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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9

       ​

        공주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

        다른 왕족과는 달리 왕족이라는 허울뿐인 신분의 정확한 가치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고.

        ​

        그렇기에 왕족이라는 신분을 믿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는 일 없이 랑이 직접 소개한 나의 호감을 사는 데 집중했고.

        ​

        랑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인지 대화 중 몇번이나 여왕이 된 이후의 뒤뜰에 핀 꽃처럼 조용히 살아갈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는 했다.

        ​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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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대단찮은 욕망이 없는 소녀이니, 랑은 이를 간파하고 그녀를 간택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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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평범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크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인물인데, 하필이면 왕족으로 태어난 것이 그녀의 불행이다.

        ​

        왕족으로 태어난 게 불행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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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를 전전하는 평민들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사치스러운 소리냐며 비웃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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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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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만 돌아갈게.”

        ​

        “예, 그럼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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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과 헤어져 저택으로 돌아오니, 골목 구석까지 빈틈없이 어둠이 스며든 늦은 시각이었다.

        ​

        다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 가운데 멀찍이서 보이는 나의 저택만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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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자도 괜찮다고 말했는데.

        ​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이번만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던 모양.

        ​

        빨리 세라를 안심시켜주고 마음에 조금 속도를 내어 저택에 당도하자, 저택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가 눈을 번쩌 뜨며 달려왔다.

        ​

        “…무슨 일 없었어?”

        ​

        “보다시피!”

        ​

        목덜미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언젠가 테레지나의 앞에서 선보였던 마술쇼를 떠올렸는지 세라는 미간을 좁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고는 추궁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

        위험한 짓은 하지 않기로 약속한 거 아니냐고, 그렇게 추궁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

        그녀가 걱정하는 바는 이해하지만, 나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

        어차피 부활할 거라고 알고 있으니, 나에게는 목덜미를 긋는 게 자살이 아니라 무릎에 앉은 딱지를 떼는 정도의 가벼운 자해 행위다.

        ​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이번 일은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

        그런 말을 세라에게 전하자, 그녀는 드물게도 화가 났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역시 어디 가둬놔야 할까.”

        ​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그건 참아줘. 그리고 이번에 랑 누나랑 상의한 내용 중에 세라한테도 전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

        “뭔데?”

        ​

        “누나를 칠 거야.”

        ​

        “…….”

        ​

        누나라는 말에 세라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떡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토록 두려워하던 테레지나에게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

        아니면 그토록 두려워하던 테레지나와 맞서 싸운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건지 그녀의 안에서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듯하였다.

        ​

        확실한 것은 어머니를 해친다는 사실에 주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

        두려움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해주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결의에 찬 감정이 느껴졌으니까.

        ​

        “당장 하는 거야?”

        ​

        “아무리 왕도가 막장이라도 연달아 사건이 터지면 책임을 피하긴 힘들겠지.”

        ​

        세라의 성장이 생각 이상으로 빨랐기에 다 함께 덤빈다면 어떻게든 될 가능성도 크지만, 아직은 승산이 적다.

        ​

        적어도 앞으로 레벨을 10 정도는 더 올린 후에 그녀에게 도전하고 싶다.

        ​

        “…당장 싸울 게 아니라면 그 여자랑 싸우는 건 나중에 나 혼자 해도 괜찮아?”

        ​

        “혼자?”

        ​

        설마 그런 세라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

        세라는 테레지나를 증오하긴 하였으나 딱히 그녀의 죽음에 어떠한 집착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

        “이유를 물어도 괜찮을까?”

        ​

        “…복수극의 주인공처럼 거창 이유나 대의 같은 걸 들려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없어. 시간이 있다면 나라도 그년을 죽일 수 있을 거 같아서 말해봤을 뿐이야.”

        ​

        “아, 무슨 집착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구나?”

        ​

        “그럴 리가 없지. 나한테 그 여자는 침대 밑에 숨은 귀신 같은 거였어. 솔직한 심정을 고하자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엮이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 그랬는데 말이야….”

        ​

        “응?”

        ​

        “프린스가 재밌는 마법을 가르쳐줬어.”

        ​

        그 재미난 마법이라는 것은 악마에 정통하지 않은 나라도 들어본 적 있었던 것이었다.

        ​

        소생 마법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계통의 마법으로 그 마법을 테레지나에게 사용한다는 것은 조금 전 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

        “집착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

        “집착은 없어. 그냥 가지고 놀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야. 내가 당했던 걸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생각은… 조금 밖에 없어.”

        ​

        “없지는 않구나?”

        ​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말릴 거야?”

        ​

        “아니.”

        ​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상대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겠지만, 이것도 그녀가 짊어져야 할 업보 중 하나겠지.

        ​

        랑도 목숨을 거두는 것까지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고, 세라의 울분을 풀 좋은 기회이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위험할 거 같으면 바로 끼어들 거야. 그런 조건이라도 상관없다면 허락할게.”

