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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81

    <781 – 용사답게(27)>

     

    나는 332회차의 처참한 시체를 앞두고도 방실방실 웃었다.

     

    “으휴, 332회차도 참 못됐다니깐. 기껏 떠올리기 싫어서 봉인한 기억을 억지로 들이밀다니, 심보가 너무 나쁘잖아요!”

     

    모든 실패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한 번의 생애를 살며 겪은 실수조차도 밤이 되면 이불을 펑펑 걷어차며 후회하는 생물이기에.

    그런 생을 수백 번을 겪었다면.

    잠을 이룰 수 있는 밤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잊었다.

    즐거운 일만을 쫓아다녔다.

    필요한 과정만을 거쳤다.

    매 순간에 집중하였다.

    그런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솥뚜껑이 열렸다.

    끓고 끓어 바닥까지 눌러 붙은 지독한 감정들이 벌컥 위로 솟아오른 332회차의 기억이라는 이름의 증기에 떠밀며 솥뚜껑이 밀려났다.

     

    “호오. 저도 모르는 형제자매에게 지닌 인연이 아주 각별했나 보군요. 오크노디. 마침내 인간을 저버리려는 겁니까?”

    “그렇진 않아요! 전 언제나 인간으로만 플레이하는걸요? 다리가 오십 개 달린 해파리로 환영마법을 걸고 플레이하거나 수인이 되어 꼬리나 치고 다니는 몹쓸 퍼리충 플레이에는 관심 없어요!”

    “인간에 대한 동질성이 남아있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만큼 상심이 커 보입니다. 황제를 향한 상실감입니까? 화신체들을 향한 상실감? 그도 아니면… 이 앞으로 잃어버릴 수많은 생명을 향한 상실감?”

     

    이사장의 입매에 잔인한 기대를 담은 미소가 즐겁게 피어올랐다.

    따르지 않거든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는 네 생각에 맡긴다는 의지가 아주 강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파파는요, 보면 볼수록 저랑 닮은 구석이 있기는 한 것 같아요!”

    “호오. 그렇습니까?”

    “똑똑하고 잘생겼고 사람도 잘 쓰고 히든피스도 잘 모아요!”

    “하하. 이른 사춘기가 온 것처럼 좀처럼 말을 듣지 않던 딸에게 솔직한 칭찬을 받으니 참 기쁘군요.”

    “결정적인 국면에서 판세를 잘못 읽고 배드엔딩으로 직행한다는 점까지 꼭 닮은 것 같아요!”

    “이런. 칭찬이 아니었습니까?”

     

    유감이라며 고개를 젓는 파파의 모습에는 정말로 슬픔이 묻어났다.

    내심 나만큼은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기라도 한 걸까.

     

    “파파는 누군가를 신뢰하기엔 주변에 있는 사람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어요!”

    “가정교육을 위해 말하자면 그건 오해입니다.”

    “정말요?”

    “저는 곁에 사람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제 지령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만을 두지요.”

    “아하…”

    “제게 있어서 진정 사람이라 불릴만한 존재는 오크노디 당신뿐입니다.”

     

    저토록 괴이하게 어긋난 사람이 오직 나만을 사람으로 바라보고 인정해준다.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이루어주려고 하면서도 제 뜻을 따르길 바라여 작은 심술을 부린다.

    다회차 고인물의 입장에서 너그러이 봐주지 못할 건 아니다.

     

    ‘마음을 얻고 싶은, 막혀버린 게임을 풀어줄지도 모를 새로운 히든NPC를 발견할 때면 나도 같았지!’

     

    열심히 모브를 키우고, 티토소가와 함께 놀아주고, 지젤에게 꼬박꼬박 돈벌이 수단을 알려주고, 이사벨의 도시락을 먹어주고, 손오천의 공포를 자극했던 이유가 다 무엇인가.

    이들에게 최적화된 성장의 방향성을 자극하고 새로운 공략을 개척해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파파는 그런 내 시도를 나를 향해서,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실행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조금이 많이 거슬렸다.

    더는 고인물의 입장에서도 봐주기 힘들 정도로.

     

    “그럼 선황파파처럼 저한테 잘 보였어야죠!”

    “하하. 우리 딸의 서운한 마음을 제가 헤아리지 못했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이 파파가 선황의 몫까지 사랑을 베풀어 드리지요.”

    “어떻게요?”

    “제국을 가지는 건 어떻습니까?”

    “매스각키는 어쩌고요?”

