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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8.

       

       

       에실리아는 그녀가 호위기사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제르피에드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다시, 유장하게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마족들의 영역으로 향할 것이오.”

       “……진심으로 하시는 말이 에요?”

        

       대답 대신 데스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담겨 있는 확고함을 보고 성녀는 재차 질문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것을 질문했다.

        

       “마족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알고 계신 거죠?”

        

       멍청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었다. 에실리아 그녀도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악마와 함께 활동했던 제르피에드가 마족들이 어떤 종족인지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그렇게 라도 묻지 않으면 믿기 힘든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렇게 질문을 해야만 했다.

        

       “물론이오, 가장 배척성이 강한 종족이잖소.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자들. 마족을 분리하면 스스로와 자부심으로 나뉘는 자들 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예상대로 그는 마족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정보들일 뿐이었다. 성녀는 한숨을 쉬듯이 다시 데스나이트에게 질문했다.

        

       “마족 중에서도 성신(聖神)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건 아셨나요?”

       “……마족들이 성신을 믿는다는 말이오?”

        

       제르피에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기에 한 박자 늦게 답을 해야만 했다. 에실리아는 한숨을 쉬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요. 생사대전 이후로 마족 중에서도 성신을 믿는 자들이 나타났어요.”

       “마족들은 성신보다는 마신(魔神)을 더 선호하지 않소?”

        

       그는 과거의 경험에 입각한 사실을 내비쳤다. 분명히 그가 알기로는 마족들이란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었다.질서에 가까운 성신들의 규율들은 그들에게 고리타분하며, 스스로가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억제하는 구속체가 될 뿐이라고 믿는 자들. 마족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보다 자유롭고 단순하며, 순간적인 위력을 가진 마신들을 믿는 자들이 많았다. 에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많은 마족들은 여전히 마신들을 믿어요. 하지만, 마신들의 힘은 아무래도…그 성질이 파괴에 가깝지, 치유에 가까운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들은 강함을 숭상하는 거지 어리석음을 숭상하는 게 아니거든요.”

        

       모든 생명체를 멸절을 목표로 하는 생사대전은 당연하지만, 마족도 예외로 두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제르피에드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는 생사대전의 주축으로 북부 전선에서 홀로 싸웠으므로. 나름 강인함에 자부심이 있던 마족들이 그에게 한꺼번에 덤벼들었으나, 그들은 자부심에 크나큰 상처를 남겨야만 했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그 과정을 반복하니 더 이상 마족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히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말인가?

        

       “은둔한 것인 줄 알았소만.”

       “은둔한 것도 맞아요. 마족들이 성신을 믿기 시작한 것은 생사대전의 중후반부터 에요. 처음에는 스스로의 강함을 믿고 정면으로 맞서던 마족들이 조금씩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거죠.”

        

       다른 종족들은 생사대전이라는 멸망이 벌어지는 상황 한복판에 놓여 있었기에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마족들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원래부터 중부 대륙의 북쪽, 그 중에서도 마족 외에는 다른 종족들이 거의 접근조차 하지 않는 북쪽 중에서도 북쪽에 살던 그들은 생사대전의 위기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그들이 다른 종족과 유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장애물을 돌아가거나 한다는 것보다 직접 돌파하는 것이 강함을 기른다고 생각하는 그들 만의 특성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녀와, 드래곤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분전했지만 그래도 버텨낸 그들이니. 버텨내는 데는 그들의 기거하는 위치도 한 몫 했지만 마족이라는 종족 자체의 강함도 무시할 수는 없는 요소였다. 더군다나 마족은 이전에 한번 마녀와 드래곤 같이 다른 종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당사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강함을 최우선으로 두기는 하지만 어리석지는 않아요. 스스로가 기사님에게 일격을 날릴 수도 없다는 걸 깨달은 이상, 다른 방법을 모색했어요.”

       “그 다른 방법이 성신을 믿어 그들의 신성력을 확보하는 것이오?”

