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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뭐냐는 질문에 자기소개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바보처럼 반문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 고민하고 있던 찰나.

       

       “아……, 초면에 실례를 범했네요.”

       

       다행히 대공녀께서 질문을 철회하였고, 앉으라는 손짓을 정중히 해냈다.

       

       ‘흠, 후회캐의 탈주를 막고자 친히 걸음을 할 줄이야.’

       

       원작과 달라진 전개에 그녀 역시 다른 결단을 내린 거겠지.

       그나저나, 겔우드가 보이는 묘연한 반응에 로건 대공이 방문을 했나 싶었는데….

       

       ‘대공녀일 줄은 몰랐군.’

       

       원작에서 로건 윈터펠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제 딸이 당한 수모에 대해서 몰랐다.

       하물며 반룡족 겔우드조차 말이다.

       르미앙이 모든 사실을 철저히 숨겼으니까.

       적어도 무료편수까지는 시녀 ‘마리엔’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후회캐 4인방이 최종 후보가 된 것을 인지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보들 중 가장 볼품없는 엘든 라펠리온의 기권 소식을 달갑게 여기진 않더라도, 쳐내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한데, 대공각하께서 제 딸에게 모든 결정권을 위임한 모양이다.

       

       ‘플랜 B 각이 날카롭게 섰군.’

       

       인간이란 자고로 최악의 상황에 대해 대비해 두어야 하는 법이다.

       기권 선언이 승인되는 최고의 상황이 플랜 A.

       기권 선언이 반려되는 최악의 상황은 플랜 B가 가동될 시점일 뿐이다.

       

       르미앙 윈터펠.

       그녀는 여성향 로판물의 여주답게 온화하면서도 냉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복수보다 마법 연구, 연금 실험을 택한 광학도였으며, 지옥 같았을 3년의 시간을 스쳐 지나가는 기우라 생각할 정도로 마음의 배포가 넓었다.

       적절히 대처한다면,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터다.

       르미앙이 후회캐 4인방에게 바라는 것 또한 알고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맥락을 짚지 못해 답을 드리지 못 한 것일 뿐입니다.”

       

       말을 마치며 르미앙의 맞은편에 앉았다.

       최종 평가전이 시작되기 전엔 후보자와 대공녀의 만남이 금지됨을 알고 있다.

       편애와 편향을 방지하기 위함임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부디, 지금의 독대가 후회캐 3인방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며 르미앙에게 말했다.

       

       “기권 선언 때문에 오신 거겠군요.”

       

       가면을 썼다 해도 눈은 보인다.

       그늘에 잠긴 푸른빛 동공이.

       세간에는 그녀를 추녀라 짐작하고 있지만, 추녀와는 정반대임을, 원작에서 그 얼굴이 어찌 묘사되었고 공지에 어떤 일러스트가 등록되어 있는지도 봤었다.

       가면 뒤의 얼굴이 선히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네. 그것때문이죠. 궁금했거든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기권을 선언한 이유, 단 하나면 돼요.”

       “…이유는 겔우드 보좌관께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만, 혹여 못 들으셨습니까?”

       “들었어요.”

       “하오면…?”

       “자격이 부족하다는 건 무엇을 근거로 내리신 판단이죠? 대공가의 분석과 결정에 오류라도 있다는 건가요?”

       “하하. 그럴리가요. 저의 분석과 결정에 오류가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죠?”

       “나 정도면 제 3 대공녀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란 분석과 대공가의 혼약대전에 참가하겠다는 결정을 말입니다.”

       “…….”

       

       가면 속 눈동자가 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르미앙 역시 통찰력이 뛰어나다.

       겔우드의 능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집념의 탐구자와 불굴의 연구가가 기권의 이유를 찾으려 하고 있다.

       관찰과 해석이 일상이자 특기인 그녀가 속을 파헤쳐보려 하고 있다.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탐색에 불응할 이유가 없었다.

       

       엘든 라펠리온이라면 그래야 했겠지만, 이준우는 외려 그 탐색을 불쾌히 여겨야 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집 담벼락 너머를 훔쳐보려는 이에겐 그래도 되는 법이며, 당연한 방어인 법이다.

       물론 르미앙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했다.

       기권의 이유, 변심의 이유가 궁금할 테고, 제 특기인 탐구와 관찰로써 그것을 밝혀내는 건 자연스런 행위니까.

       그렇기에 불쾌를 표명하지 않았다.

       엘든 라펠리온이란 악질 캐릭터에 빙의한 빙의자의 업보라 생각할 뿐.

       피해자에게 불쾌를 표명하는 건 합당하지 않은 처사였다.

       

       잠시 후, 르미앙이 제 1차 탐색 결과를 내놓았다.

       

       “이토록 달변가이신 줄은 몰랐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그게 기권의 이유라는 건가요?”

       “예. 저는 악인이니까요.”

       “진심이신가요?”

       

       100%.

       

       “진심입니다.”

       

       엘든 라펠리온이란 최종 후보는 결단코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편감도, 대공가의 사람이 될 자격도, 아울러 한 가문의 수장이 될 그릇도 아닌, 한낱 광인일 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르미앙이 소파 팔걸이에 편히 올려두었던 오른손의 검지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흠.’

       

       원작에서 자주 묘사되었던 오랜 버릇이다.

       흥미로운 연구 대상을 찾았거나, 실험이 좋은 결과를 낳았을 때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

       지금은 후자와 상관없는 상황이니 전자일 확률이 높다.

