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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미궁의 입구. 거대한 석판에 한쪽 손을 가져다 댔다.

       

       “출발할까요?”

       

       “그래.”

       

       리디아의 손을 붙잡은 채, 속으로 바랐다. 미궁에 들어가고 싶다고.

       

       우웅-

       

       그리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체내 깊숙한 곳.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곳이 울리더니, 이내 전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인다.

       

       길고 긴 터널을 눈 깜짝할 사이에 통과하면 이런 기분일까.

       

       평범한 방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자극에 파르르 떠는 것도 잠시. 리디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요나. 도착했으니까 눈 떠.”

       

       “넹.”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고 있었던 걸까. 천천히 눈을 뜨자 그곳에는 방금까지 있던 판그레이브 광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와 리디아를 중심으로 둥글게 펼쳐진 초원.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빽빽하게 들어찬 수해樹海에 가로막힌다.

       

       마치 이곳만이 안전한 장소라는 것처럼 노골적인 경계선.

       

       실제로 이 둥근 초원 지역은 안전지대라 불린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몬스터가 진입하지 못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미궁의 각 층에는 이러한 안전지대가 몇 군데 존재하고, 입구를 통해 진입하면 그러한 안전지대 중 한 곳에 랜덤하게 떨어진다.

       

       단, 신체접촉을 유지한 채 같은 층으로 이동하길 바란 경우에 한해서, 같은 안전지대로 워프 된다. 조금 전에 나와 리디아가 손을 잡은 채 이동한 것도 그래서고.

       

       이 또한 사랑의 여신이 직접 힘을 쏟아부어 개변시킨 미궁의 법칙…이라는 설정이다.

       

       “와…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겪으니 신기하네요.”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아. 그런 그녀의 뒤로 회색 묘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판그레이브 광장의 석판을 2m 크기로 줄인 것 같은 모양새. 미궁 밖으로 나갈 때는 다시 저 석판에 손을 대고 이동하면 된다.

       

       안전지대는 단순히 한숨 돌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미궁과 지상을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

       

       꼭 잡고 있던 리디아의 손가락을 놓아주고는 석판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디 보자…분명 여기쯤 있을 텐데.”

       

       “찾았다!”

       

       석판의 구석 어딘가. 본래라면 읽을 수 없을 터인 신언문자 사이로 큼직하게 적혀 있는 숫자 23.

       

       1층의 23번째 안전지대라는 뜻이다. 본래는 그냥 내 편의를 위해 집어넣은 설정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신이 모험가들을 배려해 숫자 부분만큼은 공용어로 적었다는 게 정설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해석이길래, 이제부터 그런 설정이었던 걸로 하기로 했다.

       

       “땅땅.”

       

       입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자니, 석판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리디아가 입을 열었다.

       

       “요나. 몇 번 구역인지 찾았어?”

       

       “아, 네! 여기 23번 구역인가 봐요 리디아 님!”

       

       “23번….”

       

       작게 중얼거리며 허리춤에 멘 다용도 벨트에 손을 뻗는 리디아. 벨트에는 비슷하게 생긴 주머니가 여럿 달려있었는데, 그중 하나에서 곱게 접힌 종이 뭉치를 꺼낸다.

       

       리디아가 그 종이 뭉치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가장 윗부분에 적힌 ‘1층’이라는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이거 그건가?

       

       그런 내 의문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뜸 들일 것 없이 바로 입을 여는 리디아.

       

       “1층 지도야. 보는 법 알아?”

       

       “몰라요. 하지만 리디아 님이 알려주시면 금방 배우지 않을까요?”

       

       헤헤 웃으며 그리 말하자, 리디아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손에 든 지도를 펼쳤다.

       

       대충 뭉뚱그려 땅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어설픈 타원. 다만 정 가운데에 그려진 거대한 나무 기호와 여기저기에 마킹된 동그라미와 숫자는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전지대와 중심부의 위치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곳이 미궁.”

       

       리디아가 하얀 손가락을 뻗어 23이라는 숫자가 적힌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우리가 있는 곳은 여기. 23번 구역. 왼쪽 구석이네. 이 주변 몬스터는 고블린이 대부분이니 운이 좋았어.”

       

       “하긴. 중앙의 세계수에 가까울수록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니, 일단 고블린부터 상대해 보는 게 좋겠죠.”

       

       “응. 요나는 고블린보다 약하니까.”

       

       “?”

       

       고블린보다 약하다니. 말이 심한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잘 무장한 고블린 하나의 전투력이 맨몸의 성인 남성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설정이었거든.

       

       평범하게 맞붙으면 당연히 내가 진다. 이쪽에서 먼저 칼을 쑤시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분명 들어올 때만 해도 1층 최약체 몬스터인 고블린 정도는 죄다 썰어버릴 거라며 의욕을 불태웠건만.

       

       이렇게 확인 사살 당하니 갑자기 힘이 쪽 빠지네.

       

       “쿠이쿠이….”

       

       고블린보다도 연약한 생물체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있자니, 리디아가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명확한 루트를 짜야 해.”

       

       “안전지대에서 다음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걸 반복하면 되는 거죠?”

       

       “…예습했어?”

       

       “대충 그런 거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리디아. 그런 그녀의 앞에서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엣헴거렸다.