        ​

        “…그 정도는 괜찮아. 그럼 바로 몬스터를 잡으러 갈 거야?”

        ​

        “응,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으니까. 변수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출발하고 싶어.”

        ​

        사냥터는 생각해둔 곳이 있다.

        ​

        코스를 완주하고 돌아왔을 때쯤이면 레벨을 최소한 80 이상까지는 올린 후겠지.

        ​

        그때라면 테레지나는 물론이고, 용사 파벌과 랑까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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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사 파벌은 둘째치고 랑은 어떻게 할 생각 없지만.

        ​

        나라가 수십 수백으로 나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 나라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

        힘이 없는 왕가가 역할을 맡을 수는 없고, 나에게는 그러할 능력이 없으니 그 역할은 랑이 맡아주어야 한다.

        ​

        그리고 안정된 나라를 위해서는 제국 쪽으로 기운 균형을 어떻게든 되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

        ******

        ​

        “제국을 치겠다고요?”

        ​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랑을 들려 그런 말을 전하자, 랑은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였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

        왕국에서 그 누구보다 제국을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그것이 필요한 일임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던 랑은 이내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란 감투를 쓴 왕국 때문에 잘 부각되는 편은 아니지만, 제국이란 나라는 무시할 수 없다.

        ​

        지금 왕국이 무사한 것은 왕국과 제국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알브로시아 대관문이 견고한 요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만약 지금 당장 제국이 북상하여 대관문을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리 오랜 시간 버티지 못하고 대관문은 제국군 손에 함락될 것이다.

        ​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용사의 후손이라는 어느 얼간이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

        세상은 넓고 제국에 길레온만한 강자가 넘치는 건 아니지만, 없는 건 또 아니다.

        ​

        예를 들어 쌍룡이라고 불리는 두 장군의 레벨은 각각 80에 달하였고, 차기 황제인 황태자의 레벨은 내가 알기로 현시점에서 60 정도.

        ​

        병사들의 수준도 높아 만약 제국군과 왕국군이 평야에서 맞붙는다면 아마 승리하는 것은 제국군이겠지.

        ​

        왕국이 사실상 둘로 나뉜 것을 생각하면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승리하는 것은 제국이다.

        ​

        “제국이 침공을 개시하지 않는 건 그렇게 승리를 얻는다고 해도 왕국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

        “예,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왕국이 부패했다고 해도 제국군에게 아무런 타격 없이 쓰러질 정도는 아니니까요.”

        ​

        “응, 그 녀석들은 피로스의 승리를 얻는 게 두려워서 가만히 앉아 왕국이 약화한 것을 지켜본 거야. 그런 녀석들이라면 이번 테러로 왕국이 얼마나 크게 흔들렸는지도 알고 있겠지.”

        ​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 어떠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제국이 이번 테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일까?

        ​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왕국만큼은 아니지만, 제국도 한뜻은 아닐 터이니 분명 이번 일을 안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쳐들어가자는 목소리가 생길 것이다.

        ​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 그 피를 노리고 이번에는 어떤 녀석이 달려올지 알 수 없는 일.

        ​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떠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그러니까 균형을 맞춰야지.”

        ​

        왕국은 이번 사건으로 최소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제국도 최소한 비슷한 피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렇지 않으면 왕국의 힘이 약해진 지금을 노리자고 주장하는 개전파를 다물게 할 수 없다.

        ​

        길레온이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쌍룡 중 한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

        “쌍룡이라면 제국 검사와 마법사로 유명하죠. 모르긴 몰라도 길레온도 그 두 사람과 정면에서 붙는 건 피할걸요? 그런 무인을 쓰러트릴 수 있겠어요?”

        ​

        “한지의 레벨은 120이야. 80 레벨 따위한테 고전하면 한지를 이길 수 없어.”

        ​

        “120….”

        ​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수치에 랑은 현실미를 느끼지 못하였는지 피식 웃었다.

        ​

        이 레벨에 도달한 이는 세라의 아버지인 바알과 동급의 악마나 반신 중에서도 극소수의 특별한 존재만이 겨우 이 레벨에 도달했다.

        ​

        말 그대로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런 수치를 입에 담는 것은 농담처럼 들리겠지.

        ​

        하지만 난 진심이다.

        ​

        레벨 120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한지에게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

        ​

        “그 정도의 강함이라면 펠트 군이 신이 된다고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겠죠. 신이 되신 후에도 저와의 인연을 기억해 주셔야 해요?”

        ​

        “랑 누나의 체취는 독특하니까 아마 그렇게 잘난 사람이 된 후에도 잊지 못할 거야.”

        ​

        “그건 잊으세요.”

        ​

        ​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It’s an NTR game, so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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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layed this game because it was f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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