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
눈부신 광휘가 언데드들을 강타했다.
하늘에 떠 있는 벤시와 스펙터를 대상으로 한 신성 마법이었다.
대낮임에도 하늘을 밝힐 정도의 광휘.
그 신성력의 주인은 당대의 교황이었다.
“길을 뚫는 것이 급선무다. 할 수 있겠느냐?”
콰직.
스켈레톤의 머리를 부숴놓은 알루어드가 소리쳤다.
“성하의 명을 받듭니다!”
검신을 타고 눈 부신 빛이 흘러내렸다.
오러 블레이드와는 달리 고고한 자태를 내뿜는 힘.
누군가를 헤친다고 보기는 어려운 형상이었다.
하지만 언데드에게는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없었다.
스거억 –
알루어드의 검이 스켈레톤의 허리를 갈라놓았다.
대항할 틈 따위는 주지 않는 빠르고 예리한 검술이었다.
“성기사들은 나를 따르시오! 신관들은 후열의 지원을 부탁하오!”
또 다시 언데드로 들어차기 시작하는 하늘.
사제들의 신성마법 밑으로 성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산을 주파했다.
“일리아를 위하…”
힘차게 소리를 지르려던 알루어드가 입을 다물고 호흡을 골랐다.
예전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외쳤을 함성.
하지만 새삼스레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간 크리스를 따라다니며 느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을 위한다기보다는 신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은 신을 위한 길이 아닌 발자취였다.
알루어드가 재차 소리를 질렀다.
“일리아의 뜻을 따르라!”
쿠웅 –
성기사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아앙 –
주변에서 터지는 마법들.
충격파를 견뎌 낸 그들이 달려간 것은 불길 속이었다.
그곳에 있는 언데드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뚫어라!”
앞서나가는 알루어드의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길이 갑옷을 파고들며 화상을 남긴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시오! 알루어드경!”
뒤를 바짝 따라오던 성기사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알루어드에게 닿았다.
타들어 가던 피부가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서걱 –
콰직!
검이 언데드를 가르고 방패가 그것들을 부숴 놓았다.
콰아앙 –
옆에서 마법이 폭발하며 성기사들이 불길에 휩싸였지만 누구 하나 멈춰 서는 이가 없었다.
그들의 힘이 다하지 않는 한 신성력이 그들을 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걸음에 견뎌야 할 것은 고통 밖에 없었다.
신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는 고통마저도 배움이었다.
“고통만 견디면 나아갈 수 있었구나…!”
“신성력을 끌어올려라!”
순간, 알루어드의 눈이 날카롭게 한 곳을 주시했다.
실로 음흉한 족속들이었다.
전투 중에도 몸을 감추고 흉계를 꾸미다니.
휘익 –
그곳을 향해 알루어드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꽈앙 –
화르륵!
불길에 일그러지던 몸이 빛을 맞이하며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살이 익는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일리아의 길을 따르는 것은 원래부터 고행의 길이라 불렸으니까.
“모습을 드러내라!”
나무 위에 숨어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네크로맨서가 경악을 토해냈다.
“이런 괴물 같은 놈들을 보았나…!”
세상의 어느 인간이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인가.
저들을 태워 죽이자고 설치한 마법이지, 저런 식으로 뚫고 오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불 속을 걸어오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무식한 놈들! 네놈들이 왜 광신도라고 불렸는지 알겠구나!”
신의 이름이 걸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했던가.
알루어드를 향해 마법을 쏘아 보내려던 네크로맨서의 손이 멈춰섰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는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투욱.
콰직 –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발에 밟히며 부서졌다.
“같은 피일진대 어찌 이리 더러운 것인가. 그 친구가 흘린 피는 고결했거늘.”
발의 주인은 파라몬이었다.
서거억 –
스걱 –
투둑 –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검.
파라몬의 신형이 한번 사라질 때마다 네크로맨서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익…!”
홀로 남은 네크로맨서가 파이어볼을 시전했으나, 그대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파라몬의 뒤에서 나타난 노인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불 계열의 마법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네.”
화르륵 –
“허어억…!”
네크로맨서의 몸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쌓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죽어없어질 때까지 그 불길은 꺼지지 않으리라.
“라몬, 데스나이트 두기가 더 내려오는 중이네. 그곳의 기사들이 이미 세기를 상대하고 있네!”
