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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0

    <780 – 용사답게(26)>

     

    이제는 내 차례구나.

    332회차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선황도, 동료들도 모두 남지 않았다.

    대괴수 체력올인이 침묵하고 있을지라도 그 봉인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패색은 뚜렷했다.

     

    “당신을 해치우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귀찮은 일임은 명백하지요. 피차 손해만 보는 싸움 대신 새로운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새로운 길…?”

    “재단이 확보한 차원 중 하나에 우리 세계의 <에어오딜론>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떠나십시오.”

    “!!”

    “당신만이 아닙니다. 함께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태워도 좋습니다. 이 제가 승리의 과실을 양보하면서까지 기회를 베푸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당신이라면 알 수 있겠죠.”

     

    우주로 떠나라.

    네가 데려가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그것은 막지 않겠다.

    이사장이 제시한 것은 휴전협정이었다.

    332회차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은 이 남자를 이길 수 없음을.

    긴 싸움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확정적인 패배뿐임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 대한 후회. 당신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약점을 배려한 상냥한 제안이지 않습니까? 저의 적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그 깊은 후회를 벗어나고, 병든 영혼이 구원받으며, 오랜 고독의 끝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패배를 면하는 것도 모자라 오랜 후회를 면할 기회를 얻는다.

     

    “그건… 정말로 고마운 제안이군.”

     

    홀로 우주를 떠돌며 몇 번이고 생각했다.

    자신이 버린 모든 생명을.

    손수 닫아버린 가능성을.

    그런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

    최애의 캐릭터들을,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비공정에 태우고 함께 떠난다.

    내가 고르는 이들만큼은 죽지 않는다.

    함께 살아남아 무수한 억까이벤트를 피해 진정으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미로는 그가 바라던 엔딩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거절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말이다.”

     

    움켜쥔 주먹.

    흐르는 핏물.

    이사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참으로 끈질깁니다. 대체 당신들은 뭐가 문제입니까?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불가능합니까?”

     

    참지 않고 휘두르는 이사장의 지배영역이 332회차가 여는 차원문을 우그러뜨리고 짓뭉개 파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332회차를 둘러싼 차원문의 영역은 점차 좁아지고 줄어들었다.

    주변의 공간을 쥐 잡듯이 철저하게 축소해 나가는 이사장의 공세 앞에서 332회차는 매 순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까워졌다.

    그가 행하는 모든 저항이 패배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패배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주는 말이다, 지겨울 정도로 크다.”

    “…?”

    “죽도록 고독한 것도 싫지만, 그 지옥을 다른 모두가 느끼는 것도 싫어.”

    “당신과 달리 그들은 혼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주가 고독한 이유는 혼자여서가 전부가 아니다. 한 번 세계를 등지고 떠났던 제 비겁함이 광활한 우주만큼이나 황량한 마음을 좀먹기 때문이지.”

     

    332회차는 자신의 비겁함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런 여정을 두 번째로 반복한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 처절한 괴로움을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함께 겪도록 둔다?

    그 또한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모든 비극을 무릅쓰고 모두가 행복해질 미래를 만든다.

    그 하나의 일념으로 반복한 지옥이다.

    무수한 패배와 실패다.

    그 패배와 실패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몫.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지옥이다.

    그러니 허락하지 않는다.

    우주를 떠도는 비공정을 탑승한 자라는 타이틀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것이 플레이어로서의, 나의 다짐이다!

     

    “하면 그대로 찌그러져 죽으십시오.”

     

    어깨가 접힌다.

    무릎이 증발한다.

    그럼에도 차원문의 전개를 멈추지 않았다.

    방심할 수 없도록.

    자신의 저력을 경계하도록.

    숨이 다하는 마지막 1초까지 제 몸을 깎아서라도 차원문을 전개한다.

    그 처절한 저항에 마침내 한 사람이 움직였다.

     

    재단의 기함.

    비공정의 외갑판.

     

    푸확!

     

    이슈타르의 성검이 이사장의 본체를 향해 불시의 기습을 가했다.

     

    “하하. 그 풋내기 용사가 어느새 친구아버지의 가슴팍에 검을 꽂을 정도로 성장하다니, 참으로 대견하게도 성장했군요.”

    “당신 같은 작자에게도 누군가의 아버지를 자처할 자격이 있어?”

    “없을 건 또 뭐 있습니까?”

     

    가슴이 꿰뚫린 이사장이 손을 내밀어 성검을 쥔 이슈타르의 손을 겹쳐쥐었다.

     

    “어떻게…!”

    “믿기지 않으십니까? 용사만이 쥘 수 있는 성검을 쥐고도 멀쩡해서.”

