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793

        

         

       심마(心魔)란 무엇이냐?

       사람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멀리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 갈래로 뻗쳐야 할 생각을 하나로 만들고, 거센 물줄기와 같은 지혜를 뚝뚝 끊기게 만들어 가뭄철 개울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마란 빠진 이로 하여금 쩍쩍 갈라진 사막 위에서 햇볕에 괴로워하는 여행자가 그러하듯이, 한 모금의 물만을 간절히 바라며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사흘을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된 사람이 보석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선다 한들 그것이 제대로 보이기나 하겠느냐? 그 보석으로 가득 찬 방 안에 흙탕물 한 모금이 고여있다면, 과연 그 물 한 모금보다 보물을 먼저 선택할 수 있겠느냐?

         

       새까만 밤 속에서 산을 헤매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하다면 그 사람이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자신이 밟고 있는 발아래에 어떤 아름다운 꽃이 있을지, 이곳의 풍경이 어떨지 잠시라도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평소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을 자연의 소리는 자신을 위협하는 산짐승이나 초자연적인 무언가로 여겨지게 될 것이요, 발아래에 있는 것들은 생김새가 어찌 되었는지는 관계없이 내가 헤치고 지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지, 혹 푹 꺼져서 자신을 넘어뜨려서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지 않을 것인지 걱정하게 할 것이다. 그러고는 오직 산을 벗어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게 할 것이겠지.

         

       심마란 그런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유를 없애고 하나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온 힘을 다하여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정성이 나쁘다고 한다면, 장인의 손길 역시 나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극한 정성으로 목표에 다다르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님이라.

       하지만 부족함도 과함도 모두 문제가 되는 법.

       부족하다면 목적지에 다다를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되기 마련이고, 과하다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거나 설령 도달하였다고 할지라도 도달하지 못한 것만 못하게 될 수도 있음이니.

         

       ‘심마란 벽이요, 드리워진 밤이요, 들끓는 감정이요, 어두워진 눈이다.’

         

       피에르가 든 심마란 그런 것이다.

       과해서, 너무나 과해서 문제가 되어버린 것.

       방의 어둠을 밝힐 불이면 족했을것을 장작을 잔뜩 집어넣어 집을 활활 불태운 것이며, 조금 넣으면 약이 되기에 충분한 것을 이것저것 죽어라 집어넣어서 기어코 맹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무얼.

       거창하긴 하지만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능력자를 예시로 들 필요조차 없다.

       심마라는 것은 크건 작건 모든 사람이 겪어보는 일이었으니까.

       주화입마에 들게 만들어야만 심마인가? 미치게 만들어서 마력 회로를 전부 박살을 내버려야만 심마인가? 신앙에 의문이 들고 회의감이 들게 만드는 것만이 심마인가?

       그렇지 않다.

         

       심마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온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더 나아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

       어떠한 일을 행함에 있어 맞이하는 어떠한 장애물.

       그것은 정말 가볍게 ‘뭐, 추억일 뿐이지.’라고 읊조리는 것만으로 극복할 수 있기도 하고, 평생을 매달려서 궁구해야 할 화두와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저 그뿐이다.

       피에르라는 주술사는, 조금 거창하고 질긴 심마에 지배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쉬이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대단한 식물의 씨를 뿌린다고 할지라도 처음에 나오는 것이 새싹이듯이, 그의 심마 역시 그처럼 별것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에 이르러서 피에르의 심마는 너무나 커다랗게 변했고, 마치 사이비 종교에 들어간 엘리트들이 그러하듯이 오류를 스스로 고쳐가면서 점점 무결하게 만들어 제 몸을 제가 엮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실수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하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자신뿐이듯, 심마 역시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법이거늘.’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호르몬만 달라져도 휙휙 뒤바뀌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다.

       매일매일 햇볕을 쐬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변화하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걷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도 분비되는 호르몬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맞는가?

       호르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제가 통제하고 분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진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장 육체만 하더라도 이러하거늘.

       정신과 영혼으로 간다면 얼마나 복잡할 것인가.

         

       ‘그러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일 것이다….’

         

       그러하다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무엇인가?

       피에르의 입장에서 최선은 자신이 찾았다고 말하는 ‘실마리’를 연구하는 것일 것이다.

