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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성녀가 아닌 성자라니요?”

     

    황비가 내게 반문한다.

     

    나는 아티팩트를 콕 찍으며 대답했다.

     

    “저 성배는 재능을 개화하게 해주는 물건이지요. 황비님과 저희 가문의 연합에서 성녀가 탄생하면 더할 나위 없는 경사고요.”

     

    “그렇지요.”

     

    “고트베르크의 피는 제가 네리아보다 진하게 물려받았습니다. 머리 색을 보십쇼.”

     

    잘 보라고 등을 기대 고개를 치켜든다.

     

    새하얀 백발.

     

    하얀 계통의 머리칼은 신성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집안의 특징이다.

     

    그리고 누가 봐도 내 쪽이 네리아보다 훨씬 백색에 가까웠다.

     

    “제가 재능을 개방하면 성자로 선택받을 확률이 훨씬 높지 않겠습니까?”

     

    내 발언에 황비는 조금 떨떠름하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낮에 자기 손을 찔렀던 놈이 저녁엔 갑자기 아주 협조적으로 나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황비의 혼란이 내 목적이다.

     

    낮에 화관 사건은 별다른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나.

    손을 찌른 건 단순한 실수였을까, 이놈은 진짜 멍청한 망나니일 뿐인가? 별별 의심이 다 들겠지.

     

     

    사람은 상대가 다루기 쉬워 보일 때 방심하는 법.

     

    황비에게 필요한 건 정치적으로 자신 밑에 확실히 붙들어둘 재료다.

     

    네리아는 얌전해 보여서 골랐겠지.

     

    하지만 정의로운 성격보다는 멍청한 망나니가 다루기 쉽거든.

     

    원하는 대로 망나니가 되어줄 때다.

     

    “이 아티팩트가 가지고 싶은가요?”

     

    “별로요? 확률적으로 그렇다 이 말이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라스, 성자가 되면 많은 의무가 따른다.”

     

    “아유, 전 그런 거 잘 모르잖아요. 문제가 생겨도 아버지가 알아서 해주실 거죠?”

     

    “으음….”

     

    “아버지, 제 자식이 클 때까지 가주 자리에서 은퇴하시면 안 됩니다? 전 골치 아픈 일은 질색인 거 잘 아시잖아요.”

     

    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어깨를 쳤다.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키고는 늘어지게 트림을 한다.

     

    “어이, 술이 떨어졌잖아! 눈치 있게 바로바로 채워 넣으란 말이야!”

     

    취기가 잔뜩 돈 사람처럼 외친다.

     

    황비가 나를 보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때, 나는 배신도 안 하고 평생 이 집안에 있을 얌전한 망나니야. 목줄은 스스로 채워 놨어.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황비에게 말한다.

     

    “아이, 이제 황비님도 좀 웃으시네. 계속 어려운 얘기만 나와서 졸고 있었잖아. 저희 영지 내려가 보셨어요? 길거리 음식이 끝내주거든. 내일 시간 나시면 같이 한 번….”

     

    “공자님 잠시만. 우선 이 아티팩트 이야기를 마무리 짓죠.”

     

    황비가 다급히 내 말을 끊었다. 유야무야될까 초조해 죽겠지 그냥.

     

    그렇게 급한 성격이니까 황실에서 자리를 못 잡는 거야.

    굳이 안 보여줄 밑천을 스스로 까버리잖아?

     

    “그럼 공자님은 성배를 사용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몸에 좋은 거라는데 까짓거 주면 받죠.”

     

    “…이 아티팩트의 가치가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아이,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근데 그렇게 좋은 물건이에요? 네리아보단 장남인 제가 먼저 쓰는 게 이치 아닐깝쇼?”

     

    은근슬쩍 네리아에게 주면 깽판을 놓겠다는 암시도 던져둔다.

     

    내가 가질 건 아닌데, 날 무시하면 못 참아.

    순전 어린애 떼쓰기다.

     

    황비가 나와 아티팩트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후작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라스의 의지가 그렇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 아셀라가 끼어들었다.

     

    “공자에게 주지 그래?”

     

    여태 지루해하던 그녀는 이제야 조금 흥미가 돋은 모양이다.

