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786

        

         

       끓어오르는 그림자가 풍기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냄새가 없는 것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유독가스가 즐비해 있는 공간의 안, 코를 찌르고 뇌를 마비시켜버릴 것 같은 악취와 사람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강렬한 독성의 냄새가 가득 차 있는 공간 속에서 그림자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어떠한 냄새는 공백으로만 맡을 수 있는 것이라.

       냄새로 가득 찬 공간 안에서의 공백, 냄새가 없는 것이 바로 그림자의 냄새라.

         

       그 냄새를 맡으며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주술사는 솥을 젓는다.

       아무것도 없는 손으로, 그저 어둠 속에 막대기 하나가 파묻혀서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듯 허공을 쥔 채 그렇게 솥을 휘젓는다. 그렇게 해야만 솥 안에 있는 그림자가 더 쉽게 끓어오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풍요는 역설적으로 사람의 인지를 무디게 만든다…. 과도하게 넘쳐나는 정보는 오히려 선택을 제한하고, 오히려 부족함 속에서야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심연을 바라보고 나서야 빛이 있음을 깨닫고, 허무 속에서야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것은 주술사의 뜻인가, 그가 뒤집어쓴 사람 가죽이 멋대로 그러한 것인가?

       주술사가 웃음을 지은 것과 사람 가죽이 멋대로 움직여 웃음을 지은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에 진실로 차이가 있는가?

       누군가에 대한 평가가 타자(他者)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러하다면 그의 얼굴에 떠 있는 미소의 주체가 주술사 본인이든 얼굴 가죽이 찌그러져 생긴 것이든 과연 그것이 크게 차이가 존재하는가?

       그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차이가 없다면 웃음을 만든 주체가 진실로 어떠한지는 과연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이들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닐 수가 있다면 과연 그것에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과연 진실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변화하는 것의 본질. 본질 속의 변화. 변화 속의 본질. 본질의 변화….”

         

       변화하는 것에서 본질을 찾을 수 있는가?

       그 본질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는가?

       불변하는 본질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만 그러하지 않다면.

       불변하는 본질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그런데도 본질을 찾고 싶다면.

       그렇다면 변화하는 본질은 과연 ‘본질’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끊임없이 변화해간다는 것은 언젠가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는 것과도 같은 것.

       테세우스의 배가 그러하듯, 바뀌고 바뀌고 바뀌기를 반복하며 결국에는 처음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버린,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버린 것에 과연 본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붙일 수 있다면, 붙이지 못한다면.

         

       본질은.

       무엇인가?

         

       “변화하고, 본질에 맞닿아 있고, 본질에 구속되고, 본질에 매여서. 그런데도 그 변화를 함께하면서 결국에는 허상처럼….”

         

       그림자란 그런 것이다.

       무언가에 매여 있고, 원본을 따라 하고 원본을 흉내 내며 형상을 드러내지만.

       정작 그 원본조차도 변화하고 있는-

         

       아.

       슬프고 슬프다.

       원본이 되고파 원본을 따라 하건만, 원본을 흉내 내기 위해 애를 쓰고 기를 쓰고 있건만.

       그런데도 그 원본조차도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니.

       불변의 진리를 비추는 그림자일지라도 그 원본과는 거리가 있을진대, 변화하는 것을 따라 하는 그림자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 허망함이란 과연 허상과도 같은 것이라서, 그저 의미 없이 흩어져버릴 꿈과 같은 것이라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라서.

       그래서 꿈처럼.

       꿈처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 아아…. 허무하고 또 허무하다. 다만 종속된 것에도 의미가 있으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은 의미가 없는가?

       변화하는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변화라는 것은 주위의 환경에 발맞춰가는 것.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겨서 이동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불변의 진리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 모두를 초월하여 존재하여 불변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혹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닌가?

       얼핏 보기에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실상은 원본에 매여 있는, 빛에 의해서 이리저리 어지러이 모습을 바꾸어가며 사람의 눈을 희롱하고, 결국에는 허상임을 드러내는 그러한 아무것도 아닌 형상일 수도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불변이라는 것이 허상이라면 그 허상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뿌리는 과연 불변하는가?

         

       그 누구도 관측할 수 없고 짐작만 할 수 있으며.

       사람마다 떠올리고 바라는 형태의 ‘불변의 진리’가 다르다면.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그림자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각도에 따라서, 빛의 형태에 따라서, 공간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보고 해석하는 모습이 다른 그림자와 과연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렇기에 주술사는.

       그림자를 연구하는 주술사는 변화와 본질에 대하여 깊게 탐구하였다.

