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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EP.79 EP.79

EP.79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내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다오(X)

       

       마! 함 대주라!(O)

       

       어지러운 번역기 내용을 한차례 곱씹고는 빵긋 웃었다.

       

       “싫은데요?”

       

       “…에?”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청한 소리를 내는 이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을 이해했는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다.

       

       “어, 어째서죠?!”

       

       “어째서냐니. 그야….”

       

       “전직이라고는 하나 저는 여왕이었습니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러지 않았을 뿐,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어요.”

       

       “권력은 저도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데요? 일단 성자 비슷한 거라.”

       

       “그, 그럼 돈은 어떻습니까? 저는 수완이 부족해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다른 엘프들은 아니잖습니까. 제가 요청하면 다들 아낌없이 골드를 내어줄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근데 전 대륙의 엘프가 모은 돈보다 신전이 모은 돈이 더 많지 않을까요?”

       

       “큭….”

       

       “뭣보다 저는 돈 때문에 결혼하는 속물이 아닌데…이브 씨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조금 슬프네요.”

       

       “아, 아니에요! 세계수께 맹세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흐응. 뭐, 그거야 그렇다고 치죠. 하지만 어찌됐건 제가 이브 씨와 결혼할 이유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잖아요.”

       

       “그건….”

       

       입술을 우물거리다 결국 두 눈 꾹 감고 외치는 이브.

       

       “허면 외모는 어떻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참 뭐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저는 엘프 중에서도 한층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다 자신합니다만.”

       

       “와…돈 다음은 외모라. 이거 조금 전에 한 말 그대로 적용되는 거 아시죠? 제가 돈만 보고 결혼하는 사람이 아니듯, 얼굴만 보고 결혼하는 사람도 아니랍니다.”

       

       “……!”

       

       아예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푸욱 숙인 이브.

       

       물론 외모는 큰 고려 사항이고, 이브 정도면 얼마든지 웰컴이지만…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순서의 문제라는 게 있지 않나.

       

       이브의 서열은 기껏해야 3위에 불과하다…!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브를 아래에서부터 올려다보았다.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얼룩진 표정. 이에 한쪽 입꼬리를 히죽 끌어 올렸다.

       

       “어쩌면 이브 씨 말대로 제가 운명일지도 모르죠. 저 말고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이브 씨의 사정 아닌가요?”

       

       “…….”

       

       “물론 이브 씨의 사정은 딱하답니다. 하지만 동정심만으로 제가 이브 씨를 위해 인생을 바쳐야 하는 건 아니죠. 제게도 목표가 있고 사정이 있으니 말이에요.”

       

       “…….”

       

       그래. 이브가 모솔아다답게 분위기를 타고 급발진하긴 했지만, 이쯤이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분위기와 상황에 취해 나한테 프러포즈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뭐어. 솔직히 말해선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남녀역전 세계인 판 대륙에서 여자의 외모는 가치 있긴 해도 그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수준은 아니지만…적어도 내겐 중대 사항이니까.

       

       이브 정도 되는 여자가 나밖에 없다며 돈이고 권력이고 다 내어줄 테니 결혼해달라고 하는데 싫을 리가 없잖은가.

       

       다만, 아까도 말했듯 내게는 이 세계에 뿌려둔 암울한 복선을 처리한다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미궁 최심부에 있는 사랑의 여신과도 대면해 보고 싶고.

       

       이제 막 1층을 공략한 지금 시기에 이브에게 묶일 수는 없다.

       

       이브가 나를 구속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나란히 왕과 여왕이 되어 복권하건, 은퇴한 채로 상징적 존재가 되어 놀고 먹건 확실한 건 내 여정은 거기서 끝이라는 소리다.

       

       아무리 엘프 사회에서 여왕의 존재감이 낮아지고, 세계수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지만 그렇다고 왕 혹은 여왕의 부군이 미궁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지켜볼 리 없잖은가.

       

       그런 이유로 여기서 이브의 계획을 단념시킨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내 손으로 흑화시킬 수도 있으니 적당히 여지는 줘야겠지만.

       

       손을 뻗어 이브의 얼굴을 붙잡았다.

       

       몰랑.

       

       부드러운 뺨의 감촉. 젖살 없는 갸름한 얼굴선이지만, 그냥 피부 자체가 부드럽다.

       

       당황스러워한 이브가 조심스레 눈을 뜬다. 뜬다고 해봤자, 아예 감고 있던 것이 평소의 실눈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 상태에서 살짝 각도를 조절하여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브 씨. 피하지 말고 저를 봐주세요.”

       

       “저, 저는….”

       

       “알아요 알아. 그동안 많이 외로웠던 거죠? 상황이 이브 씨를 그렇게 몰아갔을 거예요.”

