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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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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착잡한 얼굴로 두 아이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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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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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막 지나간 길에 커다란 화분이 떨어졌다. 화분은 지나가던 다른 남자의 머리 위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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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허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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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이크 처리가 된 남자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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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이걸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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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을 놓친 중년 여성이 후다닥 1층에 내려와 시체를 살펴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집 안에서 양탄자를 가져와 남자를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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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흐흥..흐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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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색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그 세계에서나 볼법한 온갖 사건이 재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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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네스트 조직이 있는 곳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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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느려지던 걸음은 어느새 뚝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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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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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뒤를 돌아 난리가 난 거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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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마왕의 땅이다. 약한자는 착취당하고 강한자는 모든 것을 누리는 잔혹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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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 죄악을 저지른 자들은 모두 죄인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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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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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어디까지나 악행을 저지른 죄인들에게만 해당되어야만 한다. 아이리스나 제스처럼 노예로 잡혀있는 아이들까지 이런 가혹한 운명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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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얼마 안 되는 약자들 때문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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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 판타지 세계에서 절대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이 ‘죄책감’이다. 그것도 자신의 죄가 아닐 때 가지는 죄책감만큼 고구마를 유발하는 장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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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에 나는 이 재해를 막아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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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떠나면 데비아탄 조직이 차지한 동쪽 땅의 주민들이 몰살되어 땅이 텅 비어버릴 거야. 갑작스럽게 그 정도의 주민이 사라지면 마왕의 오른팔인 에르보안이 찾아올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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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 에르보안. 마왕군의 참모이며 사천왕 중 최강자라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사천왕과 달리 방만하지 않고 작은 사건에도 의문을 품을 줄 아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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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비아탄 조직의 구역이 며칠 만에 날아가 버렸다고 해도 지소나 라이나라면 ‘재미있는 싸움을 했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넘겼겠지만 에르보안은 의구심을 가지고 부하를 보낼 확률이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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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보안은 원작으로 따지자면 최종 보스를 만나기 직전에 마주할 수 있는 중간보스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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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삐약삐약 수준인 아이리스와 에르보안이 마주치게 되거나, 에르보안이 아이리스에게 의문을 가지게 되면 아이리스는 정식 용사가 되기도 전에 살해당할 터다. 혹은 세뇌당해 타락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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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사건을 너무 크게 만들어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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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듯한 명분이 생기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나와 똑같이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는 제스와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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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잠시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저기에서 기다 -..”
    “나..두고갈거야?”
    “흐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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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가 울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제스가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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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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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의 초롱초롱 공격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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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위험한 곳에 가는 건데 괜찮겠어?”
    “응!”
    “좋아! 쭈인님 가는데,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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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눈물을 그친 두 사람이 고개를 팔랑팔랑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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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비아탄의 본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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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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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비아탄의 본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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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흐흐..너희가 뭐라고 해도 난 절대 입을 열지 않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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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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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악! 그,그건 한정판 엘리에주 82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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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쩅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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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아악! 아,안돼! 그,그건 172년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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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가 술이 예쁘게 전시된 곳을 고양이처럼 지나다니며 값비싼 술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렸다. 꽁꽁 묶인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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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말할게! 제,제발 그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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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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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악! 327년산이이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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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 세계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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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 따위 아깝지 않다고 말하면서 본인 취미에 관련된 물건 부수면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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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흐흑..제발,제발 우리 애기들을 그만….다..말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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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를 깨물었는지 입에 피거품을 무는 남자를 보며 제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제스가 날렵한 몸짓으로 내 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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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본부는?”