     

    “공자가 신성력이 더 강한 것도 사실이고, 그가 성자가 된다고 생각해 봐.”

     

    아셀라의 속눈썹이 슬며시 가라앉는다.

     

    “내 주치의가 되면 재밌겠지?”

     

    “…조금 생각해보지요.”

     

    황비가 아티팩트를 들고 연회장을 나섰다. 기사와 시종들이 그녀를 따른다.

     

    아셀라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들이 나간 후 나와 아버지, 네리아도 휴게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스, 아까 네 행동은 연기라고 생각됐구나. 어떤 의도였느냐?”

     

    “저 아티팩트는 [계시의 성배]라 불리는 물건입니다. 숨은 재능을 개화하게도 해주지만 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라니?”

     

    “세상만사, 대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없는 법이니까요. 재능을 얻은 만큼 다른 무언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저주에 걸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셀라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그나저나 그녀에겐 뭘 달라고 하나.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말한 대로 성배를 쓰면 재능의 스킬트리를 열 수 있으나, 디버프도 하나 생겨난다.

     

    디버프의 종류는 무작위라 재능의 등급이 낮다면 사용이 오히려 손해인 아티팩트다.

     

    하지만 S등급 재능이 잠긴 상태인 나는 디버프를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사용하는 게 이득이다.

     

    “저, 오라버니….”

     

    네리아가 나를 불렀다.

    얼굴은 조금 겁먹은 표정이다.

     

    “감사해요….”

     

    뭐가?

     

    네리아가 저걸 쓰면 신성의 재능을 개화해 나중에 성녀로 선택받긴 하지.

     

    그 디버프로 받는 건 성장저해.

     

    네리아는 10년 후에도 이 나이, 외모 그대로 고정되고 만다.

     

    ‘그 정도 디버프면 거저먹기지.’

     

    심지어 나는 재능이 두 개다.

    원 플러스 원 행사기간.

    이걸 어떻게 참아.

     

    저 아티팩트는 밖에 나가서 구하려면 못해도 오천 골드는 줘야 하고, 매물이 없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좋은 기회다.

     

    황비가 못 참고 빨리 아티팩트를 안 바치나 기대하는데 아버지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라스, 정말 뜻깊은 행동이었구나.”

     

    그래요?

     

    “황비 전하의 제안을 대놓고 거절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네리아가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네가 모든 걸 알고 네리아를 대신해 희생해 주었다니, 내가 아비로서 다 부끄럽구나.”

     

    날로 먹을 생각밖에 없었는데.

     

    “네리아는 아직 어리고 앞날이 창창하지요. 위험한 아티팩트를 쓰게 둘 순 없습니다. 오빠인 제가 당연히 보호해야지요.”

     

    “라스…!”

     

    아버지가 감격하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참 순진한 분이다. 저 황비가 꼬시지만 않았어도 이 시골 영지나 잘 일구면서 평생을 한가로이 사셨을 텐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시종이 우리에게 보고했다.

     

    “가주님, 도련님, 아가씨. 황비 전하께서 생각이 끝나셨다 합니다.”

     

    늙은 여우가 이제야 엉덩이를 떼셨다.

     

    “가시죠, 아버지.”

     

    나는 자신만만하게 연회장으로 걸어나갔다.

     

     

     

    ***

     

     

     

    네리아 고트베르크는 첩의 자식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힘 있는 귀족이지만 어머니는 평민, 그것도 여관 주인이다.

     

    네리아가 철이 들었을 때 이미 그녀는 어엿한 후작가의 영애였다.

    첩의 자식이라고 차별받는 일도 없었다.

     

    이미 정부는 십 년도 더 전에 타계했고, 이복 오빠가 있는 정도가 고트베르크 가문 사정의 전부.

     

    다른 귀족 가문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는 네리아를 맡기고 가문으로 들어오지 않았기에, 네리아는 조금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는 무뚝뚝하다.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았다.

     

    다만.

     

    ‘…오라버니는 무서워.’

     

    틈만 나면 술을 먹고 길거리로 나가 행패를 부린다.

    밤에도 저택에서 괴성이 들리거나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 백중 백 그였다.