       

       “알아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세계수께서는 엘프의 미래를 위해 영면에 드셨고, 살아남은 엘프는 실의에 빠진 와중에 이브 씨는 세계수께서 안배한 여왕으로서 이 암울한 상황을 타파해야 했을 거예요. 그때는 이브 씨도 어렸을 테니 쉽지 않았겠죠.”

       

       “그랬죠…제가 많은 것을 타고나긴 했으나, 경험까지 타고나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경험까지 쌓은 지금의 내게 약점은 없다(X)

       

       설마 이런 나도 용서해 주는 건가…?(O)

       

       음. 이브어 번역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소리겠지.

       

       달리 말해 멘붕 상태에서 조금 회복했다는 뜻이다.

       

       은근슬쩍 이브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한 종족의 명운을 홀로 짊어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죠. 진실을 본다는 게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닐 테고요. …무엇보다 그 고통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는 게 이브 씨의 가장 큰 슬픔이었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무릇 여왕이란 고고한 존재여야 하기에.”

       

       이해는 고맙지만 연민은 곧 모욕이다.(X)

       

       이 남자. 침대에서도 내 취향을 이해해 줄까?(O)

       

       진짜 머리속에 마구니 밖에 안 들은 거니 이브이브야….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천 년 동안 참고 살았으면 그럴 수도 있다 여기며 감싸고 있던 이브의 머리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천천히 내려오는 머리. 하지만 목의 구조상 더는 꺾이지 않는 각도까지 꺾이자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내게 맞춰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브를 끌어당겼다.

       

       나보다 높았던 시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비슷해지더니, 이제는 좀 더 낮아졌다.

       

       여왕의 품위를 상징하듯 꼿꼿했던 허리는 구부러졌고, 무릎은 이미 바닥에 꿇어앉은 상황.

       

       아까는 내가 올려다봤지만, 이제는 이브가 올려다보는 구도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브 씨가 제게 집착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하지만 안 돼요.”

       

       “그럼 저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이 기나긴 삶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로…?”

       

       차라리 희망을 모르고 살았다면….(X)

       

       이렇게 된 거 그냥 눈 딱 감고 납치해 버려?(O)

       

       세상에.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사실 이브가 흑화한 이유는 주인공에게 집적대다가 차여서 그런 게 아닐까??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나름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렸고, 지금은 고전적인 엘프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이브가 아무리 그래도 차였다고 흑화하겠나 싶었는데….

       

       이렇게 번역기 내용을 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경악을 숨기듯 이브의 머리를 잡아끌어 그대로 끌어안았다.

       

       내 가슴팍에 묻히는 이브의 얼굴. 예상치 못한 이벤트인지 움찔거리는 그녀의 연녹색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마치 사고 친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것처럼.

       

       천천히 잦아드는 이브의 떨림. 완전히 진정한 뒤에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어요.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요.”

       

       “읏?!”

       

       내가 했던 말을 다시 번복하는 듯한 발언에 흠칫 놀라는 이브.

       

       이건 진심이다. 이브만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브 또한 내가 보듬어야 할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전생을 합친 내 나이의 50배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할…아니, 어르신…으음. 아무튼 장생종이라도 그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이브는 내 새끼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브의 머리를 끌어안은 팔에 약간 힘을 주었다.

       

       “이브 씨가 싫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단순히 지금 이브 씨와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지.”

       

       “그럼 나중에는 다르다는 소리인가요?”

       

       “당연하죠. 일단 그때는 제가 어른이잖아요?”

       

       “아…워낙 어른스러우신 분이라 제가 요나 씨의 나이를 신경 쓰지 못했네요.”

       

       하긴. 미성년자와의 결혼은 세간의 지탄을 받을 수 있으니 참아야지(X)

       

       키잡 각이 날카롭군(O)

       

       혼자 또 망상 회로를 굴리기 시작한 이브에게 잠깐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브 씨 말고 다른 사람도 있어요.”

       

       “다, 른 사람? 그게 무슨….”

       

       NTR 멈춰!(X)

       

       3P…가능!(O)

       

       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음란엘프의 길쭉한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다른 여자가 있거든요. 그리고 이브 씨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고요.”

       

       “……!”

       

       이제 좀 상황이 파악됐는지 헛숨을 들이키는 이브.

       

       그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미처 숨기지 못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요. 제 아랫도리가 좀 바빠서.”

       

       “……?”

       

       아차! 적당히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이브가 너무 솔직하게 반응하니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흑화하면 전부 요나 탓이야!

    그나저나 이번 가챠는 좀 미묘했네요.