    “본부는 성..벽과 가까운 ‘새벽이슬 주점’..그곳 지하에…크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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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남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쇼크로 눈이 뒤집혀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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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희생 끝에 알아낸 본부로 곧바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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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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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새끼가!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억! 이 개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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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챙그랑,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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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이슬이란 술집은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엉망인 상태였다. 아니, 다른 곳보다 더 상태가 심각했다. 반갈죽된 시체가 여기저기 보였고 마물 따위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인간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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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부라서 그런지 더 심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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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이 도래한 것 같은 술집 로비의 모습을 보다가 주방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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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다? 이게 맞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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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쁘게 생긴 여성이 레시피 북을 휘리릭 넘겨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촉수가 넘실거리는…새카만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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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잇!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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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이내 썰어둔 무언가를 와르르 쏟아 넣어 국자를 넣고 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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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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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자가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콧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아이리스와 제스에게 입가에 검지를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한 후 빠르게 주방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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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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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방 뒤쪽에 자리한 길쭉한 수납장을 옆으로 밀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근데 계단에…바나나 껍질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드문드문 핏자국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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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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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계단을 한 칸 내려가자 밀어놓았던 수납장이 저절로 닫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리스와 제스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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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주저앉아서 쭉 내려가 봐.”
    “으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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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를 계단에 앉힌 후 미끄럼틀을 내려가듯이 살살 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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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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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나나껍질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아이리스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스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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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우…미소녀에겐 착한 것까지 개그 세계랑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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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은 천장과 벽에 머리를 박고 계단에 온몸이 구르며 떨어지는 게 보통이지만…미소녀가 미끄러지는 경우엔 지금처럼 신사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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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바나나 껍질이 사라져 뚫린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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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쭈인님! 쭈인님! 한 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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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로 쭉 내려간 아이리스와 제스가 수북하게 쌓인 데비아탄 조직원들의 무덤 위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착지까지 안전하게 마무리 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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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 없으니까 안돼.”
    “히잉..”
    ​
    ​
    시무룩해진 제스를 쓰다듬어준 후 수북하게 쌓인 조직원을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마다 문이 달려있었는데, 딱 봐도 보스 방처럼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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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쭉쭉 들어가 가장 화려해 보이는 문을 살짝 열었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거친 소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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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쾅,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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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로 추정되는 남자가 거칠게 회의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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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주도 아니고, 광범위 마법도 아니라면 도대체 지금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그게…”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방도를 생각하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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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곳은 피가 난무하는 외부 상황과 달리 꽤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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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비아탄의 간부들은 현재 상황이 인위적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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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사람들이 나를 위협하지 않아야 이 소동이 끝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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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건 데비아탄이 나를 위협하면서 생긴 일이니, 그들이 나를 위협하지 않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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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아이리스와 제스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
    ​
    “안에 있는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봐야 할 거 같은데… 저 사람들이 날 싫어해서 막 위협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여기 숨어서 내가 위험할 거 같으면 도와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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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할 거 같으니 그저 숨어있으라고만 하면 분명 거부할 것이기에 그럴듯한 이유를 쥐여주었다.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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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내가 오빠 지켜줄게.”
    “나도!”
    “쉬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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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소리쳐 대답하는 제스의 입술을 검지로 막아 조용히 시키자 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귀를 축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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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문 옆, 사각지대에 몸을 숨겼다. 난 옷을 잘 추스른 후 마검을 소환했다.
    ​
    ​
    [ 크 흐 흐 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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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소환된 마검은 묘하게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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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역시 그대도 ‘블러드 웨이브’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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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검이 하도 ‘블러드 웨이브! 블러드 웨이브!’를 외쳐댄 탓에 기술명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래서 조상님께선 친구는 가려서 사귀라고 했던 건가..
    ​
    ​
    제사 지낼 때 만났던 조상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 ‘쨍그랑!’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문을 좀 더 열어 안쪽을 보자 널찍한 회의장 한쪽에 놓여있던 크고 화려한 화병이 깨져있었다. 바닥에….야구공이 데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
    ​
    “적,적습이다!”
    “젠장!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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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지하던 분위기가 엉망으로 변하고, 회의장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입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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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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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들이 빠져나가기 전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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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네스트! 네스트 놈들이다!”
    “네스트의 학살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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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이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우당탕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뒤를 따라오던 이들도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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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쾅,우드득! 쿵!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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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갖 잔혹한 소리와 함께 회의장에 있던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두 뒤엉켜 넘어졌다.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쓰러지거나 부서지고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끼익,끽하며 불길하게 흔들렸다.
    ​
    ​
    뭉게뭉게 피어난 먼지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
    ​
    “전부!”
    “…?”
    “전부 네녀석의 계획이었구나!”
    ​
    ​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눈가에 시퍼런 멍이 든 남자가 나를 검지 끝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궁지까지 몰려 간부들만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습격.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간부들 앞을 떡하니 막은 네스트의 사냥개이자 학살자라 불리는 리안.