       “맞아요. 언데드에게 있어서 성신의 신성력은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위협이니까요.”

        

       제르피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기로 현존하는 것들 중 질서에 가장 가까운 것은 성신들이다. 그리고혼돈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언데드. 마신들도 혼돈에 꽤 가깝기는 하지만 그 성질은 파괴와 유사하지, 죽음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과거 성마전쟁은 벌어질 필요도 없이 성신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반면, 성신들의 성질은 생명과 유사했고, 죽음과 유사한 언데드들에게 그것은 영멸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것에 착안해 마족들은 다른 방법으로 강함을 얻는다는 계획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그 계획을 떠올린 몇 몇 마족들이 성신을 믿고 신성력을 얻으려 남부로 왔지만…이미 들었다 시피 남부도 상황은 그리 좋지가 않았죠. 그들은 남부에서 신성력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북부로 돌아가기 힘들어졌고…생사대전이 끝난 후 에야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신성력을 확보한 마족들 일부는 남부에 정착했고요.”

       “북부로 돌아간 마족들의 일부는 여전히 성신을 믿고 있다 이 말이오?”

        

       고개를 끄덕이려던 에실리아는, 순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어깨를 비틀었다. 차가움은 한 번만 다가오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차가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에실리아는 위를 올려 다 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흐릿한 구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군.”

        

       간단하게 제르피에드는 상황을 일축하고, 남아있던 고기는 나뭇잎으로 싸기 시작했다.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잘 밀봉한 뒤 가방 안으로 넣어 두었다. 원래라면 말린 후에 보관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동하겠소, 나무 아래서는 비를 피하기 힘드니.”

        

       제르피에드는 목 없는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승마하기 편하게 무릎을 내어준 그를 위해 에실리아는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였다. 정작 제르피에드는 당연하다는 것을 행했다는 듯이 담담하기만 했지만.

        

       비는 점점 거세어져 갔다. 망토를 꿈틀거려 자신의 앞에 있는 성녀를 가렸지만, 모든 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더러워지지는 않아도 그녀의 옷에는 젖은 얼룩들이 늘어만 갔다.

        

       “…차라리 위치를 바꾸는 것이 낫겠소.”

        

       제르피에드는 간략하게 말하고는 에실리아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들어올려 그의 뒤로 위치시켰다. 커다래진 적색과 청색의 눈동자가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일어난 상황에 대해 간신히 할 말을 그녀가 떠올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나 지난 후였다. 그녀는 그저 시야 바로 앞에 있는 그 넓은 등과 어깨를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역설 같은 표현이겠지만, 데스나이트와 성녀의 침묵을 유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리였다. 거센 빗소리 때문에 한 마디도 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빠르게 쏟아 붓지는 않았지만, 내리는 빗줄기는 굵었다. 성녀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망토를 꼭 붙잡아야 했다. 일반적인 망토의 부드러운 천보다는 거칠거칠한 가죽의 느낌이 났다.

        

       쏟아져 내리는 비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던 성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기댔다. 등을 감싼 가죽 망토는 따뜻했고, 뺨에 닿는 갑주는 차가웠다.

        

       –

        

       “……!”

        

       앞에서 뭐라고 들리는 소리에 에실리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귓가에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다른 소리를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소리의 유발자가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큰 소리로 뭐라고 하는 자신의 호위기사에게 질문했다.

        

       “뭐라고요-?!”

       “…이오!”

        

       여전히 잘 들리지 않았다. 성녀는 결국 자신을 감싸던 망토마저 벗어 들고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몸을 앞으로 내밀자 그제야 드문드문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굴이오…!”

        

       에실리아는 제르피에드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동굴, 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꽤나 작은, 커다란 바위 여럿이 세워져 여유 공간이 생긴 바위굴이 보였다. 의견을 전달한 데스나이트는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 마자, 제르피에드는 성녀를 들고 굴 안쪽으로 옮겼다. 다행히 규모 자체는 둘이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둘이 들어가고 나면 딱 찰 듯한 크기였다.

