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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헤를라인 교수가 나를 도서관에 출입시키려 했을 때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학생증이나 교직원증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전속 노예도 가능하나요?”

       “아카데미에 적이 없다면 안 됩니다.”

         

       나는 하스펠트 교수의 소속이었지, 아카데미 자체 소속은 아니라는 것. 정 안 되면 다른 곳에서 문의를 해 보라는 경비의 말을 듣고는 학사팀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법적으로 노예는 신분 인정이 안 됩니다.”

       “그러면요?”

       “임시 통행증 발급도 불가능합니다.”

         

       존나 통탄할 노릇이다. 도서관은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나는 일반 시민만도 못한 노예였지. 자꾸 원래 세계 기준에서 생각하려고 하니까 앞뒤가 안 맞는 것이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네. 나 혼자 들어갔다 올 테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

         

       헤를라인 교수는 그리 말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책과 남학생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니. 도서 대출은 그렇다 쳐도, 뜬금없이 남학생은 왜 데리고 온 건지.

         

       “선…. 조수님!”

         

       적색 머리칼과 홍안. 로르웰이다. 성씨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에서 가문은 필요 없으니 어물쩍 넘겨도 괜찮겠지.

         

       로르웰의 품에도 책이 몇 권 들려있었다. 우리는 적당히 마실 걸 산 뒤 근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헤를라인이 들고 온 책으로 향했다.

         

       책 종류는 제각각이었다. 국어, 수학, 역사, 마법 등등. 연금술이나 기초적인 스크롤 작성, 마법사가 전투를 할 때 임해야 하는 자세에 대해 적어놓은 도서도 있었다.

         

       “헤를라인 교수님은 조수님과 아는 사이세요?”

       “조수? 아, 그렇구나.”

         

       헤를라인은 나에게 책을 훑어보라고 전한 뒤 로르웰의 질문에 대꾸했다.

         

       “그렇지. 얘 입학을 좀 도와주려고.”

       “입학이요? 이미 졸업하신 거 아니었어요?”

         

       로르웰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내가 학부 졸업생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척 보면 모르니? 너희 둘이 또래잖아.”

       “…….”

         

       헤를라인 교수님. 사람은 액면가로만 판단하시면 안 된다고 제가 며칠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아이고, 말씀 안 드렸구나!

         

       “어쨌거나 틸레트 입시는 까다롭기로 유명하잖아?”

       “특히 필기가……. 좀 그렇죠.”

       “필기가 어려운 건 옛날부터 유구한 전통이었어. 이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실전에서도 밀린다나 뭐라나. 그것 때문에 실기를 잘 보더라도 떨어질 수 있고. 아무튼 이 조수님께선 앞으로 3달 안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만들어야 해.”

       “그만한 공부를…. 3달 안에 다 끝낼 수 있나요?”

         

       그 물음에 헤를라인이 나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저번처럼 초콜릿을 주려는 건 아니고, 그냥 이쪽을 가리키는 모양새였다.

         

       제스처를 받아든 로르웰은 ‘아’ 하고 짤막한 탄식을 흘렸다.

         

       “조수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그냥 가능한 수준도 아니고 천장 뿌실걸? 실기 때문에 수석은 무리여도 차석은…….”

       “부담이 너무 심한데요.”

         

       틸레트 아카데미의 입시는 지옥불 수준이다.

         

       기껏해야 수백 명을 뽑는데 수십만 명이 지원하니까. 신분 상승을 노리는 평민이나 중인 말고도, 각국의 귀족이나 왕족 또한 경쟁자다.

         

       아무래도 마수와의 전쟁에서 최전방에 있는 나라니까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단위로 노는 영재들을 사이에서 합격하라니, 보통 난이도가 아니었다. 저쪽 세계로 치면 아이비리그나 옥스브릿지에 합격하라는 소리잖아.

         

       “너도 여기서 3년을 보냈으니까 알 거야. 틸레트의 입시는 필기 400점 만점에, 실기 100점 만점으로 이루어져.”

       “필기가 관건이겠네요.”

       “글쎄. 넌 실기가 난관일 거야. 마력초 없인 마법을 못 쓰는 종족이잖아?”