알 수 없는 이유로 학살 당하고 있는 데비아탄과 엮어보면….

흑막 리안 완성!

리안 : ?예? 저는 도와주러온 사람인데요?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나는 착잡한 얼굴로 두 아이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머! 실수!”

우리가 막 지나간 길에 커다란 화분이 떨어졌다. 화분은 지나가던 다른 남자의 머리 위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으허헉!”

모자이크 처리가 된 남자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걸 어째?”

화분을 놓친 중년 여성이 후다닥 1층에 내려와 시체를 살펴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집 안에서 양탄자를 가져와 남자를 덮어버렸다.

“흐,흐흥..흐흐흥..”

어색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그 세계에서나 볼법한 온갖 사건이 재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네스트 조직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느려지던 걸음은 어느새 뚝 멈춰버렸다.

“…”

나는 뒤를 돌아 난리가 난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마왕의 땅이다. 약한자는 착취당하고 강한자는 모든 것을 누리는 잔혹한 땅.

이 땅에서 죄악을 저지른 자들은 모두 죄인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행을 저지른 죄인들에게만 해당되어야만 한다. 아이리스나 제스처럼 노예로 잡혀있는 아이들까지 이런 가혹한 운명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 얼마 안 되는 약자들 때문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다크 판타지 세계에서 절대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이 ‘죄책감’이다. 그것도 자신의 죄가 아닐 때 가지는 죄책감만큼 고구마를 유발하는 장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재해를 막아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야 했다.

‘…이대로 떠나면 데비아탄 조직이 차지한 동쪽 땅의 주민들이 몰살되어 땅이 텅 비어버릴 거야. 갑작스럽게 그 정도의 주민이 사라지면 마왕의 오른팔인 에르보안이 찾아올지도 몰라.’

사천왕 에르보안. 마왕군의 참모이며 사천왕 중 최강자라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사천왕과 달리 방만하지 않고 작은 사건에도 의문을 품을 줄 아는 남자였다.

데비아탄 조직의 구역이 며칠 만에 날아가 버렸다고 해도 지소나 라이나라면 ‘재미있는 싸움을 했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넘겼겠지만 에르보안은 의구심을 가지고 부하를 보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에르보안은 원작으로 따지자면 최종 보스를 만나기 직전에 마주할 수 있는 중간보스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강한.

아직 삐약삐약 수준인 아이리스와 에르보안이 마주치게 되거나, 에르보안이 아이리스에게 의문을 가지게 되면 아이리스는 정식 용사가 되기도 전에 살해당할 터다. 혹은 세뇌당해 타락하거나.

‘그러니까 사건을 너무 크게 만들어선 안 돼.’

그럴듯한 명분이 생기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나와 똑같이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는 제스와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나 잠시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저기에서 기다 -..”

“나..두고갈거야?”

“흐이잉…”

아이리스가 울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제스가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채웠다.

‘크으윽..’

두 사람의 초롱초롱 공격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위험한 곳에 가는 건데 괜찮겠어?”

“응!”

“좋아! 쭈인님 가는데, 다 좋아!”

순식간에 눈물을 그친 두 사람이 고개를 팔랑팔랑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데비아탄의 본부에.

***

데비아탄의 본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크흐흐..너희가 뭐라고 해도 난 절대 입을 열지 않겠..”

쨍그랑!

“아악! 그,그건 한정판 엘리에주 82년산!”

쩅그랑!

“아아아악! 아,안돼! 그,그건 172년산이라고!”

제스가 술이 예쁘게 전시된 곳을 고양이처럼 지나다니며 값비싼 술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렸다. 꽁꽁 묶인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마,말할게! 제,제발 그만 -….”

쨍그랑!

“아아악! 327년산이이잇…?!”

개그 세계 특.

목숨 따위 아깝지 않다고 말하면서 본인 취미에 관련된 물건 부수면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함.

“꺼흐흑..제발,제발 우리 애기들을 그만….다..말할테니까…”

혀를 깨물었는지 입에 피거품을 무는 남자를 보며 제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제스가 날렵한 몸짓으로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본부는?”

“본부는 성..벽과 가까운 ‘새벽이슬 주점’..그곳 지하에…크흐흑…”

어느새 남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쇼크로 눈이 뒤집혀 죽어버렸다.

작은 희생 끝에 알아낸 본부로 곧바로 쳐들어갔다.

와장창!

“이 새끼가!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억! 이 개자식이!”

챙그랑,챙!

새벽이슬이란 술집은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엉망인 상태였다. 아니, 다른 곳보다 더 상태가 심각했다. 반갈죽된 시체가 여기저기 보였고 마물 따위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인간들도 보였다.

‘본부라서 그런지 더 심각하네.’

지옥이 도래한 것 같은 술집 로비의 모습을 보다가 주방 쪽으로 향했다.

