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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

       불쑥 들어오는 프란체의 말에 순간 눈이 동그래지며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저도 그럴 수 있으면 그러고 싶네요.”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나도 되도록 프란체와 같이 있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럴 순 없을 거다. 증상은 나날이 심해져 가고 진의 기억도, 인격도 점점 돌아오고 있다.

         

       “같이 있는 거면 같이 있는 거지, 그럴 수 있으면 그러고 싶다는 건 뭐야?”

         

       프란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피식 웃어주며 정면을 바라봤다.

         

       “그런 게 있어요.”

       “…이상한 말을 하네.”

         

       다행히 프란체는 이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전과는 달리 내 의사를 확실히 전달해서 그런 거겠지.

         

       “그래서, 이제 남은 건 뭐니?”

       “음. 기다리는 것뿐이네요.”

       “그게 다야?”

       “예. 이 분야에선 저희가 할 게 없으니까요.”

         

       건축과 채굴은 우리가 도운다고 해서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부분이니까.

         

       “음. 그러면 그 황태자의 결혼식까지 할 게 없는 거네?”

         

       황태자의 결혼식? 아, 그러고 보니 소미레와 결혼하기로 했지.

         

       “저희도 참여하는 겁니까?”

       “그래야지. 데카르트 공작가니까.”

         

       그럼 그때 또 소미레를 확인해 볼 수 있겠군. 그 라면 사리 황태자는 보고 싶지 않지만.

         

       “일단 타자.”

       “예.”

         

       술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공작저로.”

        “예이.”

         

       바퀴가 굴러가자마자 갑자기 프란체가 짝! 손뼉을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매장을 제국 각지에 퍼트려야 하는 거 아니야?”

         

       벌써 돈 냄새를 맡았군.

         

       “맞아요. 프리다의 인력들이 들어왔으니 충분하겠죠.”

         

       이미 프리다는 제국 각지에 퍼져있었다. 그쪽의 인력을 전부 프란체 코퍼레이션에서 흡수했으니 일이 절반으로 줄었지.

         

       “도게자 백작가도 바빠지겠구나. 우리 건물 외형이랑 내부 구조를 따라 하려면 고생일 텐데.”

         

       그렇긴 해. 여태껏 제국에서는 보지 못한 특이한 구조니까. 하지만 그들은 전문가다.

         

       “한 번 해봤으니 금방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는 아예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참고할 자료가 있으니까요.”

         

       그냥 공작령 13번 구역에 있는 프란체 의류점의 구조만 갖다 붙이면 되는 거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렇구나. 아무튼. 매장을 더 늘리려면 공작님께 말씀드려서 지원을 더 받아야겠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벌써 자금이 떨어졌습니까?”

         

       프란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석 채굴에 들어가는 인력과 탑 건설. 그리고 부지 매입에 돈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하긴, 사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기본 자금이 있었다곤 하지만, 돈이 쌓이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지금 자금 상태라면 내가 그 사람을 죽도록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공작님의 지원은 필수야.”

         

       프란체는 쯧, 혀를 차며 마차의 창밖을 바라봤다.

         

       “이건 공작님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야. 단순히 내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거지.”

         

       아무래도 데카르트 공작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맞습니다. 아무리 원수 같은 존재라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죠. 저는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사업과 영업. 그리고 정치라는 게 그런 거다. 특정한 사람이 싫고, 미워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면 비위를 맞춰주고 이용하는 법.

         

       “그래, 역시 나를 이해해주는 건 너밖에 없어.”

         

       나를 보며 싱긋 웃는 프란체. 이쯤에서 슬슬 얘기를 꺼내야겠지.

         

       “지금은 저 말고도 공녀님의 편은 많습니다. 카자르도 있고, 이번에 데려온 케일도 있고, 프란체 코퍼레이션의 모두가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프란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니? 그 사람들이 나를 언제 배신할 줄 알고?”

         

       목소리의 세기가 강해진다.

         

       “나는 명백한 내 소유가 된 너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아. 가족도 믿지 않는 와중에 타인을 믿으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프란체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불신 그 자체. 그동안 자신이 당해온 일들을 여전히 잊지 못한 듯하다.

         

       ‘…그런 일들을 어찌 쉽게 잊겠어.’

         

       시간이 약이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준다곤 하지만, 그녀가 고통받은 세월은 12년이다.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은 그 긴 세월을 치유해주기엔 너무나도 짧았다.

         

       “…그렇군요.”

         

       나는 씁쓸하게 웃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도 이제 공녀님께서 좀 더 타인을 믿어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사업도 커지고, 영향력도 강해지는 마당에 저만 공녀님의 곁에 있을 순 없잖습니까.”

         

       내 희망 사항과 필수적인 일을 섞어서 말했다. 이러면 쉽게 반발하진 못하겠지.

         

       “…네 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야. 사업을 하는 마당에 다른 이들을 신뢰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지.”

         

       프란체는 “하지만.”이라 말하며 말을 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일에 관해서야. 내 감정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음. 그건 좀 곤란한데…….

         

       “예를 들어, 내게 마법을 알려주고, 이런저런 지식을 알려준 카자르도 포함이야. 아무리 내 스승과도 같은 존재라도 내 마음속으로는 들어올 수 없어.”

         

       계속해서 이어지는 프란체의 말에 점점 표정관리가 힘들어진다. 카자르도 안 됐던 거냐…?

         

       “카자르도 신뢰하지 않는 건 몰랐습니다만.”

       “걔는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고용된 입장이야.”

         

       척. 프란체는 검지를 치켜세웠다.

         

       “고용으로 인해 내가 제공해주는 환경이 사라지면 내 곁에 남아있을 거 같니?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분명 새로운 거처를 찾아 움직이겠지.”