    “매스각키를 지배하기에 충분한 암흑마나를 이 파파가 공급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결국은 하나도 변하질 않네요. 목줄을 채울 수단을 만들고, 목줄을 채우고, 의존적인 관계를 만들고, 그렇게 또 보이지 않는 지령을 휘두르듯이 조종하고. 딸조차도 믿지 못하는 재단파파를 어떻게 제가 믿겠어요?”

     

    마지막 기대도 끝났다.

    재단파파에게는 일말의 여지, 갱생의 가능성마저도 사라졌다.

     

    “무리하는 건 아닙니까? 이미 셋이나 되는 화신체를 불렀습니다. 그만한 존재들을 부르는 대가가 적지도 않을 텐데요.”

    “그거 알아요? 파파가 소환하려던 근력올인의 소환 메커니즘.”

     

    재단파파가 아주 관심 많은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근력올인은 제 또 다른 가능성이자 금기를 범한 반대급부로 찾아오는 시련이에요. 떠올려서는 안 될 가능성을 침범한 대가로 편리한 힘의 너머에 뒤따르는 막중한 책임이죠.”

    “책임. 아주 좋은 말이죠. 책임감 없는 어른은 본받을 구석이 없습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그런데 그 책임, 저는 지금 안 짊어지고 있죠?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

    근력올인이건 체력올인이건 치트지식, 미래의 힘 따위를 함부로 이용하면 그 대가로 근력올인의 소환카운트가 쌓인다.

    그렇게 세 번째가 축적되면 도비가 경고했던 기억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오는 근력올인이 현세에 강림하는 개꿀잼 이벤트가 벌어진다.

    그런데 체력올인을 셋이나 소환했음에도 근력올인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판정의 기준치가 달라졌군요.”

    “맞아요. 이 세계에 허락되지 않는 ‘개연성 위반’판정을 파파가 스스로 탐구하고 노력하여 ‘개연성 범주’를 확장한 덕분이죠.”

     

    그래서였다.

    재단파파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베풀었던 이유는.

    이제 그 기회는 지나갔다.

     

    “그 올라간 허들이 어디까지를 허락할지 이 자리에서 시험하려고 해요.”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정녕 제가 모든 수를 다 썼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저질러보세요. 그게 파파의 마지막 저항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벤트 탐색을 위해 개발된 빌드는 체력올인 시리즈라면 진심공략 엔딩도전을 위해 개발된 빌드는 근력올인 시리즈다.

    근력올인 시리즈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 트리거를 단숨에 훌쩍 돌파하는 위험한 짓이겠지.

    그렇다면 체력올인과 근력올인 사이에는 어떠한 다른 존재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시행착오 속에는 수많은 도전이 있었다.

     

    민 첩올인만렙회피가좋아 도적.

    마 력올인마법난사가좋아 법사.

    지 력올인판정사기가좋아 현자.

    매 력올인보스수집이좋아 흑막.

     

    근력, 체력, 민첩, 지력, 마력, 매력.

    육대 능력치 중에서 근력과 체력 외에도 모든 능력치를 기반으로 한 빌드가 하나씩 전부 있었다.

    그 모든 가능성이 일제히 깨진 저금통 기능 너머로 쏟아져나온다.

     

    ━━━

    <옛 신의 유산>

    <삼법인의 권능 – 1식 제행무상諸行無常>

     

    <경지임대>

    <발동기능 – 예측>

    <발동기능 – 마나학>

    <발동기능 – 암기>

    <발동기능 – 꼬시기>

    ━━━

     

    수집에 동반되는 모으기.

    술식값 개변을 허락하는 덮어씌우기.

    앞서 열어버린 두 개의 저금통 너머로 사용되는 기능도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길한 미래나 부정적 이벤트를 회피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누적되는 자동의 보조기능 <예측>.

    마나를 쌓고 운용할 때마다 크고작은 상승치가 거듭 누적되는 마나연공법 보조기능 <마나학>.

    강의나 시험 등에서 이론을 완벽하게 정복하면 점차 불어나는 공부의 보조기능 <암기>.

    주조연급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호감도를 변동시키고 주요이벤트를 함께 보내면 변동하는 이벤트 보조기능 <꼬시기>.

     

    수많은 기능이 금기의 시험대에 올라섰다.

    화신체, 처형자의 소환을 허락할 정도의 거대한 금기를 범해야만 소환은 이루어진다.

     

    ━━━

    [15년 뒤의 미래를 예측하였습니다.]

    [15년 뒤의 이벤트트리거 진행도를 감지했습니다.]