    블아 이치카를 천장 친 대신 니케 베이를 20연차만에 먹다니…

    뭐어. 플러스 마이너스 평균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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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9

EP.79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내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다오(X)


       


       마! 함 대주라!(O)


       


       어지러운 번역기 내용을 한차례 곱씹고는 빵긋 웃었다.


       


       “싫은데요?”


       


       “…에?”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청한 소리를 내는 이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을 이해했는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다.


       


       “어, 어째서죠?!”


       


       “어째서냐니. 그야….”


       


       “전직이라고는 하나 저는 여왕이었습니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러지 않았을 뿐,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어요.”


       


       “권력은 저도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데요? 일단 성자 비슷한 거라.”


       


       “그, 그럼 돈은 어떻습니까? 저는 수완이 부족해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다른 엘프들은 아니잖습니까. 제가 요청하면 다들 아낌없이 골드를 내어줄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근데 전 대륙의 엘프가 모은 돈보다 신전이 모은 돈이 더 많지 않을까요?”


       


       “큭….”


       


       “뭣보다 저는 돈 때문에 결혼하는 속물이 아닌데…이브 씨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조금 슬프네요.”


       


       “아, 아니에요! 세계수께 맹세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흐응. 뭐, 그거야 그렇다고 치죠. 하지만 어찌됐건 제가 이브 씨와 결혼할 이유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잖아요.”


       


       “그건….”


       


       입술을 우물거리다 결국 두 눈 꾹 감고 외치는 이브.


       


       “허면 외모는 어떻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참 뭐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저는 엘프 중에서도 한층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다 자신합니다만.”


       


       “와…돈 다음은 외모라. 이거 조금 전에 한 말 그대로 적용되는 거 아시죠? 제가 돈만 보고 결혼하는 사람이 아니듯, 얼굴만 보고 결혼하는 사람도 아니랍니다.”


       


       “……!”


       


       아예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푸욱 숙인 이브.


       


       물론 외모는 큰 고려 사항이고, 이브 정도면 얼마든지 웰컴이지만…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순서의 문제라는 게 있지 않나.


       


       이브의 서열은 기껏해야 3위에 불과하다…!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브를 아래에서부터 올려다보았다.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얼룩진 표정. 이에 한쪽 입꼬리를 히죽 끌어 올렸다.


       


       “어쩌면 이브 씨 말대로 제가 운명일지도 모르죠. 저 말고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이브 씨의 사정 아닌가요?”


       


       “…….”


       


       “물론 이브 씨의 사정은 딱하답니다. 하지만 동정심만으로 제가 이브 씨를 위해 인생을 바쳐야 하는 건 아니죠. 제게도 목표가 있고 사정이 있으니 말이에요.”


       


       “…….”


       


       그래. 이브가 모솔아다답게 분위기를 타고 급발진하긴 했지만, 이쯤이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분위기와 상황에 취해 나한테 프러포즈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뭐어. 솔직히 말해선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남녀역전 세계인 판 대륙에서 여자의 외모는 가치 있긴 해도 그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수준은 아니지만…적어도 내겐 중대 사항이니까.


       


       이브 정도 되는 여자가 나밖에 없다며 돈이고 권력이고 다 내어줄 테니 결혼해달라고 하는데 싫을 리가 없잖은가.


       


       다만, 아까도 말했듯 내게는 이 세계에 뿌려둔 암울한 복선을 처리한다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미궁 최심부에 있는 사랑의 여신과도 대면해 보고 싶고.


       


       이제 막 1층을 공략한 지금 시기에 이브에게 묶일 수는 없다.


       


       이브가 나를 구속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나란히 왕과 여왕이 되어 복권하건, 은퇴한 채로 상징적 존재가 되어 놀고 먹건 확실한 건 내 여정은 거기서 끝이라는 소리다.


       


       아무리 엘프 사회에서 여왕의 존재감이 낮아지고, 세계수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지만 그렇다고 왕 혹은 여왕의 부군이 미궁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지켜볼 리 없잖은가.


       


       그런 이유로 여기서 이브의 계획을 단념시킨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내 손으로 흑화시킬 수도 있으니 적당히 여지는 줘야겠지만.


       


       손을 뻗어 이브의 얼굴을 붙잡았다.


       


       몰랑.


       


       부드러운 뺨의 감촉. 젖살 없는 갸름한 얼굴선이지만, 그냥 피부 자체가 부드럽다.


       


       당황스러워한 이브가 조심스레 눈을 뜬다. 뜬다고 해봤자, 아예 감고 있던 것이 평소의 실눈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 상태에서 살짝 각도를 조절하여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브 씨. 피하지 말고 저를 봐주세요.”


       


       “저, 저는….”


       


       “알아요 알아. 그동안 많이 외로웠던 거죠? 상황이 이브 씨를 그렇게 몰아갔을 거예요.”


