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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9

       

         

         

       라인하르트 힘러 준장.

         

       새롭게 헌병실장으로 부임한 남자였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저 잘생기고 젊은 장교 중 한 명이었지만, 기억을 되찾은 지금으로선 결코 감정이 좋을 수 없었다.

         

       열 다섯 번째 회귀에서 그녀와 루터스의 앞길을 막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고, 유능한 남자지만 사실 그 손에 묻혀진 피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필요한 이에게는 냉철하며 사회적인 면을 연기하며, 필요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것도 모자라ㅡ.

         

       ‘죽여버렸었지.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그는 쾌락살인마였다.

         

       그런 남자가 어떻게 총통의 신임을 받았는지, 이 자리에까지 올라올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차피 미하일 총통이나 라인하르트 헌병실장이나 그 나물에 그 밥.

         

       타도하고 끝내는 저 밑바닥에 처박아버려야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빈말로라도 말이 좋게 나오지 않았다.

       

       “그렇군요. 감찰실장 아르헨 오르카 준장입니다. 함께 잘 해봤으면 좋겠네요.”

         

       “예, 물론이죠.”

         

       라인하르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아르헨은 그 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푹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아직 악수까지 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반응은 라인하르트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당황스러운 듯 일그러진다.

         

       “게다가 피곤하거든요. 이야기는 내일 나눠보도록 하죠. 혹시 용무를 다 마치셨으면 그만 돌아가주시겠어요?”

         

       그녀는 조금 전까지 검토하고 있던 서류뭉치들을 탁탁 내리쳐 서랍 안에 넣어놓고는, 서랍장의 전자락을 잠가버렸다.

         

       “흐음… 뭐, 정말로 소문대로네요.”

         

       그 모습에 라인하르트가 제 턱을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빨리 꺼지라는 무언의 압박.

         

       그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은 라인하르트는 우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기회도 많았다.

         

       저런 앙칼진 여자가 엉망이 되어, 끝내 굴종했을 때만큼 즐거운 일이 없으니.

         

       단순히 업무적인 흥밋거리로 생각했던 아르헨 오르카의 순위가 라인하르트의 뇌내에서 한 단계 올라갔다.

         

       총통에게 위협이 된다는 느낌이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의 가치관 아래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라인하르트 힘러 준장의 예고없는 방문은 계속되었다.

         

       본래 헌병실은 감찰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니, 실장들끼리의 방문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르헨 오르카는 불편하다는 의사를 몇 번이고 내비쳤으나,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딱히 상관하지 않듯이 라인하르트 역시 그녀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해버렸다.

         

       그러다보니 아르헨 오르카 역시 무언가 상황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라인하르트가 내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

         

       아무런 이유 없이 감찰실을 방문하는 것도 모자라, 시도 때도 없이 애프터 약속을 제안했다.

         

       너무나도 노골적이기 짝이 없는 어프로치에 처음에는 으레 있던 해프닝으로 넘기려던 같은 감찰실 동료들조차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단순히 질긴 수준이 아니다.

         

       어프로치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아르헨도 더 노골적으로 거절했다.

         

       언젠가는 그의 부하들이 다 보는 곳에서 대놓고 퇴짜를 맞히기도 했다.

         

       일반적인 남자였다면 이미 이 시점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가거나,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집요하리만큼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정말로 개인적인 이유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일까.’

         

       어느 쪽이든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보다 해결이 쉬운 것은 전자였다.

         

       개인적으로 찝쩍거리는 거라면, 그녀의 준비가 완전히 마무리 되기 전까지 시간을 끌었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해버리면 되었으니까.

         

       실제로 아르헨 오르카는 현재 샬롯 에버그린과 한 차례 접촉한 상태이기도 했다.

         

       섣부르게 위치를 밝힐 수 없는 위치이니 만큼, 온라인 상에서 만나기라도 했지만 추후 모든 작업이 끝나면 그녀에게 합류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라인하르트 같은 샌님을 담궈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속죄를 마치고, 마침내 자신의 옛 연인이 완벽한 승리를 손에 거머쥐었을 때.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만 같았다.

         

       더럽고 추악한, 사랑했던 연인조차 질려 떠나버린 그녀, 아르헨 오르카의 목숨을 정리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연인의 모습을 보고 난 뒤로 하자고.

         

       설령 욕심일 지라도.

       끝까지 추악한 옛 인연의 쓸데없는 발버둥일 지라도.

         

       자신의 연인이 모든 짐을 훌훌 털어내어, 새롭게 만든 소중한 인연들과 활짝 웃는 모습만큼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마무리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이제까지는 나름 순항 중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사령부에 출근했을 때, 라인하르트가 제 헌병들과 함께 사무실에 들어와있던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일이 확실히 꼬여버렸음을 직감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죠?”

         

       아르헨 오르카가 팔짱을 끼고 라인하르트 힘러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라인하르트 힘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법 집행 중입니다.”

         

       “월권입니다. 당장 돌아가세요.”

         

       감찰실을 헌병대원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녀 휘하의 감찰실 인원들은 그저 둘 사이에 껴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섣부르게 헌병대를 제지하지 못하는 상황.