        

       옮기는 잠깐의 시간에도 차가운 공기에 닿았기 때문인지 에실리아는 몸을 떨었다. 북부라 그런지 그녀가 살던 곳보다 공기가 더 차가웠다. 그런 데다가 비까지 왔으니 그녀가 느끼는 현재의 차가움은 일반적으로 느끼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을 반증하듯, 망토를 뒤집어 쓴 에실리아는 벌벌 떨기만 했다. 그녀의 입에서 드문 드문 허연 입김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후우우…….”

        

       제르피에드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망토는 물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해 진 상태였다. 아까 전에는 나무라도 있었지, 지금은 바위굴 외에는 짧은 풀들만 있는 평야였다. 설사 나무가 있다 하더라도 젖어버려 불을 피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호위기사는 이대로 라면 위태로워질 그녀의 처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몇 가지 방법들이 제르피에드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역시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레이디 에실리아.”

       “네……?”

        

       무릎을 꿇고 몸을 움츠린 채 떨던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말에 고개를 힐긋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 끌어안고 있어야 할 것 같소.”

       “……무슨…?!”

        

       그녀가 말을 채 뱉기도 전이었다.

        

       데스나이트는 천천히 갑주를 벗기 시작했다.

        

       

       

       

       

       

       

       <벗다> 라는 행위는 <자기 몸 또는 몸의 일부에 착용한 물건을 몸에서 떼어 내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 부분에서 제르피에드가 갑주를 ‘벗었다’ 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것은 <벗다> 와는 정 반대에 가까웠으니까. 그 행위는 오히려 흡수되는 것과 유사했다. 흡수보다 더욱 가까운 의미를 제시하라고 하면 환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 단단한 갑주가 일그러지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환원이라고 칭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갑주는 각진 형태에서 보다 곡선이 가득한 유순한 형태로 변화했다. 아니, 돌아갔다. 그 직후 갑주는 그 형태에 스며들 듯이 사라졌으니까.

        

        

       달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이 창백한 피부. 그 거대한 갑주가 환원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강인하고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잡고 있는 몸. 갑주와 같은 색깔의 문신처럼 그어진 회로들이 어지럽게 몸에 새겨져 꿈틀거린다. 창백한 피부 때문인지 회로들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핏기가 부족해 살짝 푸르스름한 입술. 투구의 첨단처럼 날카로운 턱 선과 높은 콧날. 그보다 더욱 날카로운 눈매에서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 그 위를 단정하게 덮은 약간 짧은 길이의, 역시 갑주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까지.

        

       “에실리아.”

        

       마지막으로,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한 낮고 굵은 목소리가,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자가 제르피에드 림 세드바이갈이라는 것을 증거했다.

        

       에실리아는 제르피에드가 자신을 부르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갑주가 아닌 신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제르피에드도 제르피에드였지만. 그가 그 강인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살짝 움직일 때, 그리고 약하게 미간을 찌푸릴 때. 조금 벌어진 입술을 달싹일 때. 그 외에도 그가 움직이는 모든 순간 순간마다 그녀는 자신이 신체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먼저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토록 살육과 관련된 많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기에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차분한 용모. 저 날카로운 눈매와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만 없었다면 그녀가 아닌 그를 보고 성직자라고 주장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실리아는 압도성을 흔히 경험한 자들이 취하는 모습을 그대로 소답해야 했다.

       

        그녀는 넋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에실리아가 그의 말에 그래도 대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할 수 있었을 때는, 이미 그의 얼굴이 아까 보다 더욱 가까이 온 이후였다.

        

       그걸 인지했을 때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에 딸꾹질까지 나기 시작했다.

        

       “네…엣…?! 히끅?! 히끅…! 히끅…!”

        

       그 모습을 본 데스나이트의 미간이 더욱 강하게 찌푸려졌다. 데스나이트는 찬찬한 어투로 스스로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가까이 오시오.”

       “괜찮…괜찮, 아요…! 히끅…!”