    [15년 뒤의 지식을 암기합니다.]

    ━━━

     

    물론, 선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지키기가 어렵지, 넘어서기는 쉬운 일이다.

     

    ━━━

    <옛 신의 유산>

    <삼법인의 권능 – 제 2식 제법무아諸法無我>

     

    <성장임대>

    <마나학>

    ━━━

     

    현재의 신체상태를 미래의 신체상태로 앞당기고 미래의 신체상태를 현재의 신체상태로 전환하여 갚는 성장임대의 제법무아.

    앞당겨진 마나주머니가 압축률의 한계를 넘어서며 신체의 불변상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

    [배낭배낭의 성장불가의 저주가 강제로 파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시급히 배낭배낭의 장착을 해제하지 않을 시, 마도구가 파손됩니다!]

    ━━━

     

    배낭배낭을 풀어 내려놓는 여린 어깨선에 굴곡과 우아함이 더해졌다.

    배낭의 끈이 스치며 떨어져 나간 손가락은 더욱 가느다랗고 긴 섬섬옥수로 변했다.

    무거운 배낭을 풀고자 숙인 허리에는 굴곡과 탄력이 더해졌고, 허리와 골반에 얹은 손은 점차 경사면이 높아졌다.

     

    “으, 무거워.”

     

    배낭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그 짧은 시간 만에 찾아온 성장임대는 내게 주어진 수십 년 뒤의 미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었다.

    착용자의 신체에 따라 사이즈가 변화하는 의상조차도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로 가슴을 조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는 허벅지를 덮는 것도 아슬아슬했다.

    셔츠는 괜히 단추가 풀릴 것만 같아 신경 쓰이고, 치마는 바람에 불어 뒤집히면 어쩌나 신경 쓰이고, 역시 성장은 불편함이 많다.

    230cm의 키는 어디 갔는지 고작 170cm밖에 되질 않잖아.

     

    “급속…성장…?”

     

    넋 나간 파파의 시선이 한없이 우습게 느껴졌다.

    애초에 나보다 작은 걸 파파라고 부르기도 그렇지.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하하. 그 오크노디가 이렇게나 커지다니, 이건 정말 당혹스럽군요. 이런… 훌륭한 성장을 하다니.”

    “칭찬은 고맙지만, 이젠 벌 받을 차례야.”

    “고작 몸이 좀 자란 정도로 부모에게 대들려는 겁니까? 체벌은 부모의 권리입니다.”

    “그래, 체벌은 부모의 권리지. 근데 나보다 작은 쇼타가 어떻게 내 파파야? 이 정도 차이면… 후훗. 내가 파파의 마마 아니야?”

     

    미래의 성장, 힘, 경지를 왜곡하여 불러온 상태다.

    이 시간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은 느껴진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그니까 체벌은 파파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손을 펼치며 마나를 끌어모으는 순간, 전신의 감각이 말했다.

    지금의 나라면 이전까지보다 훨씬 대단한 마법을 잔뜩 구사할 수 있음을.

    그야, 지금의 나는 <다크프린세스>.

    아니, 프린세스의 자격마저도 넘어선 어둠의 종주, <마왕>의 칭호를 달성한 마왕노디이니까.

     

    “금기소환.”

     

    마왕노디의 막대한 마나주머니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수많은 진심공략의 회차들이 부름에 응답했다.

     

    <185회차 민첩올인>

    <401회차 마력올인>

    <513회차 지력올인>

    <606회차 매력올인>

     

    민첩올인.

    마력올인.

    지력올인.

    그리고 매력올인.

    각각의 깨진 저금통 기능에 대응하여 내 부름에 응해 열린 차원문의 숫자는 네 개.

    각 시리즈당 셋씩 도합 12인의 분신이 동시다발적으로 강림했다.

     

    “…!”

    “내 이럴 줄 알았어.”

     

    파파는 날 닮아서 손버릇이 나쁘니까 자식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부모마냥 내 과거의 회차를 마구 들춰보고 다닐 줄 알았다.

    그 증거로 이렇게나 많은 회차를 열었음에도 금기위배의 한도를 넘겼다고 근력올인이 소환되질 않잖아.

     

    “딸의 회차 일기장을 허락도 없이 마구 들춰보는 못된 파파에게는 지금부터 체벌을 가하겠어.”

     

    물론 난 불량마왕노디니까 체벌의 강도가 쪼끔 높을 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몇화 뒤 11살 응애노디로 돌아가는 연령미상 불량어른마왕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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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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