    “말도 안 돼!”

    “세상에 선이 어찌 한 사람만의 선이 있을 것이며, 악을 어찌 인간만의 잣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성검의 제어권을 제 손아귀 안에서 강탈당할 위기에 이슈타르가 온몸을 비틀며 강하게 이사장의 손을 뿌리쳤다.

    그런 불안정한 자세로 물러서는 이슈타르의 모습에 이사장은 귀여워 죽겠다며 피식 웃고는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도 당신은 재단의 ‘장학생’이기도 하지요. 저의 장학생이 아닌 딸아이의 장학생이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저는 자식의 재산을 탐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식의 재산을 부수지 않도록 너무 열을 내지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이사장의 지배영역이 성문을 들이받는 거대한 공성추처럼 이슈타르를 들이받았다.

    성가신 장애물을 치운 이사장의 시선이 332회차에게 돌아갔을 때, 그 모든 시간벌이에도 불구하고 열세에 처한 332회차의 처지는 변치 않았다.

    시선을 담지도 않고 한 손으로 압박하고 있었음에도 이미 열세를 벗어날 여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당신에게는 실망이 큽니다.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나 싶었더니 그저 연명에 불과하다니. 끈질겼지만 결국은 여기까지였군요. 안녕히 가시길.”

    “연명이 아니다. 계속 틈을 넓혔지. 특정좌표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문 너머의 존재가 이곳으로 건너올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처음과 지금 모두 당신에게 주어진 공간은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이사장의 지배영역의 압박에 몸을 가눌 공간조차 잃어가며 사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가던 332회차, 그에게 대체 어떤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그 당연한 의문과 진지하게 직면하는 순간, 이사장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사지조차 가누기 힘든 비좁은 공간에서 만들 틈이란 결국 하나밖에 없다.

     

    “당신, 자신의 몸 안에 틈을 숨겨두었군요.”

    “크크. 제법 아팠다고.”

     

    미쳤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존재만이 벌일 수 있는 짓이다.

    과연 외계의 화신체다운 광기다.

     

    “오히려 기대마저 되는군요. 당신 정도 되는 자가 최후의 순간에 부를 존재는 또 얼마나 대단할지. 이번에도 체력올인입니까? 그도 아니면 다른 유형의 화신체 시리즈?”

    “분신들이 이렇게 고생을 했으면 본체도 뒷수습은 해야 하지 않겠나?”

     

    화신체의 본체.

    그 말에는 천하의 이사장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332회차의 펼쳐진 의복 너머로 드러난 차원문은 그 사이즈가 상당히 아담했다.

    성인남성 크기의 화신체가 기어나오기에도 부족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실제로 차원문에서 작은 팔이 튀어나왔을 때.

    그 팔의 크기를 보고 모두가 당황했다.

     

    “이 기운은…”

    “이얍!”

     

    앳된 아이의 목소리.

    그럼에도 장래가 기대되는 설렘.

    그 모든 설렘을 뒤로 미루는 흉흉한 영혼의 크기.

    틀림없다.

    이런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

     

    “하하하. 마지막에 부르는 것이 제 딸아이라니, 가족 상봉이라도 시킬 작정입니까?”

    “너는 모른다. 그녀가 무엇을 거쳐서 탄생한 존재인지.”

    “아니요. 저는 당신들의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의 뜻을 대변하는 화신체는 많으나 신의 뜻과 무관하게 혼돈에서 저 스스로가 건져낸 파편은 ‘통상적인 화신체’와는 급이 다르지요. 그녀는 인간의 몸을 얻은 신의 무의식입니다. 그리고 제 딸아이이기도 하지요.”

     

    이사장은 332회차의 마지막 수를 부질없다고 여겼고, 332회차는 마지막 수로 이사장의 패배가 확정되었다고 여겼다.

    누군가 한 사람은 전황을 단단히 잘못 읽어낸 광경을 보며 이슈타르가 울먹거렸다.

     

    “영혼이 찢기고도 우리들의, 내 위기를 감지하고 도움을 주러 찾아온 거야…?”

    “흘흘흘. 악한 자는 타인에게서 선량함을 찾아 이용하려 들고 선한 자는 타인에게서 악함을 찾아 안심하려 하지요. 당대 용사가 보기보다 악한 것도, 이사장이 보기보다 선한 것도 신기하군요.”

    “내가… 악하다고?”

    “허나 심려치 마십시오. 당신의 선악과 무관하게 그녀가 이 자리에 온 시점에서 대국은 끝이 났으니. 세상만사의 모든 일을 타인의 일이라 여기며 폭군이 되기를 자처한 선황이 제 애비의 목숨마저 타인의 일로 방관하는 양녀에게 버림받아 저리 되다니, 아주 재미난 우연의 일치겠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누군데 우릴 멋대로 평가하는 거야!”