         

       카자르가 마법적으로 욕심이 많다고 해도 프란체를 내버려 둘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카자르에게 프란체를 부탁하려고 하는 거고.

         

       나는 슬쩍 웃으며 조심스레 내 의견을 꺼내봤다.

         

       “그래도 그동안 같이 지내오고, 나눴던 대화도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남들을 믿어보시는 게…….”

         

       쾅! 프란체가 별안간 의자 시트를 내려찍었다.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내게 그런 시답잖은 인연을 강요하지 마! 나는 너 말고 아무도 믿지 않아. 나는 너만 있으면 되고, 너도 나만 바라보면 되는 거야.”

         

       에메랄드빛 녹음의 눈동자가 일렁인다. 그녀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점점 커지며 마차가 어두워지고, 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이었습니다.”

         

       신뢰과 인연이라는 말은 아직 프란체에겐 너무 이른 것 같다.

         

       ‘인연은 시간과 반복으로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12년의 세월을 쉽게 치료할 순 없을 거다.

         

       ‘내가 좀 오만했군.’

         

       그간 프란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남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상처가 점점 치료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겉 부분에 불과했다. 내부에 생겨난 상처는 훨씬 크겠지.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고개를 들으렴. 나도 갑자기 화내서 미안하단다.”

         

       프란체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내 턱을 들었다.

         

       “너도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겠지.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같이 일을 진행해야 하니까.”

         

       다행히 내 의도는 읽어준 듯하다.

         

       “그래도, 사적인 부분은 너 말고는 아무도 허용하지 않을 거란다. 이 부분은 양보해주렴.”

         

       감정이 솟구친 그녀에게 나는 조심히 물었다.

         

       “친구라는 존재도 만들지 않으실 겁니까…?”

       “그래.”

       “언젠가 외로워질지도 모릅니다.”

       “네가 있으니까.”

       “…….”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사라지면 정말 혼자가 되는 거 아닌가.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네.’

         

       떠나기 전에 내 대체자가 될 사람들이 생겼다.

         

       프란체가 데려온 엘반 자작은 사업에 관한 일을 맡아줄 거고, 케일은 프란체의 곁을 지켜줄 거다.

         

       카자르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로 프란체의 친구로서 남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 작은 소망이었던 건가.’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떠나면 프란체는 정말 혼자가 되어버릴 거다.

         

       “표정이 왜 그러니?”

         

       문득 프란체가 물었다. 양쪽 입꼬리와 눈썹을 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그러니? 너는 가끔 그럴 때가 있더라.”

       “…예. 걱정이 많은 타입인지라.”

         

       프란체는 싱긋 웃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반대 방향의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에 빛이 반사되어 프란체가 보였다. 이젠 그녀를 제대로 보려면 이렇게밖에 볼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입술이 머금어졌다.

         

       내가 프란체와 헤어지지 않는 유일한 수는 카자르가 해결 방법을 찾아주는 것뿐인데.

         

       “…….”

         

       망할 동기화.

         

         

       * * *

         

         

       공작저로 돌아오고, 프란체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읽고 싶은 마법서가 더 있으니 오랜만에 쉬고 있으렴. 필요한 게 있으면 집사를 통해 부를 테니까.”

         

       나는 “예, 알겠습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프란체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창고만도 못한 숙소로 돌아왔다.

         

       문틀에는 여전히 내가 흘렸던 핏자국이 가득하다. 수은을 덧댄 거울에는 피로 만들어진 손바닥 자국이 있었고, 사용하던 침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는 잘 안 지워지는데…….”

         

       쯥.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이불 위에 누웠다.

         

       “이렇게 여유를 가져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젠 정말 프란체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진의 기억이 점점 돌아와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김공략이라는 사람의 기억은 점차 잊혀만 간다.

       

       “하아.”

         

       딱딱한 침구에서 일어나 핏자국이 가득한 수은 거울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거울을 매만졌다. 그곳에는 내가 아닌 내가 있었다.

         

       “개자식…….”

         

       쩌적. 힘을 주자 거울에 금이 가며 거미줄처럼 변했다.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비치는 얼굴. 마치 지금의 내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첫 클리어 때 시네마틱 영상에서 진이 말했지.’

         

       「찾았다.」

         

       그 찾았다, 라는 말은 뭘 의미하는 거였을까.

         

       자신을 대신할 사람? 아니면 자신이 들어갈 사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면 후자가 맞아.’

         

       빠득. 이가 갈렸다.

         

       “적당히 이기적이어야지.”

         

       이렇게까지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

         

       진의 기억이 돌아와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춰진다 해도, 그 기억을 자세히 보려고 하면 노이즈가 낀 것처럼 확인할 수 없다.

         

       명백하게 나를 거부하고 있다.

         

       ‘아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걸지도 몰라. 근데 이 이상으로 알아보기엔 너무 위험해.’

         

       저번 동기화 이후로 진의 인격이 강해지고, 기억이 스며들어 상당히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동기화가 이뤄지면 나는 진짜 진 바렌베르크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

         

       “하아…….”

         

       쾅! 쨍그랑! 답답함에 주먹을 내지르자 조각났던 거울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유리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이곳저곳으로 튀었고, 가루들이 번졌다.

         

       “허, 주먹은 또 멀쩡하네.”

         

       초월자라서 그런지 고작 유리로는 상처도 나지 않는다.

         

       “후…….”

         

       이젠 기억나지 않는 나의 원래 얼굴. 가족. 생활.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김공략이라는 인물의 신상 조금과 ‘로판소’의 지식뿐.

         

       “네가 나를 잡아먹으려는 건지, 아니면 이 세계에 적응시키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바닥에서 깨져버린 거울에는 파편으로 나뉜 진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절대 나를 잊지 않을 거다, 개자식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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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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