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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9

       또각. 또각.

         

       잘 익은 밀밭을 연상시키는 금발의 여성이 걷고 있다. 달빛이 비치는 복도에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진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자 겉만 봐도 특이한 아지랑이 문양의 여닫이문이 등장했다.

         

       덜컥!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방에서 창밖의 만월을 바라보고 있는 한 노인이 나타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킬킬킬, 뭐가 말인감?”

       “그 여자가 말도 안 되게 성공하고 있잖아!”

         

       금발의 여자는 노인에게 다가가며 윽박질렀다.

         

       “이전에 암살자를 보냈던 것도 하찮은 놈들만 보내고, 날 도와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벌레 하나 기어가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방에서 금발의 여자가 쩌렁쩌렁 소리치자 목소리가 복도까지 이어졌다.

         

       “킬킬킬. 말소리 좀 줄이지?”

       “크읏.”

         

       금발의 여자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조곤조곤 말했다.

         

       “아무튼. 일은 어떻게 된 건데?”

       “걱정할 거 없수. 내 알아서 잘 할 테니.”

         

       탁! 금발의 여자가 한쪽 발을 내려찍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알아서 잘 한다는 게 이 모양이야? 죽이기는커녕 코털 하나 건드리지 않았잖아!”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양쪽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가며 눈이 붉은빛으로 빛났다. 그 미소에 금발의 여자는 뒷걸음질 치며 움츠러들었다.

         

       “때를 기다리라니까.”

       “…….”

         

       영 못마땅한 금발의 여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 이상은 못 참아. 직접 움직여서라도 결혼식 이전까지 처리해.”

         

       쿵! 금발의 여자가 거세게 문을 닫으며 나갔다. 워낙 조용한지라 복도에서 나는 구두 소리가 방안에서도 들려왔다.

         

       “킬킬킬.”

         

       노인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시건방진 년.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어딜 와서 으름장이야?”

         

       파이프형 담배를 들고 손가락에서 피어나온 불을 붙인다. 후, 하고 나오는 뿌연 연기가 구수한 냄새를 뿌리며 창밖으로 흩어졌다.

         

       “이 할미는 그저 계약을 이행하는 도중이란 말이야. 킬킬킬.”

         

       노인은 금발의 여자를 연상하며 한껏 비웃었다. 진실도 모르고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다니. 이 어찌 우매한 여자인가.

         

       “성녀라고 해서 머리가 똑똑한 건 아니여.”

       

       한껏 비웃던 노인은 숨을 고르고 만월을 응시했다.

       

       “그래도 슬슬 시련을 줄 때가 됐지. 진 바렌베르크가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해야겠구먼.”

       

       사라락. 노인의 손가락에서 피어나온 청록의 마력이 별 가루처럼 흩뿌려지더니 종이에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놈의 힘이라면 모옥이 적당하겠지.”

         

         

       * * *

         

         

       덜컥. 프란체는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사각사각. 조용한 집무실 안에서 백색소음만이 울려 퍼진다. 어찌나 조용한지 숨소리까지 들려올 지경이었다.

         

       “공작님.”

       “프란체냐.”

       “네.”

         

       프란체는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이전에 얘기했던 사업의 지원금을 하사받기 위해 왔습니다.”

         

       사각거리는 소음이 멈췄다.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봤다.

         

       “그래.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했지. 얼마가 필요하더냐?”

         

       프란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70억입니다.”

       “70억?”

       “그렇습니다.”

       “무슨 사업인데 70억이나 들어가지?”

         

       공작의 눈썹이 좁혀졌다. 70억은 제국에서 하사받은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가에서 큰돈은 아니다.

         

       다만, 보통 사업을 시작할 때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좀 많다.

         

       “제국 각지에서 땅을 사들이고, 그곳에 제 매장을 더 지으려고 합니다. 저희 의류점이 독점하기 위해서요.”

         

       고개를 세우고 턱을 어루만지는 공작. 잠깐의 시간 동안 고민을 끝마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다의 독점을 막았으니 이제 새로운 독점을 하겠다는 건가. 그래, 나쁘지 않군. 기존 활동비에 70억을 추가하겠다.”

         

       프란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목적을 끝마친 프란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런데 나가려던 순간.

         

       “프란체.”