     

    다행히 저택엔 호위기사들도 있기에 그가 폭력을 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도 진즉에 그를 별관에 따로 격리했으니 네리아와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그래서 오늘 그를 거의 삼 년 만에 직접 만나야 했던 네리아는 겁에 질려 있었다.

     

    ‘최대한 트집 잡히지 않게 하자.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오라버니는 첩의 자식인 자신을 싫어할 게 분명하니까.

     

    그런 생각으로 네리아는 몇 번이나 몸가짐을 다잡으며 심호흡을 하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처음 인사를 하고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무서워서 시선을 피해버렸다.

     

    욕을 해오면 어떡하지, 심장이 벌벌 떨려오는데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네. 키가 커 보여.”

     

    ‘어라…?’

     

    네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자신이 알던 불량배 같던 오라버니.

     

    그 얼굴엔 화나 분노는 연소되어 거의 사라졌고, 상냥한 미소가 엷게 새겨졌다.

     

    어느새 그에 대한 걱정이 조금 덜어진다.

     

    하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 대한 공포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오늘은 황실 사람들에게 예를 선보여야 하는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식사시간이라고 뭐 안 먹었지? 그거 하나 먹어. 단 거 먹으면 금방 기분이 풀려.”

     

    그런데 오라버니가 손바닥에 알사탕을 하나 올려줬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엄청 쓴맛인데 장난치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은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풀렸다.

     

    달콤한 벌꿀 향이 코끝에 화악 퍼진다.

     

    당분이 머릿속을 도니 눈이 번쩍 뜨였다.

     

    ‘오라버니는 마술사일까?’

     

    네리아는 순식간에 좋아진 기분에 신기함을 느꼈다.

     

     

    하지만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성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네리아가 가장 먼저 떠올린 그림은, 어릴 적 들었던 마왕과 싸우던 용사 파티의 전설.

     

    전원이 용맹하게 싸워, 최후에 목숨을 바치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전설이었다.

     

    ‘나, 난 죽기 싫은데….’

     

    마물과 싸우기도 싫고.

     

    황비님은 왜 처음 보는 나에게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어른들은 당연하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고만 있고.

     

    어쩔 수 없어… 대답해야 해.

     

    “…가문을 위해서라면…”

     

    “잠깐 기다려 보십쇼.”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

     

    네리아는 당당하고 우렁찬 그의 목소리를 듣고 확신했다.

     

    오라버니만은 내 편을 들어준다고.

     

    ‘헤헷….’

     

    네리아가 턱을 괴고 황비를 상대로 연기를 펼치는 라스를 바라본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간식을 먹는 게 나쁜 버릇인 줄 알면서도, 무심코 라스가 줬던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오라버니는….’

     

    소녀의 빵빵한 볼에는 이미 오라버니에 대한 신뢰가 가득 차 있었다.

     

     

     

    ***

     

     

     

    식후 차를 홀짝이며 황비가 용건을 꺼냈다.

     

    “고트베르크 공자님, 정말 이 아티팩트를 써서 성자로 각성할 수 있겠어요?”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두말하면 잔소리죠. 제가 신성력 하나는 끝내주게 타고났습니다. 육성소 녀석들도 제 앞에선 설설 기어요.”

     

    내 말을 들은 황비가 결정을 내렸다.

     

    “알겠어요. 이 아티팩트는 공자님께 양도하도록 하지요.”

     

    좋아, 넘어왔다.

     

    “으음.”

     

    아버지가 탐탁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사용일은 이틀 후로 잡지요. 후작님, 어떠신가요?”

     

    “이틀이라….”

     

    아버지는 고민했다. 아무래도 내가 얘기했던 디버프가 저주와 비슷한 개념이라는 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너무 겁을 줘버렸네.

     

    상황을 무마하고자 끼어들었다.

     

    “기다릴 일 있습니까?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해버리시죠.”

     

    전원이 깜짝 놀라 내게 주목한다.

     

    당장 주치의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틀 후는 무슨.

     

    당근거래도 말 나왔을 때 바로 성사해야지, 하루 지나면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지금 바로 말인가요? 그건….”

     

    “문제 있습니까?”

     

    내 질문에 반박하지 못하는 황비.

     

    슬쩍 아셀라를 돌아본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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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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