“이상하다? 이게 맞을 텐데?”

예쁘게 생긴 여성이 레시피 북을 휘리릭 넘겨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촉수가 넘실거리는…새카만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에잇! 괜찮겠지!”

그녀는 이내 썰어둔 무언가를 와르르 쏟아 넣어 국자를 넣고 젓기 시작했다.

치이익!

국자가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콧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아이리스와 제스에게 입가에 검지를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한 후 빠르게 주방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여기다.’

주방 뒤쪽에 자리한 길쭉한 수납장을 옆으로 밀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근데 계단에…바나나 껍질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드문드문 핏자국도 보였다.

드르륵.

우리가 계단을 한 칸 내려가자 밀어놓았던 수납장이 저절로 닫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리스와 제스를 향해 말했다.

“여기 주저앉아서 쭉 내려가 봐.”

“으응?”

“…?”

아이리스를 계단에 앉힌 후 미끄럼틀을 내려가듯이 살살 밀자.

훌렁!

바나나껍질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아이리스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스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휴우…미소녀에겐 착한 것까지 개그 세계랑 똑같네.’

보통은 천장과 벽에 머리를 박고 계단에 온몸이 구르며 떨어지는 게 보통이지만…미소녀가 미끄러지는 경우엔 지금처럼 신사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바나나 껍질이 사라져 뚫린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쭈인님! 쭈인님! 한 번만 더!”

아래로 쭉 내려간 아이리스와 제스가 수북하게 쌓인 데비아탄 조직원들의 무덤 위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착지까지 안전하게 마무리 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 없으니까 안돼.”

“히잉..”

시무룩해진 제스를 쓰다듬어준 후 수북하게 쌓인 조직원을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마다 문이 달려있었는데, 딱 봐도 보스 방처럼 보이진 않았다.

안으로 쭉쭉 들어가 가장 화려해 보이는 문을 살짝 열었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거친 소음이 들려왔다.

쾅,콰앙!

보스로 추정되는 남자가 거칠게 회의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주도 아니고, 광범위 마법도 아니라면 도대체 지금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그게…”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방도를 생각하란 말이다!”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곳은 피가 난무하는 외부 상황과 달리 꽤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데비아탄의 간부들은 현재 상황이 인위적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위협하지 않아야 이 소동이 끝날거야.’

모든 건 데비아탄이 나를 위협하면서 생긴 일이니, 그들이 나를 위협하지 않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아이리스와 제스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봐야 할 거 같은데… 저 사람들이 날 싫어해서 막 위협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여기 숨어서 내가 위험할 거 같으면 도와줄 수 있을까?”

위험할 거 같으니 그저 숨어있으라고만 하면 분명 거부할 것이기에 그럴듯한 이유를 쥐여주었다.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오빠 지켜줄게.”

“나도!”

“쉬잇.”

크게 소리쳐 대답하는 제스의 입술을 검지로 막아 조용히 시키자 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귀를 축 늘어뜨렸다.

두 사람이 문 옆, 사각지대에 몸을 숨겼다. 난 옷을 잘 추스른 후 마검을 소환했다.

[ 크 흐 흐 흐… ]

“…?”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소환된 마검은 묘하게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 역시 그대도 ‘블러드 웨이브’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

“…”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검이 하도 ‘블러드 웨이브! 블러드 웨이브!’를 외쳐댄 탓에 기술명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래서 조상님께선 친구는 가려서 사귀라고 했던 건가..

제사 지낼 때 만났던 조상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 ‘쨍그랑!’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문을 좀 더 열어 안쪽을 보자 널찍한 회의장 한쪽에 놓여있던 크고 화려한 화병이 깨져있었다. 바닥에….야구공이 데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적,적습이다!”

“젠장!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온 거지!”

진지하던 분위기가 엉망으로 변하고, 회의장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입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끼이익.

나는 그들이 빠져나가기 전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네,네스트! 네스트 놈들이다!”

“네스트의 학살자가 나타났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이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우당탕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뒤를 따라오던 이들도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쾅,우드득! 쿵! 콰직!

온갖 잔혹한 소리와 함께 회의장에 있던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두 뒤엉켜 넘어졌다.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쓰러지거나 부서지고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끼익,끽하며 불길하게 흔들렸다.

뭉게뭉게 피어난 먼지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부!”

“…?”

“전부 네녀석의 계획이었구나!”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눈가에 시퍼런 멍이 든 남자가 나를 검지 끝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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