         

       공작이 불러세웠다. 프란체는 무표정으로 뒤돌아 공작을 바라봤다.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니다.”

         

       얼굴에 의문부호가 가득해진 프란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집무실을 나갔다.

         

       ‘왜 저래?’

         

       집무실에 갈 때마다 반응이 이상하다. 무슨 생각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인제 와서 달라지기라도 하려고?’

         

       피식. 비웃음이 나오며 프란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양심이 있어야지.’

         

       후우, 프란체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휘저었다. 최근 일도 잘 되고 있고,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데 기분을 망칠 수 없지.

         

       그렇게 방으로 가려던 그때.

         

       “프란체.”

         

       이번에는 에덴과 마주쳤다. 이 가문의 남자들은 어째서 자신을 불러놓고 무표정을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근에 안 보인다 싶더니.’

         

       잔뜩 찡그려지려던 미간을 애써 제어하며 미소를 지었다.

         

       “소 공작님, 무슨 일이신지요?”

       “…….”

         

       답이 없다. 이 사람의 속내는 알 수가 없다. 진도 그렇지만, 남자들은 이런 타입이 많은 건가?

         

       “라인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던데.”

       “…라인 공자님이요?”

         

       라인이 언급됐다. 혹시 저주가 잘 통하지 않았던 건가? 프란체는 숨을 죽였다.

         

       “너의 얘기를 꺼내니 몸이 바짝 경직돼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더군. 무슨 일 있었나?”

         

       에덴의 말에 프란체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저주가 완벽하게 통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라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줬다는 게 기쁨으로 다가왔다.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프란체.

         

       “음… 아니요? 딱히 별일 없었네요. 라인 공자님이 절 너무 싫어하셔서 제 이름도 듣기 싫었던 게 아닐까요?”

         

       약간의 비꼼이 섞인 프란체의 말. 에덴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딱히 트집은 잡지 않았다.

         

       “그런데 제 얘기는 왜 꺼내셨나요?”

         

       프란체는 이게 걸렸다. 자신을 극도로 싫어하는 둘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의문도 의문이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최근에 네가 사업으로 성공했잖나. 그래서 라인에게 압박을 좀 주었다. 너도 뭔갈 해야 하지 않겠냐고.”

         

       에덴은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며 말을 이었다.

         

       “이 얘기 말고는 안 했다.”

       “…그러신가요?”

       “그래. 나는 앞에서 꺼내지 못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않는다.”

         

       거 참 좋은 말을 하시네요. 라고 말하며 혀를 차고 싶었지만, 프란체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용건은 끝났다. 이만 가보거라.”

       “…….”

         

       프란체는 고개를 숙이곤 방으로 돌아갔다. 공작도 그렇고, 라인도 그렇고, 에덴도 그렇고. 시종들도, 연무장의 기사들도.

         

       이 집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싫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말을 잘 듣는 헬레나가 있으려나.

         

       ‘나는 진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아.’

         

       프란체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헬레나가 다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 공녀님, 오셨어요?”

       “그래.”

       “바로 차를 준비할게요!”

       “오늘은 무슨 차니?”

       “홍차예요!”

         

       홍차는 프란체가 가장 좋아하는 차다. 헬레나는 곧장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달그락. 마법서를 무릎 위에 두고 홍차를 음미하는 프란체.

         

       “헬레나.”

       “네, 넷?”

       “최근 진과 얘기한 적 있니?”

       “어, 없습니다!”

       “정말로?”

         

       프란체는 눈을 얕게 뜨고 살기를 담아 헬레나를 응시했다.

         

       “저, 절대 하지 않았어요…….”

       “저번에 한 거 같던데.”

       “그, 그건 대화가 아니었어요!”

       “흐응.”

         

       그제야 살기를 거둬들이는 프란체. 헬레나는 오들오들 떨며 시선을 피했다.

         

       “너무 그리 겁먹지 말렴. 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종이니까.”

         

       달그락. 프란체는 찻잔을 내려놓으려 말을 이었다.

         

       “네가 진만 건들지 않는다면 나는 항상 네게 호의적일 거야.”

         

       헬레나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이만 가보렴.”

       “네!”

         

       헐레벌떡 잡힐세라 나가는 헬레나. 문이 닫히고 프란체는 한동안 문을 바라봤다.

         

       “…….”

