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다른 왕족과는 달리 왕족이라는 허울뿐인 신분의 정확한 가치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왕족이라는 신분을 믿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는 일 없이 랑이 직접 소개한 나의 호감을 사는 데 집중했고.
랑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인지 대화 중 몇번이나 여왕이 된 이후의 뒤뜰에 핀 꽃처럼 조용히 살아갈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는 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별 대단찮은 욕망이 없는 소녀이니, 랑은 이를 간파하고 그녀를 간택한 것이겠지.
만약 평범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크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인물인데, 하필이면 왕족으로 태어난 것이 그녀의 불행이다.
왕족으로 태어난 게 불행이라니.
거리를 전전하는 평민들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사치스러운 소리냐며 비웃었겠지.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그럼 이만 돌아갈게.”
“예, 그럼 다음에 또….”
랑과 헤어져 저택으로 돌아오니, 골목 구석까지 빈틈없이 어둠이 스며든 늦은 시각이었다.
다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 가운데 멀찍이서 보이는 나의 저택만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먼저 자도 괜찮다고 말했는데.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이번만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던 모양.
빨리 세라를 안심시켜주고 마음에 조금 속도를 내어 저택에 당도하자, 저택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가 눈을 번쩌 뜨며 달려왔다.
“…무슨 일 없었어?”
“보다시피!”
목덜미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언젠가 테레지나의 앞에서 선보였던 마술쇼를 떠올렸는지 세라는 미간을 좁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추궁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위험한 짓은 하지 않기로 약속한 거 아니냐고, 그렇게 추궁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바는 이해하지만, 나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어차피 부활할 거라고 알고 있으니, 나에게는 목덜미를 긋는 게 자살이 아니라 무릎에 앉은 딱지를 떼는 정도의 가벼운 자해 행위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이번 일은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세라에게 전하자, 그녀는 드물게도 화가 났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어디 가둬놔야 할까.”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그건 참아줘. 그리고 이번에 랑 누나랑 상의한 내용 중에 세라한테도 전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뭔데?”
“누나를 칠 거야.”
“…….”
누나라는 말에 세라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떡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테레지나에게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토록 두려워하던 테레지나와 맞서 싸운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건지 그녀의 안에서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듯하였다.
확실한 것은 어머니를 해친다는 사실에 주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두려움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해주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결의에 찬 감정이 느껴졌으니까.
“당장 하는 거야?”
“아무리 왕도가 막장이라도 연달아 사건이 터지면 책임을 피하긴 힘들겠지.”
세라의 성장이 생각 이상으로 빨랐기에 다 함께 덤빈다면 어떻게든 될 가능성도 크지만, 아직은 승산이 적다.
적어도 앞으로 레벨을 10 정도는 더 올린 후에 그녀에게 도전하고 싶다.
“…당장 싸울 게 아니라면 그 여자랑 싸우는 건 나중에 나 혼자 해도 괜찮아?”
“혼자?”
설마 그런 세라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세라는 테레지나를 증오하긴 하였으나 딱히 그녀의 죽음에 어떠한 집착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유를 물어도 괜찮을까?”
“…복수극의 주인공처럼 거창 이유나 대의 같은 걸 들려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없어. 시간이 있다면 나라도 그년을 죽일 수 있을 거 같아서 말해봤을 뿐이야.”
“아, 무슨 집착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구나?”
“그럴 리가 없지. 나한테 그 여자는 침대 밑에 숨은 귀신 같은 거였어. 솔직한 심정을 고하자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엮이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 그랬는데 말이야….”
“응?”
“프린스가 재밌는 마법을 가르쳐줬어.”
그 재미난 마법이라는 것은 악마에 정통하지 않은 나라도 들어본 적 있었던 것이었다.
소생 마법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계통의 마법으로 그 마법을 테레지나에게 사용한다는 것은 조금 전 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집착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집착은 없어. 그냥 가지고 놀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야. 내가 당했던 걸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생각은… 조금 밖에 없어.”
“없지는 않구나?”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말릴 거야?”
“아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상대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겠지만, 이것도 그녀가 짊어져야 할 업보 중 하나겠지.