       르미앙의 흥미는 내게 흥미롭지 않은 일이기에 지양해야 될 테지만, 사실 기권표를 던진 순간부터, 그리고 르미앙과 독대하게 된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녀의 눈에 나는 사상 최악의 쓰레기이자, 마왕보다 더한 악질이다.

       해보지도 않은 쓰레기 짓을, 해본 적도 없는 양아치를, 하고 싶지 않은 악질을 연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며, 어설프게 흉내낸다고 하더라도 흥미 대신 의심만 살 뿐일 터다.

       무엇보다, 그녀는 서열상 귀족들의 왕인 대공가의 영애.

       함부로 굴다 엄한 문책을 당할 바엔 작금의 태세를 유지하는 게 옳았다.

       

       결국.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

       

       그것은 플랜 B를 준비하기 위한 발판이기도 했다.

       

       “스스로 악인이라 칭하다니, 나쁜 짓을 참 많이도 저질렀나 보군요?”

       “예.”

       “…….”

       

       으음.

       너무 당당했나.

       

       “…아, 뭐. 누구나 살아가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문을 재건할 수 있을 절호의 기회에서 도망치지는 않죠.”

       “도망치는 것이 아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여겨주십시오.”

       “…….”

       

       다시금 찾아온 적막.

       톡, 톡, 톡.

       소파의 원목 판걸이를 두드리던 르미앙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적막이 깨진 것은 그 직후였다.

       

       “그러니까, 고작 지난 날의 잘못들 때문에 가문을 재건할 기회를 포기한다고요?”

       

       …전면전을 택한 건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다양한 길을 도모하는 연구가라면 응당 그럴 거라 생각하기에, 가감없이 답했다.

       

       “예.”

       “거짓말.”

       

       돌아온 대답은 힐난에 가까웠지만.

       

       “예?”

       “고작 그런 이유로 당신이 이 기회를 포기할 거라 생각치 않아요.”

       “대공녀님을 오늘 처음 뵙는 듯한데, 저에 대해서 아주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잠시 주춤한 르미앙이 다리를 꼬으곤 발 끝을 까딱인다.

       이 역시 ‘잘’ 알고 있는 습관이었다.

       실험이나 연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에 하는 습관이었으니까.

       그리고, 르미앙이란 집념의 연구가는 난제를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풀릴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 드는 법이다.

       곧, 치열한 설전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이렇게 무력하게 기권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아서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닌 법이지요.”

       

       “보이는 게 중요하잖아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알 수가 있죠?”

       

       “보이지 않기에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지금 제게 조심하라고 훈수를 두시는 건가요?”

       

       “하하. 지혜로운 대공녀님께 제가 감히 훈수를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 엘든 공자께선 초면인 제가 어찌 지혜롭다 생각하시는지요?”

       

       “미천한 자의 아부라 생각해 주십시오.”

       

       “혼약대전에서 기권 선언하신 분이 왜 제게 아부를 하는 거죠? 혹시, 기권 선언이 또 다른 전략이었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위대한 ‘대공가문’의 영애님이시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아니. 아부 같은 걸 할 줄도 아는 분이셨나요?”

       

       “강자들의 세상 속에서 약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훌륭한 생존법이니까요.”

       

       “간교한 자가 부리는 아양이 아니고요?”

       

       “그리 생각하신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사과 같은 걸 받고자 여기까지 온 게……!”

       

       

       점차 고조되어가던 설전(舌戰)이, 점점 격앙되어가던 목소리가 뚝 끊긴다.

       대화의 흐름에 끌려가고 있음을 이제야 눈치챈 르미앙이 흐름을 끊은 것이다.

       통찰력이 높다고 해서 만능하지는 않다.

       그저 본질을 꿰뚫는,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날 뿐, 흐름을 주도하는 능력과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능력은 별개인 법이다.

       후회캐 3인방이야 그녀에게 ‘진심어린’ 아부를 떠느라 흐름에 끌려가겠지만, 후피집에서 탈주하고픈 내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주도력과 선점력을 기르기 힘든, 고립된 환경에서 자라왔다.

       다양한 자리를, 사람을 겪지 못 했으며 여타 귀족 영애들과 다른 삶을 살아왔다.

       속내를 감추는 법보다 드러내는 게 익숙한 삶을 살아온 그녀가 흐름에 끌려오는 것은 당연한 흐름인 것이다.

       

       물론 여주인공을 자극해서 좋을 것은 없겠지만, 딱히 자극할 의도나 흐름을 선도할 의도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그녀를 자극해 흥미를 일으켰다 해도 상관없었다.

       눈물의 후피집을 피하기 위한 플랜 B는 그래도 되니까.

       

       척.

       

       까딱거리던 르미앙의 발 끝이 멈췄다.

       이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상당히 흥미롭네요.”

       

       첫 대면의 감평을 짧게 남기곤, 응접실을 나가려했다.

       나의 질문이 따라붙지 않았다면.

       그녀를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기권 선언을 승인해 주시는 겁니까?”

       

       

       호호.

       가면의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르미앙이 응접실을 빠져나간다.

       

       

       “또 뵙지요. 엘든 라펠리온 공자.”

       

       

       확실한 답이 아닌, 의문스런 인사를 남긴 채로.

       

       ……흠.

       

       왜인지 저 웃음소리가 섬짓하게 들리는 건,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된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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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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