         

       헌병 중 하나가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가려 하자, 참다 못한 아르헨이 곧장 권총을 뽑아들어 헌병을 겨누었다.

         

       “거기! 당장 멈추지 않으면 쏘겠어.”

         

       아르헨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설마 사령부 내에서 진짜로 총을 겨눌줄은 몰랐는지, 문제의 헌병이 양 손을 빠르게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인하르트 힘러가 씩 웃으며 그녀의 총구 앞을 가로막는다.

         

       “아르헨 오르카 준장님, 너무 선을 넘으시는군요.”

         

       “선을 넘은 건 그쪽이랑 헌병대입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제가 그쪽이랑 안 놀아줬다고, 쓸데없는 보복이나 가하려는 거예요?”

         

       “보복이라… 뭐, 그런 시덥잖은 것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거든요.”

         

       “합당한 이유? 여기는 제 공간이에요, 헌병실장. 무슨 개소리에 현혹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찰실장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자료도 함부로 손대실 수 없어요!”

         

       사실이었다.

         

       감찰실-헌병대-군법원으로 연결되는 세 고리는 상호 견제 관계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호 견제가 아닌 감찰실의 우위라고 볼 수 있었다.

         

       감찰실이 헌병대를 불시감찰할 수 있었지만, 헌병대는 상부의 명령이 있지 않는 한 감찰실의 권한을 침범하여 독단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 상부의 명령조차 수사가 시작되기 이전 3일전에 공지되어야만 했다.

         

       적어도 서류상으론 3대 세력 중 감찰실의 권한이 헌병대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르헨의 입장에서 라인하르트의 이 모든 짓은 ‘월권’이 맞았다.

         

       그것도 절차조차 지키지 않고 한 행동이었으니, 걸고 넘어진다면 얼마든지 걸고 넘어질 수 있으리라.

         

       헌병실장이 종이 한 장을 그녀의 눈앞에 팔랑거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긴급인사명령서였다.

         

       “오늘 아침부터 발효된 명령입니다. 아르헨 오르카 준장, 보직해임.”

         

       뒤쪽에는 아무런 직책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

         

       얌전히 자리에서 물러나고 헌병대에게 맘껏 물어뜯기라는 명령이었다.

         

       “….”

         

       아르헨 오르카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라인하르트 힘러가 헌병실장에 보직되었을 때부터 언젠가는 찾아올 일이라 여겼지만, 생각보다도 빠를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루터스 에단의 대한 자료를 모조리 파기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현재 노이덴크 38번가에 위치한 그레이브야드 아카샤 접속 장치에 옮겨져 있었으며, 샬롯 에버그린에게도 대부분의 파일을 전달해두었다.

         

       꼬리를 밟힐 일은 없다.

         

       그래봐야 요직에서 거슬리는 일을 치워낼 뿐이지 않는가.

         

       대충 자리에서 물러난 뒤, 생각해두었던대로 샬롯과 레아에게 합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찰나.

         

       “이상하게 여유롭군요, 준장.”

         

       “문제라도 되나요?”

         

       “아뇨. 그 배짱도 참 두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라인하르트 힘러가 씩 웃으며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르헨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 소름끼치는 손길에 그녀가 기겁하며 손을 내친다.

         

       짝!

         

       “이, 미친…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신 이거 성추행이야. 알아요?”

         

       “성추행이든 뭐든, 지금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 보직이 해임됐는데요.”

         

       “제국군 헌법 제 32조, 8항. 군내 성범죄 신고에 관한 법령. 의도와 관계없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때에는, 추가적인 보고 절차 없이 즉시 외부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다. 저도 그쪽이랑 마찬가지로 법을 다루는 사람인데, 어디 한번 해볼까요?”

         

       “하하하! 진짜로, 진짜로 재미있어 죽겠네. 이러니까 최고 사령부에서 간 크게 이런 짓을 벌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헨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기 때문이었다.

         

       “아르헨 오르카 준장, 제국군 헌법 제 3조 2항, 반란의 죄에 따라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한다. 혐의명은 국가 범죄자와의 접촉.”

         

       라인하르트가 어느새 수갑을 꺼내 그녀의 손목에 채웠다.

         

       “샬롯 에버그린, 그 여자와 최근에 접촉한 기록이 있더군?”

         

       “….”

         

       “자세한 이야기는 취조하면서 들어보도록 하지.”

         

       아르헨이 다가온 헌병대의 손에 이끌려 감찰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샬롯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기록이 추적당하기라도 했던 걸까.

         

       실책이었다.

         

       하지만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루터스에 대한 건 몰라.’

         

       어디까지나 샬롯 에버그린과 접촉한 것이 죄명이라면, 그 이후의 일은 그녀가 불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지하 취조실로 내려가며, 아르헨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랜만입니다.

    이제 연재시간을 다시 18시에서 20시로 변경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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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ar Hero With No Regrets

A War Hero With No Regrets

후회 안 하는 전쟁영웅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victory earned after forty regressions.

It was now my turn to leave their side.

Not by anyone else’s will, but by my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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