클로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라몬의 신형이 땅을 가로질렀다.
데스나이트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기사들은 그가 데려온 이들이었다.
먼 옛날, 함께 싸웠던 동료의 후손들.
그들의 상태를 느낀 파라몬이 힘을 주며 땅을 박찼다.
***
채앵 –
기사들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화상자국 밑으로 새겨진 흉터들.
다 치료하지 못하여 곪아 있는 상처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입은 상처가 아니라 성에서 입은 부상이었다.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면 상태는 훨씬 심각했으리라.
그그극 –
세네 명이 합을 이뤄 데스나이트를 상대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베어도 찔러도, 아무리 상처를 내어도 데스나이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을 할때마다 피해를 보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채앵 –
검을 막아낸 기사의 눈에 결연함이 들어 찼다.
데스나이트의 목에 빈틈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쉬익 –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은 허무하게 틀어막혔다.
데스나이트의 팔이 검을 후려친 것이다.
카앙 –
두 동강이 나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검신.
순간, 기사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부러진 검이라…’
공교로운 일이었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호칭이 최후의 순간에 보는 마지막 광경일 줄이야.
푸욱 –
데스나이트의 검이 기사의 배를 뚫고 등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흐읍!”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배에 박힌 검을 두 손으로 끌어 잡았다.
“네놈은 데리고 가야겠구나!”
“빌젠!!”
콰직!
동료들의 검이 순식간에 데스나이트를 난도질 했다.
“얼른 다른 사람들을 도와!”
빌젠이라 불린 기사가 배를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상황은 암담했다.
어느새 데스나이트 두기가 더 나타나 있었다.
“더 없이 훌륭하군.”
빌젠의 고개가 뒤를 향해 돌아갔다.
“….파라몬님!”
“빌젠, 그대는 그대의 조부를 꼭 빼닮았네. 얼굴도 지금의 행동마저도 말일세.”
빌젠의 손에서 부러진 검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곳에 새로 쥐어진 것은 파라몬이 휘두르던 검이었다.
“그대들을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아는가?”
저벅.
빌젠의 눈앞에서 파라몬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대의 조부는…”
저벅.
“우리는! 부러진 검으로도 적을 꿰뚫었다네.”
파라몬이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도 솟아나지 않은 검.
반절도 남지 않은 짧은 검신.
휘익 –
마주 오는 공격 속으로 파고들어 간 파라몬이 데스나이트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콰직 –
“….!”
기사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파라몬이 보여 준 동작이 그가 하려고 했던 동작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데스나이트의 목이 떨어져 나가며 작지만 슬픈 목소리가 울렸다.
“셀 수도 없다네. 이 검술이 적들의 목을 끊어놓은 것은.”
“…기억하겠습니다.”
빌젠의 눈앞이 흐려졌다.
부상이 심했던 것일까, 그새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일까.
지금이 최후의 순간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빌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신 역시도 적의 목을 끊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착각하지 말게. 자네는 죽지 않네.”
“….?”
“빨리 죽을 팔자는 아니라더군. 명이 길다고 했던가?”
파라몬이 다른 데스나이트에게 뛰어들며, 뒤에서 누군가 빌젠을 바쳐들었다.
“그대는..?”
“노르딘 백작령의 병사입니다.”
병사가 품을 뒤지며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포션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낱 병사가 귀한 포션을 들고 다니다니.
병사가 포션을 빌젠의 상처에 부으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님께서 제가 오늘 누군가의 귀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허.”
“어디선가 구해 온 포션을 꼭 쥐여주셨지요.”
성녀를 업고 다니는 이상한 사람.
믿기지 않는 일들을 행하는 걸 봤음에도 한구석에 의심이 자리했다.
전쟁통에서 어떻게 사람을 살린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치이익 –
배에서 따가운 통증이 퍼져나가며 빌젠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럴 틈이 없네. 얼른 전투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빌젠과 병사의 몸이 투명한 막에 덮였다.
콰아앙 –
한차례의 마법이 지나가고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금발의 노인이었다.
“곧 이곳으로 불길이 번질 것이야. 빨리 움직이지 않고 무엇하는가?”
이미 주위에서 시커먼 연기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들이 올 것이네. 그때까지만 버티시게.”
클로셀의 시선이 지나온 뒤쪽을 향해 돌아갔다.
“뒤쪽에도 언데드들이 있군. 곧 포위되겠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