       아마 그것은 존재와 인식에 대한 것.

         

       ‘이 도시의 과반수를 복제인간으로 채울 생각일 것이다.’

         

       박진성은 피에르가 대략 무슨 일을 벌이려 할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입 밖으로 낸 거울, 그림자, 인식, 존재라는 단어.

         

       그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타자(他者).

       인식할 다른 주체의 필요성.

       

       그림자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거울상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 홀로 존재하고 나 홀로 보았는데 어찌 다른 이가 필요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묻나니, 거울에 비친 모습과 그림자가 진정으로 자신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에게 비롯된 것이되 자신과 분리된 것이며, 자신을 비추고 있되 완벽하게 자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시점부터 다른 것이 되었고,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타자(他者)…즉, ‘본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본체가 존재하고, 본체가 인지하고 나서야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

       그림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자신의 뿌리이되 타자(他者)가 아닐 이유가 무엇이 있을 것이냐?

         

       피에르가 하려는 것 역시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원본의 인간이 뿌리라고 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인간은 그 그림자.

       하지만 그 그림자를 진실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허상인 줄도 모르고 다가갔다가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Νάρκισσος)처럼, 허상과 합일되는 그 순간 제 존재의 의의를 잃고 그대로 소멸하게 될 것인가?

       하지만 본체가 없어진 시점에서 남아있는 것은 하나인데, 그렇다면 그것을 진정으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가? 본체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그림자를 두고 그것이 진실이라 하지 않을 이유가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그것이 진본이라고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녕 뿌리와 같지 않다면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피에르의 실험은 바로 이러한 화두에서 착안한 것일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알 수가 없느니. 그림자와 진짜의 차이를 연구하려는 것인가? 그림자를 진짜로 탈바꿈한 뒤 그림자가 생기는지를 알려고 하는 것인가? 혹은 그림자의 그림자를 원하는 것인가? 진실과 꼬리 무는 가짜의 차이를 연구하려는 것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저 실험과 엮을 수 있는 화두는, 결과물은 무궁무진하였으니까.

       특히나 ‘그림자’라는 주제로 한정을 지어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면.

         

       ‘과반수.’

         

       피에르 마틴은 이 도시에 있는 사람의 과반수가 복제인간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어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실체 있는 것들의 인식에 의한 그림자의 변화를 살펴보았다면, 실체 있는 것들의 영향을 받은 과반수의 그림자의 인식으로 실체 있는 것들이 어찌 변화하는지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로 여러 개를 할 수 있는데 굳이 하나만 하는 것은 낭비다.

       심지어 그것이 특별한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계속 진행하고 있다면 자연히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심마가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저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허허허. 그렇게 된다면 이 도시는 주술사 한 명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셈이로구나.’

         

       그쯤 되면 이 도시는 말 그대로 피에르의 것이 될 것이다.

       마치 그림자로 공연하는 예술가처럼 도시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겠지.

         

       다른 사람들?

       그들은 관중이 될 수도, 다른 ‘그림자’들처럼 복제인간이 될 수도, 혹은 다른 어떠한 것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직접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피에르의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겠지….

         

       ‘흐음. 흥미로운 실험이기는 하지만….’

         

       박진성은 피에르의 의도를 짐작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환하게 빛나는 형광등을 보았다.

         

       슬슬 갈 때가 된 것인지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형광등의 불빛.

       안에는 벌레가 들어가서 죽기라도 한 것인지 거뭇거뭇한 점들이 가득하다.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어….’

         

       박진성에게 있어서 피에르의 실험이 바로 저것과 같다.

       별빛처럼 빛을 내기도 하고 반짝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비할 바가 되지 아니하며.

       새까만 벌레들이 있으나 별 사이의 어둠과도 관련이 없는 것.

         

       한순간 흥미를 보일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것.

       그것은 길이 다르기 때문인가, 피에르 마틴의 실험이 정말로 의미가 없기 때문인가?

         

       모른다.

       그것은 의문을 떠올린 박진성조차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해답이라는 것은 주위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마틴이 그토록 갈구하는 그림자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심마에 빠진 그림자여, 피에르 마틴이여.’

         

       피에르 마틴의 실험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다음화 보기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