        

       괜찮다는 말, 그리고 아까 보다 더욱 심해진 몸 떨림에 제르피에드는 에실리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몸이 떨리고 딸꾹질까지 하는데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제르피에드는 한숨을 섞어 그녀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시오. 서로 붙어 있어야 체온이 높아질 수 있소.”

       “아니…그…! 오, 옷…! 옷 입은…상태에서…해요…! 그럼…!”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어차피, 갑주나 망토는 모두 자신의 일부였으니 움직임 자체에 불편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갑주 형태는 방어력이 극대화 되는 대신 그 특유의 금속과 유사한 성질 때문에 외부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외부가 차가운 지금, 갑주도 차가운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은 에실리아의 체온을 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옷이라는 그녀의 말에 자신을 한 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갑주형(甲胄態)에서 신체형(身體態) 으로 회귀한 지금, 그의 모습은 신체 자체가 고스란히 노출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드러낸 것은 상반신 뿐, 하반신은 여전히 갑주형의 상태였다. 다른 것도 아닌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신체를 마구 드러내는 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에실리아. 이 상태가 체온을 높이는 데 가장 도움이 되오. 그러니 가까이 오시오.”

       “저, 저는 진짜…진짜…! 히끅! 히끅…! 괘, 괜찮아요…!”

        

       에실리아는 이제 뒷걸음질까지 쳐가며 괜찮다고 주장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 모습에 제르피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추위 때문에 벌벌 떨고 딸꾹질까지 하는데 왜 저렇게 한사코 부인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약간의 강제성을 동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의에는 좀 어긋나지만, 그의 역할은 그녀를 호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추위에 노출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호위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니 일반적인 예의보다는 그녀의 호위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결론을 내린 그는 곧바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제르피에드는 약간 거칠게 에실리아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에실리아는 뭐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에게 끌려갔다. 애초에 그녀가 제르피에드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그것보다는 그에게 잡힌 순간 아무런 저항 의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남자의 실오라기 하나 없는 신체를 봐서? 아니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남성과의 신체 접촉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그의 압도적인 신체의 모습에 경도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실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제르피에드의 품 속에 있었다는 점이다. 제르피에드의 신체는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않았었다. 심장이 박동할 때 마다, 온기가 전신을 감쌌다. 박동이 사라지면, 온기도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에도 제르피에드의 온기가 간헐적으로 전해졌다. 안정적인 그 감각에 그녀의 딸꾹질은 멎고, 몸의 떨림도 멎어갔다.

        

       “보시오. 서로 맞대고 있으니 상태가 좀 나아지지 않소.”

        

       차마 방금 전에 떨던 것과 딸꾹질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던 에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는 걸 택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기 힘들었기에 그녀의 호위기사에게도 보여주기가 힘들었다.

        

       제르피에드는 그에게 품속에 안겨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는 그의 레이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살아 있는 것과 맞닿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감각하는 살아있는 것의 온기는 그에게 썩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신기로운 느낌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동안 비가 내리는 세상을 지켜보았다.

        

       아마, 평범한 계약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호위한다는 것은, 닥쳐오는 위협으로부터 그 대상을 온전히 보호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죽이는 것보다 어찌 보면 더 까다롭고 위험한 내용의 계약이었으나, 지금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 이라고는 추적거리면서 쏟아지는 빗방울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굴의 외부에서 벌어지니 결국 실질적으로는 서로의 온기만이 전부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

        

       최초의 계약을 제하면 사실상 겪어본 적 없는 시간에, 제르피에드는 마음껏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감상했다.

        

        

       –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어느덧 빗방울들이 그친 탓이었다. 유장하게 성녀를 향해 손을 뻗던 제르피에드는 다시 그 손을 거두었다. 레이디의 숨결은 규칙적으로 변해 있었다. 벌써 오늘만 세번째 잠이 든 성녀였지만, 굳이 그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데스나이트는 성녀로부터 그녀가 그를 찾기 위해 며칠 간 잠도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고생을 했다는 것을 들은 후였다. 굳이 그 뿐만이 아니더라도 몇 달 간의 도피 생활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나마 그를 깨운 후 이틀의 시간도 편히 보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깨우는 것 보다는 편히 쉬게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스나이트는 그의 레이디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빠르게 갑주형으로 변환한 그는 금속과 비슷한 특유의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 소리를 들었다 가는 레이디가 깨어날 지도 몰랐으니까. 자신의 앞에 에실리아를 앉혀 두고 천천히 목 없는 말을 몰았다.