         

       프란체가 헬레나를 이리 견제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진이 헬레나를 여자로 보고 있다.

         

       이전에 문 앞에서 나눈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둘 사이에서 분위기가 붉었다고 해야 하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해.”

         

       헬레나는 사파이어와 같은 푸른 눈과 찰랑거리는 흑색의 머리가 매력적이다.

         

       청초한 분위기와 이목구비마저 완벽하니 평민이라곤 믿을 수 없는 외모.

         

       ‘조심하지 않으면 둘 사이에서 뭔가 생길 거야.’

         

       프란체는 알고 있었다. 진은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지 않다고.

         

       그러나 헬레나는 달랐다. 그때 진의 목소리와 둘 사이에 생겨났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뿌득. 자신도 모르게 마법서를 꽉 쥐어버렸다.

         

       “아.”

         

       너무 흥분했나. 순간적으로 열이 오른 프란체는 고개를 휘젓곤 홍차를 마시며 평안을 취했다.

         

         

       * * *

         

         

       “카자르. 그 고대 마법서에서 건질 만한 마법은 없었나?”

         

       열심히 고대 마법서를 들여다보던 카자르가 안경을 벗곤 고개를 휘저었다.

         

       “없네요. 그나마 기존에 없던 특별한 마법 몇 개?”

         

       아직도 해결 방법은 없는 건가. 저 고대 마법서도 거의 다 해독한 상태다. 아직도 나오지 않은 걸 보면 가망성은 없겠군.

         

       “아쉽군.”

       “아직 몰라요. 다 해독한 게 아니니까.”

         

       카자르는 다시 안경을 쓰고 룬 문자 해독에 들어갔다.

         

       “근데 특별한 마법 몇 개는 뭐야?”

       “절대 공녀님에게 들키면 안 되는 마법이요.”

         

       순간 눈이 번뜩였다.

         

       “설마 영혼을 제어하는 마법인가?”

       “맞아요. 공녀님이 찾던 마법도 여기 있더라고요.”

         

       괜히 가져왔나…….

         

       하지만 저 고대 마법서를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터질지도 모를 프란체의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이나 내 증상을 해결할 가망성이 있었으니.

         

       “…다른 건 뭐가 있었는데?”

       “시간과 공간이 관련된 마법이요.”

         

       카자르는 고대 마법서의 페이지를 비교하며 그려진 마법진을 비교했다.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이 시간과 공간 마법이 당신에게 새겨진 마법진과 상당히 비슷해요.”

         

       그러고는 내게 손짓을 하더니 “이쪽으로 와보세요.”하곤 말을 이었다.

         

       “자, 보세요. 이게 시간 관련 마법진이고.”

         

       팔락. 페이지가 몇 개 넘어갔다.

         

       “이게 공간 관련 마법진이에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개가 완전 다르게 생겼는데?”

         

       시간 마법진은 16개의 획이 지렁이처럼 꼬여 형태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공간 마법진은 20개의 획이 각진 상태로 일정한 규칙을 유지하며 만들어져있다.

         

       둘의 차이가 명확하다.

         

       “자, 이것만 보지 마시고. 제가 진 씨의 몸에서 확인한 마법진을 그려볼게요.”

         

       카자르는 내 등에 손을 얹고 마력을 흘려보내더니 다른 한쪽 손으로 종이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신기한 재주도 있어.

         

       “제가 그린 걸 보고, 앞에서 보여드렸던 마법진을 합쳐보세요.”

         

       나는 눈알을 굴려 가며 세 개의 마법진을 비교했다.

         

       “음?”

         

       카자르가 그린 마법진은 시간과 공간의 마법진의 중요한 특징을 섞어서 만든 듯한 느낌이 있었다.

         

       “비슷하죠?”

       “그렇네.”

       “특히 이 부분이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특히나 내 몸에 새겨졌다는 마법진과 닮아있었다.

         

       삼각형으로 각진 부분을 흐물거리는 지렁이가 관통하며 기어가는 듯한 모양.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이것만 보면 진 씨에게 새겨진 마법진은 회귀와 이동의 마법진이에요. 시간을 되돌리고, 차원을 이동하는 마법이죠.”

         

       일순 등줄기에 천둥이 친 것처럼 뻣뻣하게 올라왔다.

         

       “회귀와 차원 이동의 마법진이라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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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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