     

    벽을 열댓 개도 더 부수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이슈타르는 자신의 옆에서 자연스럽게 해설하던 노인이 어느새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기묘한 체험에 당황한 이슈타르였지만 지금 가장 많이 당황한 사람은 작은 팔에 이어서 소형 차원문 밖으로 머리부터 빠져나오다가 철퍼덕 바닥에 엎어진 오크노디였다.

     

    “으앙, 아파!”

    “저런. 몸을 좀 잘 가누지 그랬습니까. 이리로 오시죠. 이 파파가 호를 해드리겠습니다.”

    “응? 이 목소리는…”

    “이사장이다.”

     

    오크노디의 고개가 자신을 부르는 이사장이 아닌 제 뒤에서 복부에 차원문이 열려 죽어가는 332회차 체력올인에게 꽂혔다.

     

    “헉, 체력올인?! 어쩌다가 이렇게 뉴비마냥 개박살이 났어요?”

    “반대로 내가 묻고 싶군. 어쩌다가 저런 괴물을 만들어 낸 거냐…”

     

    오크노디는 체력올인의 처참한 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가 만든 거 아니에요! 이번 회차의 랜덤변인이었을 뿐이죠. 음, 이 소개가 아닌가? 실은 아직 원인규명이 되지 않았떤 억까의 원흉이라고 해야 하나?”

    “설명은 됐다. 내 시간은 이미 끝나가니까.”

    “죽어요?”

    “돌아갈 뿐이다. 모두를 잃고 홀로 고독을 곱씹을 뿐인 최후를 반복하는 나만의 기억, 나만의 고독, 나만의 지옥 속으로.”

     

    기억이란 변치 않는다.

    확정된 과거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기에.

    기억에서 비롯된 존재가 돌아갈 지옥이란, 변치 않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지옥뿐이다.

     

    “우리와 선황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해줘.”

     

    귀찮아.

    지루해.

    손해야.

    돌아오면 두려울 대답은 많았으나, 다행히도 이번 회차의 본체는 악독한 컨셉을 잡지 않았다.

     

    “재단파파는 혼쭐이 나긴 해야 했어요!”

    “믿음직스럽군. 모든 ‘시행착오’를 거친 본체의 강함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332회차의 감격에 찬 말에 갓 튀어나온 오크노디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넹? 제가 왜 싸워요?”

     

    그렇다고 마냥 선한 컨셉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모두를 위해 발 벗고 나선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봉인을 택한 선황의 뒤를 잇거나 그의 복수를 한다.

    그런 기특한 효녀행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뭐? 그럼 너 뭐 하러 온 건데.”

    “직관하라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

     

    자세히 보니 오크노디가 엎어졌던 바닥에는 배낭배낭에서 꺼내자마자 쏟은 것으로 추정되는 팝콘이 잔뜩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 자식, 비인간적인 희생플레이를 반복한 체력올인 시리즈의 ‘최종버전’ 아니랄까 봐 인성터짐이 너무할 정도로 심하군…

     

    “촌극은 끝났다. 내가 죽거든 그 뒤에는 이사장이 선황이 없는 시대를 장악하는 미래만이 남았지. 그걸 막을 건 너뿐이다.”

    “힝. 이벤트 벌써 다 끝났어요? 진작 좀 불러주시지. 너무해!”

    “크크, 크… 그래, 우리가 너무했지. 진즉에 널 불렀다면 조금 더 일찍 저 불길한 것을 없앨 수 있었을 텐데. 오랜 실패의 보답을 함께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과거의 실패를 딛고 자신들의 손으로 결실을 이루어내겠다.

    그런 다짐이, 그런 오만이 패배를 자처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더한 실패를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너무 많은 회차.

    너무 많은 실패.

    너무 많은 미래를 경험한 본체에게도 아직 인간성이라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을 감수했던 목적이 남아있기만을 바라면서.

     

    <동조마법>

    <기억전송>

     

    332회차는 이번 교전의 모든 관측정보와 기억을 오크노디에게 전송했다.

    332회차가 전송한 기억에는 히든피스를 독점하고 행성계를 제 손으로 부수며 파멸시켰던 먼 과거의 기억마저 존재했다.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오크노디의 눈에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으나,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릴 적에는 이미 332회차의 고개는 축 늘어진 이후였었다.

     

    [332회차 <체 력올인패턴파악이좋아 전사>가 사망했습니다.]

     

    패턴파악은 끝났다.

    이젠 본체의 시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크노디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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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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