        

       구름 사이로 빛방울들이 떨어져 그의 갑주 위로 번졌다. 비에 가라 앉은 흙내음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튀어 오른다. 흙내음에는 약동하는 생명이 가득 느껴졌다. 비를 머금고 스스로를 키우는 생명들. 이제는 그가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것. 아무리 강인하게 붙잡아도, 수없이 가져와 채워도, 늘 틈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립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후회하지는 않으나, 그는 가끔씩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추억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리움과 추억들.

       데스나이트에게는 그것이 삶이었다.

        

        

       –

        

        

       강풍이 한 번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강풍에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성녀는 놀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망토가 펄럭였다.

        

       “일어나셨소?”

        

       뒤에서 낮은 울음이 그녀를 타고 흘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 목소리에 에실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 위로 데스나이트의 턱 부분이 보였다. 신장의 차이가 많이 나 성녀의 시각에서는 머리가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이 보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떨구자, 군청색의 투구 틈 사이로 핏빛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갑주를 해제하고 자신을 보던 호위기사의 모습이 생각나 성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침을 삼켰다.

        

       꿀꺽 – .

        

       행여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을 까봐 성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성녀는 데스나이트의 말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위 아래로 붕붕 움직였다.

        

       제르피에드는 그런 모습의 성녀를 보고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향했다. 잠을 자기 전보다 좀 과도하게 행동하는 것 같긴 했지만, 어차피 잠을 다 물리치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테니. 잠시 그녀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도록 두기로 마음먹고 그는 태양 쪽을 한 번 살폈다.

        

       어느새 그 이글거리는 분신체(焚身體)는 지평선 쪽으로 거의 쓰러지고 있었다. 아직 쓰러질 때 까지는 시간이 좀 남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 시간 후면 완전히 죽어버려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밤을 보내야 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르피에드는 에실리아에게 말했다.

        

       “레이디 에실리아.”

       “네?”

        

       이제 과거의 기억에서 탈출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그녀는 보다 평온한 표정으로 호위기사를 보았다. 제르피에드는 손짓으로 가방 쪽을 가리켰다.

        

       “지도에서 오늘 밤 묵을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 보시오. 그래도 나보다는 그대가 더 잘 알 것이니.”

        

       그의 말에 에실리아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태양이 조금씩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본 에실리아는 빠르게 가방에서 지도를 펼쳤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을 희고 가는 손으로 짚어 가던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무슨 일 있으시오?”

       “음…앞 쪽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 부락? 이 있는 것 같긴 한데…….”

       “ ‘같기는 하다’ 는 것은 무슨 의미요?”

       “이 지도가 낡아서 최신 정보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도 하고…원래 워낙 규모가 큰 마을 외에는 잘 표시를 안 하거든요. 도시들이야 사라질 위험이 적지만 마을이나 부락은 습격을 받아 사라지는 경우도 꽤 있고…아니면 단순히 뜻이 맞아 결성되었다가 얼마 안 가 해체되는 경우도 있고…그래서 지도에는 큰 마을들 외에는 별로 표시를 안 해요.”

       “그럼 지금 그 지도에는 뭔가 나와 있다는 것이오?”

       “…그게…위치만 나와 있고 이름은 안 나와 있네요.”

        

       그녀는 더 이상 추론하기가 힘든 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도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 라서…책에서 본 것 밖에 몰라요…죄송해요.”

        

       데스나이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수도’ 라는 도시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모르는 정보가 있다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에실리아는 한숨을 작게 쉬었다.