랑도 목숨을 거두는 것까지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고, 세라의 울분을 풀 좋은 기회이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할 거 같으면 바로 끼어들 거야. 그런 조건이라도 상관없다면 허락할게.”
“…그 정도는 괜찮아. 그럼 바로 몬스터를 잡으러 갈 거야?”
“응,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으니까. 변수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출발하고 싶어.”
사냥터는 생각해둔 곳이 있다.
코스를 완주하고 돌아왔을 때쯤이면 레벨을 최소한 80 이상까지는 올린 후겠지.
그때라면 테레지나는 물론이고, 용사 파벌과 랑까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용사 파벌은 둘째치고 랑은 어떻게 할 생각 없지만.
나라가 수십 수백으로 나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 나라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힘이 없는 왕가가 역할을 맡을 수는 없고, 나에게는 그러할 능력이 없으니 그 역할은 랑이 맡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안정된 나라를 위해서는 제국 쪽으로 기운 균형을 어떻게든 되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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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치겠다고요?”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랑을 들려 그런 말을 전하자, 랑은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국에서 그 누구보다 제국을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그것이 필요한 일임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던 랑은 이내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란 감투를 쓴 왕국 때문에 잘 부각되는 편은 아니지만, 제국이란 나라는 무시할 수 없다.
지금 왕국이 무사한 것은 왕국과 제국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알브로시아 대관문이 견고한 요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지금 당장 제국이 북상하여 대관문을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리 오랜 시간 버티지 못하고 대관문은 제국군 손에 함락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용사의 후손이라는 어느 얼간이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제국에 길레온만한 강자가 넘치는 건 아니지만, 없는 건 또 아니다.
예를 들어 쌍룡이라고 불리는 두 장군의 레벨은 각각 80에 달하였고, 차기 황제인 황태자의 레벨은 내가 알기로 현시점에서 60 정도.
병사들의 수준도 높아 만약 제국군과 왕국군이 평야에서 맞붙는다면 아마 승리하는 것은 제국군이겠지.
왕국이 사실상 둘로 나뉜 것을 생각하면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승리하는 것은 제국이다.
“제국이 침공을 개시하지 않는 건 그렇게 승리를 얻는다고 해도 왕국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예,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왕국이 부패했다고 해도 제국군에게 아무런 타격 없이 쓰러질 정도는 아니니까요.”
“응, 그 녀석들은 피로스의 승리를 얻는 게 두려워서 가만히 앉아 왕국이 약화한 것을 지켜본 거야. 그런 녀석들이라면 이번 테러로 왕국이 얼마나 크게 흔들렸는지도 알고 있겠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 어떠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제국이 이번 테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일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왕국만큼은 아니지만, 제국도 한뜻은 아닐 터이니 분명 이번 일을 안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쳐들어가자는 목소리가 생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 그 피를 노리고 이번에는 어떤 녀석이 달려올지 알 수 없는 일.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떠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균형을 맞춰야지.”
왕국은 이번 사건으로 최소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제국도 최소한 비슷한 피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왕국의 힘이 약해진 지금을 노리자고 주장하는 개전파를 다물게 할 수 없다.
길레온이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쌍룡 중 한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쌍룡이라면 제국 검사와 마법사로 유명하죠. 모르긴 몰라도 길레온도 그 두 사람과 정면에서 붙는 건 피할걸요? 그런 무인을 쓰러트릴 수 있겠어요?”
“한지의 레벨은 120이야. 80 레벨 따위한테 고전하면 한지를 이길 수 없어.”
“120….”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수치에 랑은 현실미를 느끼지 못하였는지 피식 웃었다.
이 레벨에 도달한 이는 세라의 아버지인 바알과 동급의 악마나 반신 중에서도 극소수의 특별한 존재만이 겨우 이 레벨에 도달했다.
말 그대로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런 수치를 입에 담는 것은 농담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난 진심이다.
레벨 120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한지에게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
“그 정도의 강함이라면 펠트 군이 신이 된다고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겠죠. 신이 되신 후에도 저와의 인연을 기억해 주셔야 해요?”
“랑 누나의 체취는 독특하니까 아마 그렇게 잘난 사람이 된 후에도 잊지 못할 거야.”
“그건 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