       “전투마도 시험 땐 피워도 된다고 들었는데요.”

       “딱 그게 다야. 거기서 웬만큼 점수 못 따면 과락 먹는다?”

         

       실기는 다들 웬만큼 봐서 절대평가에 가깝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과락 기준이 빡센 편이다. 100점 만점에 40점 미만으로 받으면 필기를 얼마나 잘 보든 상관없이 떨어뜨린다.

         

       100점 중에 40점 맞는 게 뭐가 어렵냐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재작년에 봤던 수험생들을 보고 깨달았다. 이 학교 실기에서 10점이라도 받을 실력이면 다른 아카데미 정문은 부수고도 남는다는 걸.

         

       “긴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여기 학교에서 참고하라고 내준 도서가 있으니까 잘 보고 공부해 둬. 실기 실습은 나중에 내가 특별히 지도해 줄 테니까! 알겠지?”

       “…그거 입시비리로 안 잡혀가요?”

       “이게 비리야? 왜?”

       “아니, 그야 입사관이 인맥으로 학생을 도와주면…….”

       “너 모르는구나. 귀족들은 다 그런 식으로 알음알음 도움받아서 들어와.”

         

       맞다. 여기 원래 세계 아니었지.

         

       이젠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헤를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헤를라인과 면담을 가장한 입시 컨설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하스펠트 교수가 연구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화내는 눈빛은 아니다. 분노 게이지를 채우는 자세도 아니었다. 하지만 들고 있는 마전지 숫자를 보면 나를 조져버리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헤를라인과 면담은 잘 끝났나요?”

       “네.”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이렇게 오래 걸린 건지 말해보세요.”

         

       기출문제다. 반드시 이거 물어볼 줄 알았다.

         

       “먹을 걸 사주셨습니다.”

         

       마실 걸 받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학업에 관한 토론을 나누고 왔습니다.”

         

       입시도 학업이니까 이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요. 자세한 건 나중에 메리가 에게 물어보면 되겠죠. 그보다도.”

         

       터엉─!

       

       그녀가 들고 있던 마전지 묶음을 책상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마전지 첫 장에는 채 완성되지 않은 회로가 그려진 채였다. 그 위쪽의 짤막한 공간에는 ‘플레어’라는 글씨가 적혀있고.

         

       최상급 화계마도인 ‘체이서 플로우’ 스크롤을 작성해 오라고 시켰을 때와 상황이 비슷했지만, 분명 난이도가 더 높은 녀석일 것이다. 이번 건 원래 만들어져 있던 스크롤을 복사하라는 요구 같은 게 아닐 테니까.

         

       “완성해 오세요. 가능하면 석 달 이내로.”

         

       육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불가능하다.

         

       절대로 세 달 이내에 해내지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연구하면 어떻게든 기한 내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것까지 하면서 입시를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필기에는 마도이론만 있는 게 아니다. 국어, 수학, 역사까지 총 네 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수학은 그렇다 쳐도, 국어나 역사는 다시 공부해야 할 텐데.

         

       이세계 빙의 특전으로 언어 치트를 받았으니 백번 양보해서 국어는 어떻게든 된다고 치자. 역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생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다른 세계의 근현대사를 처음부터 익혀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결국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일단 알았다고 대답한 뒤 마전지를 받았다.

         

       물론 마감기한은 석 달을 주셨으니까 느긋하게…….

         

       안 할 생각이다.

         

       **

         

       그 뒤로 클라이스가 에테르에게 물어본 건 트랜지스터의 사용법 정도가 전부였다. 혹시 1학년에게 트랜지스터 마석을 보여준 적 있냐고 질문했는데,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기에 딱히 추궁할 거리도 없었다.

         

       ─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알리는 편이 더 와닿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에테르는 딱 그렇게 말했다. 거기까지 계산했다면 보통 머리 좋은 게 아니리라. 자신의 동선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클라이스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마쳤다.

         

       조수에게서 배운 트랜지스터라는 마석은 잘 써먹고 있다. 그냥 써먹는 수준도 아니고, 다른 마석 대용으로 쓸 정도로 금세 그 매력에 중독되고 말았다. 회로를 작성할 때 막히는 부분에 꽂으면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었으니까. 어느덧 클라이스는 이 마석을 만능으로 여기게 되었다.