       그림자의 허상과 같음에 매료되었고,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그 형태에 기꺼워하며 그 속에서 바뀌지 않는 것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바뀜이 오히려 본질임을 깨닫기도 하였고, 그 깨달음이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임을 다시 깨닫기도 하였다.

         

       변화란 그러한 것이다.

       허상이란 그러한 것이다.

         

       의미가 있다가도 없는 것.

       비었다가 채워지는 것이 반복되며, 그 의미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행동에 거리낌이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의 뜻이 거기에 있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허상과 그 원본이 바뀐다 한들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겠는가?

       그림자와 제 몸이 바뀐다고 한들 타자(他者)가 보기에 본래의 모습과 완벽히 같다면 그것이 무슨 차이가 존재하겠는가?

       차이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 본질조차 변화하는 것이라면.

       그렇기에 그 변화가 의미가 있고, 동시에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허상과 진실한 것의 차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 * *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수많은 위기가 존재했다.

       대국(大國)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처럼 중국은 모든 것이 커다랬으며, 위기 역시 커다랬다.

       엄청난 기근이 찾아와 수없이 많은 인민이 굶어 죽었던 적도 있었고, 사상검증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이들이 끌려가서 고초를 겪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종교를 믿었다가 끌려가서 소식이 끊기기도 했고, 공산당에 불만을 품은 불손한 작자가 테러를 벌이거나 암살을 하려는 등의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양심 없는 기업이 오염물질을 투하했다가 한 지역이 오염된 적도 있고, 생태계가 망가지는 일도 있었으며, 희토류를 채집한다고 토양이 오염되고 있기도 하다. 어느 때에는 ‘비밀스러운 어떠한 실험’ 때문에 지역 하나가 방사능에 오염되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되기도 하였지.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의 위기는, 그러한 수많은 거대한 위기 중에서도 위에서 손에 꼽을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CCTV가 이렇게 많은데! 위성까지 동원하는데! 왜 오염운반자를 잡지 못하고 있는 건데!”

         

       중국의 언론사에서는 ‘테러리스트가 무사히 잡혔다.’라고 말하면서 공안의 유능함을 칭송하는 기사를 잔뜩 올리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 반대.

         

       5개 도시의 수원지를 오염시키는 엄청난 테러를 저지른 오염운반자의 흔적조차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

       흔적조차도 말이다!

         

       중국 역사상 테러리스트 한 명에게 이렇게 끌려다니다니,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심지어 지금은 사람 죽이고도 다른 성으로 도망가서 지내면 끝이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중국 곳곳에는 CCTV가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고, 위성이 존재한다.

       단순히 설치된 것으로 끝이 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완벽하게 활용하기 위해 중국의 천재들을 모아서 프로그램을 짜지 않았던가?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는 프로그램을 적용했고, 그 사람의 모든 정보를 전산화해서 당이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이 드넓은 대륙의 모든 사람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도록 과학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왜.

       왜!

         

       왜 고작 테러리스트 한 명을 잡지를 못하고 있는가!

         

       “인민들을 전부 감시할 수 있는데, 고작 테러리스트 한 명을 못 잡는다고?!”

         

       단순히 CCTV와 위성에만 의존해서 잡으려 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아서 오염운반자가 나타난 도시와 그 주변 도시까지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최소한 오염운반자 본인을 포착하는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흔적이라도 발견했어야만 했다.

       정말로 무능한 게 아닌 이상 흔적이라도 찾아야만 했다 이 말이다.

         

       “이래서 인민들이 편히 쉴 수 있겠어?! 수원지를 오염시키는 테러를 저지른 놈이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편히 잠들 수 있겠냐 이 말이야!”

         

       하지만 소리치고 다그친다고 없는 것이 생길 리가 있는가?

       물론 가끔은 곰을 잡은 뒤 ‘저는 토끼입니다. 제 부모님도 토끼였습니다.’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 것처럼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오는 일이 있기야 하지만, 이번처럼 명확한 범인이 존재하는 경우는 그런 마법과도 같은 일을 부리기에는 무리였다.

         

       ‘인민들은 무슨. 당 간부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다 안다.’

         

       ‘이거 수습 못 하면 출셋길 끊기는 거 다 아는데…. 인민 핑계는….’

         

       그렇기에 아래 사람들은 점점 지쳐갔다.

       위에서는 다그치고 쪼아대고, 오염운반자는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고 잠잠한데다가…아래에서는 ‘그냥 테러 저지르고 외국으로 도망간 거 아니냐’는 추측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피곤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화 보기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