       


       “알아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세계수께서는 엘프의 미래를 위해 영면에 드셨고, 살아남은 엘프는 실의에 빠진 와중에 이브 씨는 세계수께서 안배한 여왕으로서 이 암울한 상황을 타파해야 했을 거예요. 그때는 이브 씨도 어렸을 테니 쉽지 않았겠죠.”


       


       “그랬죠…제가 많은 것을 타고나긴 했으나, 경험까지 타고나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경험까지 쌓은 지금의 내게 약점은 없다(X)


       


       설마 이런 나도 용서해 주는 건가…?(O)


       


       음. 이브어 번역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소리겠지.


       


       달리 말해 멘붕 상태에서 조금 회복했다는 뜻이다.


       


       은근슬쩍 이브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한 종족의 명운을 홀로 짊어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죠. 진실을 본다는 게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닐 테고요. …무엇보다 그 고통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는 게 이브 씨의 가장 큰 슬픔이었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무릇 여왕이란 고고한 존재여야 하기에.”


       


       이해는 고맙지만 연민은 곧 모욕이다.(X)


       


       이 남자. 침대에서도 내 취향을 이해해 줄까?(O)


       


       진짜 머리속에 마구니 밖에 안 들은 거니 이브이브야….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천 년 동안 참고 살았으면 그럴 수도 있다 여기며 감싸고 있던 이브의 머리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천천히 내려오는 머리. 하지만 목의 구조상 더는 꺾이지 않는 각도까지 꺾이자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내게 맞춰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브를 끌어당겼다.


       


       나보다 높았던 시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비슷해지더니, 이제는 좀 더 낮아졌다.


       


       여왕의 품위를 상징하듯 꼿꼿했던 허리는 구부러졌고, 무릎은 이미 바닥에 꿇어앉은 상황.


       


       아까는 내가 올려다봤지만, 이제는 이브가 올려다보는 구도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브 씨가 제게 집착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하지만 안 돼요.”


       


       “그럼 저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이 기나긴 삶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로…?”


       


       차라리 희망을 모르고 살았다면….(X)


       


       이렇게 된 거 그냥 눈 딱 감고 납치해 버려?(O)


       


       세상에.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사실 이브가 흑화한 이유는 주인공에게 집적대다가 차여서 그런 게 아닐까??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나름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렸고, 지금은 고전적인 엘프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이브가 아무리 그래도 차였다고 흑화하겠나 싶었는데….


       


       이렇게 번역기 내용을 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경악을 숨기듯 이브의 머리를 잡아끌어 그대로 끌어안았다.


       


       내 가슴팍에 묻히는 이브의 얼굴. 예상치 못한 이벤트인지 움찔거리는 그녀의 연녹색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마치 사고 친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것처럼.


       


       천천히 잦아드는 이브의 떨림. 완전히 진정한 뒤에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어요.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요.”


       


       “읏?!”


       


       내가 했던 말을 다시 번복하는 듯한 발언에 흠칫 놀라는 이브.


       


       이건 진심이다. 이브만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브 또한 내가 보듬어야 할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전생을 합친 내 나이의 50배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할…아니, 어르신…으음. 아무튼 장생종이라도 그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이브는 내 새끼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브의 머리를 끌어안은 팔에 약간 힘을 주었다.


       


       “이브 씨가 싫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단순히 지금 이브 씨와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지.”


       


       “그럼 나중에는 다르다는 소리인가요?”


       


       “당연하죠. 일단 그때는 제가 어른이잖아요?”


       


       “아…워낙 어른스러우신 분이라 제가 요나 씨의 나이를 신경 쓰지 못했네요.”


       


       하긴. 미성년자와의 결혼은 세간의 지탄을 받을 수 있으니 참아야지(X)


       


       키잡 각이 날카롭군(O)


       


       혼자 또 망상 회로를 굴리기 시작한 이브에게 잠깐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브 씨 말고 다른 사람도 있어요.”


       


       “다, 른 사람? 그게 무슨….”


       


       NTR 멈춰!(X)


       


       3P…가능!(O)


       


       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음란엘프의 길쭉한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다른 여자가 있거든요. 그리고 이브 씨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고요.”


       


       “……!”


       


       이제 좀 상황이 파악됐는지 헛숨을 들이키는 이브.


       


       그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미처 숨기지 못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요. 제 아랫도리가 좀 바빠서.”


       


       “……?”


       


       아차! 적당히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이브가 너무 솔직하게 반응하니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흑화하면 전부 요나 탓이야!


    그나저나 이번 가챠는 좀 미묘했네요.

    블아 이치카를 천장 친 대신 니케 베이를 20연차만에 먹다니...

    뭐어. 플러스 마이너스 평균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죵?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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