         

       트랜지스터는 마력 전도성 또한 다른 마석보다도 월등했다. 이 점을 활용한 클라이스는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초급 스크롤에서조차 70 시버트가 넘어가는 출력을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실로 사기적인 소자였다. 오죽하면 왕창 사다가 쟁여놓고 싶을 정도로.

       

       “…대단하군요. 상당한 가치를 지녔어요.”

         

       그제야 깨달았다. 조수가 왜 이걸 최대한 매입해 놓으라고 당부했었는지.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반드시 생겨난다. 그게 재화 시장에서의 기본적인 법칙이었다.

         

       재앙급 마수는 아무나 잡아 해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시장에 들어오는 양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 반해 수요는 날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리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건 이미 예견된 사실이다.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건가요?’

         

       이 마석의 쓰임새를 잘 몰랐을 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금화 1백 장을 지불했다. 그만하면 평범한 노예를 둘씩 살 수 있었으며, 5성급 레스토랑에서 웬만큼 식사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에테르는 기숙사로 돌아간 시각. 홀로 시장을 나갈 채비를 마쳤다. 단골로서 늘 들리는 곳에 가니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맞아주었다.

         

       “어이쿠! 이런 야밤에 공작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 최상급 마석, 재고 있나요?”

        “딱 한 보따리 남긴 했는데…….”

       “얼마에요?”

       “금화 스무 장입니다. 공작님께서 다녀오신 이후로 이걸 사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져서요, 부득이하게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요.”

         

       아직까진 괜찮다. 가격이 스무 배로 불어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이 마석이 지닌 가치에 비교하면 아직 싼 수준이었다.

         

       연구자금 부족으로 고통받던 클라이스가 웬일로 뼈가 시큰거리는 지출을 감행했다.

         

       “다음 재고는 언제 들어와요?”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가격이 왜 금방 뛰어버린 거죠?”

       “그 하루인가 이틀 새에 성도에 소문이 쫙 난 모양입니다. 오, 그러고 보니 전에 데려오셨던 그 금안족 노예의 말이 맞은 거였네요!”

       “혹시라도 재고가 들어오면 저에게 먼저 연락해 주세요. 저보다 비싼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그보다 큰 값을 부를 테니까.”

         

       말은 그렇게까지 했지만, 이미 북방 대륙으로 떠날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선 하고 있었다.

         

       ─ 돈 아깝게 왜 사요? 하급 마석은 뒷산에서 주워 오면 되지.

         

       자기 조수한테는 그렇게 말해놓고, 자기는 다른 마도사들이 잡아서 공급하는 걸 받아만 먹겠다는 건 이중적인 태도였다. 적어도 에테르와 마주한다면 떳떳하지 못할 정도로.

         

       ‘그 지옥에 다시 가고 싶지는 않지만…….’

         

       어디에도 쓰이는 만능 마석을 위해서라면 마도사가 뭘 못할까. 곧 있으면 트랜지스터의 가치를 모든 사람이 알게 될 텐데. 다음연도에는 아카데미 입시 문제로 내는 교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올해 내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클라이스의 머릿속에서 생긴 트랜지스터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인 편이었다. 적어도 리스크를 짊어지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보석이다.

         

       이 보석만 있다면 화계마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쨌건 절멸급 마수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책은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요, 적어도 플레어만 완성할 수 있다면….’

         

       플레어. 오늘부로 조수에게 연구를 맡긴 기술.

         

       플레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회로는 클라이스가 이미 작성해놓은 상태였다. 회로의 윤곽만으로도 파괴력이 얼마나 뛰어날지 예상이 갔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위에 어떤 식으로든 스크롤을 덧씌웠을 때 마전지가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릴 수 있다는 것.

         

       그것만 해결한다면 재앙급 마수까지도 모기 잡듯이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늘 하던 대로 잘 하겠죠.’

         

       어쩌면 조수에게 받는 마지막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섭섭함을 애써 숨기며, 클라이스는 자신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2/07/31 : 일부 서술을 삭제 및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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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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