        

       그나마 자신이 살던 중앙 지방에서는 익숙한 정보들이 꽤 있었지만, 에텔바이어 산이 있는 북부로 올라오면 올라올수록 모르는 것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녀가 아는 정보들은 모두 책에서 본 것 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세계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것은 극히 소량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집어넣었다고 생각했으나, 직접 마주하니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여전히 겨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에실리아가 성녀라는 위치와 정보들이 가득한 장서관을 보유하고 있는 대성당 내에서 기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 들과의 지식 정도의 차이가 상당하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 또한 그녀가 성녀이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상처 입은 자들의 치유, 예법 공부에 힘을 써야만 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난 후가 저녁 늦은 시간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정도의 지식량을 축적한 것은 대단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책을 더 읽어 두었어야 했다. 아니면 어떻게 하더라도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도를 사수해야 했다. 에텔바이어 산으로 향하는 것에만 집중해 그 방향 외에는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게 실수였다. 너무나도 많이 본 지도는 결국 닳아서 산 속에 있을 때 찢어져 버렸으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그저 운이 좋아서 였을지도 모른다. 중앙 지방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고, 마을에서 마을로 넘어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에텔바이어 산을 향하면 향할수록 마을의 간격은 넓어졌지만 도착할 동안 추격대를 조우한 걸 제외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기적에 가까웠다.

        

       결국 제 손으로 해낸 것은 하나도 없다니. 성녀는 스스로 조소를 머금었다.

       홀로 만의 자책을 하던 그녀에게 호위기사의 말이 성큼 다가왔다.

        

       “그럼 다른 곳에 묵을 만한 곳이 있소?”

        

       성녀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집중으로 지도로 옮겼다. 손가락이 빠르게 지도를 훑는다. 북부의 대도시 디에르반.  에텔바이어 산과 가장 근접한 샤르콧 마을과 비슷한 이유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라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마족 영역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르바다임 숲과 가장 가까운 도시 중 하나였으니까. 그 도시들 중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도시가 바로 디에르반이었다.

        

       호위기사가 그런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마 다음 목적지는 디에르반임이 확실했다. 분명히, 마족들의 영역으로 향한다고 했으니.

        

       디에르반으로 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들은 여러 곳이 있었으나, 다른 마을들은 너무 거리가 멀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그 마을이 유일했다.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들 너무 멀어요.”

       “그 이름 없는 마을까지는 얼마나 남았소?”

       “글쎄요…30분? 1시간?”

       “알겠소. 좀 속도를 내도록 하지.”

        

       제르피에드의 말과 동시에 강풍이 휘몰아쳤다. 성녀는 호위기사의 망토를 둘둘 말아 꼭 붙잡고 있어야 했다.

        

       –

        

       -다그닥.

        

       목 없는 말의 발굽이 지면을 강하게 딛었다. 목 없는 말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둘렀다. 에실리아는 목 없는 말에게서 느껴지는 호위기사의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호위기사의 일부가 보내는 당혹스러움은 그녀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왜 마을이 위치만 표시되어 있고 이름이 없는 지 대강 이해할 것 같았다.

        

       그 마을은 – ,

        

       

       아무도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드디어 달달한 장면이네요. 저는 이런 장면 쓸 때가 제일 기분이 좋답니다. 달콤하고 따뜻한 초코라떼 먹는 기분이 나거든요.

    처음에 마족들이 성신을 믿는다는 설정을 생각했을 때 , 넣을 지 말지 좀 고민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결국 넣기로 결정했습니다.
    몇 번이고 멸망의 위기를 겪고, 생사대전이라는 거대한 위기에서 살아남은 다음 격변한 세상의 모습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마족들이라고 성신 믿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다음화 보기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데스나이트는 성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Score 3.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trayed by her own Order*, the Saint begged the death knight to become her guard—the death knight who could destroy the world. *tl note: she was betrayed by the church, not her own doing. Author Notes: Contains Authentic fantasy, and wholesome love. I hope this brings you the reader a little bit of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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