 권능을 얻은 이가 나온다면?

       

       그리하여 권능을 타고난 이브와 함께 신을 잃은 엘프 왕국…엘븐 포레스트를 통치한다면?

       

       조금이라도 세계수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 하는 당시의 엘프들에게는 절박한 지상과제였다.

       

       물론, 무슨 수를 써도 1층의 계층 수호자를 불러내지 못해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이제와서 그게 중요한가요?”

       

       내 질문에 이브가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옛날만큼 모든 엘프가 열광할 일은 아니죠. 저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예?”

       

       “저와 같이 엘븐 포레스트를 다스린다는 것은 쉽게 말해 저와 결혼해 왕과 여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겠죠?”

       

       “즉, 제가 아무리 여자라도 함부로 다른 남자와 몸을 섞으면 안 된다는 거죠.”

       

       “아앗….”

       

       내 설정 속 이브는 히로인이 아니다. 히로인인 줄 알았는데 모종의 이유로 흑화해 주인공 손에 죽는 중간 보스지.

       

       다만 그럼에도 일단 처녀라는 설정만큼은 넣고 봤다. 왜냐면 그게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단순히 재밌을 것 같다는 이유 하나로 정한 설정에 이런 과거사가 붙을 줄이야.

       

       연민을 담아 어깨를 토닥여 주자, 길쭉한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이브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여,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다시 철회하면 될 일이니까요. …허나, 당시의 저는 어리고 혈기가 넘쳤습니다.”

        

       “네? 저 조금 불안해지려고 하는데요.”

       

       “감이 좋으시군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저는 세계수께 제 이름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당신의 권능을 지닌 이가 아닌 남자와는 깊은 사이가 되지 않겠노라고 말이죠.”

       

       “세상에.”

       

       세계수는 죽었으나, 그 힘과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분히 충동적인 맹세였으나, 어찌 됐고 이브는 세계수가 직접 열매를 맺어 탄생시킨 내츄럴 본 여왕이다.

       

       만약 신 앞에서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어긴다면 그녀의 권능이 역으로 그녀를 공격하겠지.

       

       그리고 이브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타고났다면 신력이 폭주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하다.

       

       “죽거나 평생 처녀로 살거나. 그게 제게 주어진 운명. 어리석음의 대가였습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요나 씨. 당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이브가 한껏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반보 뒤로 물러섰다.

       

       “요나 씨. 저는 당신이 아니면 결혼할 수 없는 몸이랍니다. 어쩌면 당신을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려 왔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게 무슨….”

       

       “본래는 좀 더 시간을 들여 친해지고, 제대로 사정을 설명하고 해야 할 말이지만…이렇게 된 거 용기를 좀 더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중 하나를 빼내 양손으로 담아 바쳤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내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다오(X)

       

       마! 함 대주라!(O)

       

       꼭 이럴 때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어지러운 번역기 내용을 한차례 곱씹고는 빵긋 웃었다.

       

       “싫은데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애를 글로 배운 여왕님(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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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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