       

       뭐…미궁의 안전지대나, 이를 활용한 탐험방식 등등. 전부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리디아의 옆에 밀착했다. 딱딱한 갑옷에 볼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으응?”

       

       갑자기 거리가 좁혀진 탓일까. 리디아가 당황해 물러나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달라붙어 지도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쩐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리디아. 그런 그녀를 향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엘리한테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좀 가만히 있어 주세요. 지도 보기 힘들잖아요.”

       

       “엘리 선배가 불쌍해. 이런 남자한테….”

       

       “제가 무슨 꽃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건 그만둬 주시겠어요? 전 그저 엘리의 몸과 재산이 목적일 뿐이니까요!”

       

       “그게 꽃뱀.”

       

       “에이 기껏해야 애완용 뱀이죠. 엘리가 가난해진다고 해서 버리고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남녀역전 세계라 그런 걸까. 엘리도 그렇고 리디아도 그렇고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재산만 목적인 줄 안단 말이지. 난 분명 ‘몸’과 재산이라고 했는데.

       

       애초에 엘리는 내가 공들여 만든 캐릭터였다. 지금은 사람이지만…아무튼 그만큼 애착을 지닌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그런 엘리가 돈 좀 없다고 모른 체 한다?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네.

       

       리디아의 미묘한 시선을 흘려넘기며 지도를 유심히 살피며 손가락을 짚었다.

       

       23번 구역부터 시작해서 17번, 6번, 92번을 거쳐 40번 구역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선을 그리며 물었다.

       

       “어때요? 고블린 중에서도 방랑 고블린을 노리고 짜본 건데.”

       

       1층은 고블린은 물론이요 혼래빗, 아이언 울프, 자이언트 멘티스, 홉 고블린 등. 다양한 몬스터가 등장하는 층이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오직 고블린…그중에서도 방랑 고블린이라 불리는 최약체뿐.

       

       녀석들은 무리에서 버려질 만큼 약한 개체인 것은 물론, 대부분 혼자 움직이기 때문이다.

       

       리디아는 잠시 지도 위로 내 손가락이 지나친 궤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다.

       

       “잘했어. 여기까지가 지도 보기의 절반이야.”

       

       “나머지 절반은요?”

       

       “길 잃어버리지 않기. 기습당하기 전에 기습하기. 함정 잘 피하기. 다른 모험가 경계하기.”

       

       그거 정말 독도법의 영역에 속하는 거 맞나?

       

       내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리디아가 벨트에서 손바닥만 한 나침반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미궁에서 사용 가능한 나침반이야.”

       

       “북쪽을 향하는 게 아니라, 계층의 중심을 향한다는 그거죠?”

       

       “응. 1층의 경우에는 언제나 세계수 쪽으로 향해.”

       

       미궁의 모든 계층에는 신의 유해가 하나씩 존재한다. 애초에 미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그리고 이 나침반은 그러한 유해에 이끌리는 성질을 지닌 물건이다. 덕분에 다음 안전지대로 향하는 방향을 헷갈리지 않을 수 있는 거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공략법은 어디까지나 지도 제작이 끝난 상층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중층만 가도 지도가 완전하지 않은 계층이 태반이고, 심층에 이르러선 지도는 무슨 새로운 안전지대 하나만 찾아도 길드에서 막대한 포상금을 줄 정도의 미개척지니까.

       

       근데 굳이 심층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나? 적당히 중층 정도만 가도 풍족하게 먹고 살 텐데….

       

       아니, 지금 거기까지 걱정하는 건 너무 이른 감이 있다. 고개를 휘휘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장비를 점검했다.

       

       갑옷의 매듭을 확인하고, 왼손의 손목 석궁에는 나무 화살을 걸어 쏘아낼 준비를 마쳤고, 오른손에는 리디아가 빌려준 단검을 들었다.

       

       그 모습에 만족스레 바라보던 리디아가 나침반과 지도를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나는 미궁이 처음. 그러니까 방향 잡는 법, 함정 간파하기, 모험가 대응…자잘한 건 내가 할게.”

       

       “전부 리디아 님이 하면 전 뭘 하면 되나요?”

       

       “몬스터를 죽여.”

       

       그리 말한 리디아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몬스터도 생명. 무기를 휘두르기 전에 망설이는 사람이 많아.”

       

       “아하?”

       

       “…요나는 아닐 것 같지만.”

       

       “그렇게 칭찬해 주시면 부끄러운데요.”

       

       “…….”

       

       일전에 보았던 위험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나를 훑어보는 리디아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고는 숲의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로. 본인 판단하에 움직이되, 멈추라면 멈춰.”

       

       “넹.”

       

       무기를 들자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신감이 다시금 차올랐다.

       

       조금 전에는 고블린보다 약하다는 말에 풀 죽긴 했지만…아무리 내가 응애라도 평범한 응애는 아니잖은가.

       

       고블린의 습성이나 약점 같은 걸 직접 짰던 사람이다. 설마 가장 약한 방랑 고블린 하나 못 잡을 리가 없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리디아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어린 쥬지! 멈춰라 고브!”

       

       “끼야아아아아악!!!”

       

       “씨앗 내놔라 고브!”

       

       “젖 덜렁거리면서 오지 마!!”

       

       “나도 처음이니 상냥하게 해주겠다 고브!”

       

       “고블린의 처녀 따윈 필요 없어!!”

       

       돌겠네.

       

       이놈의 고블린은 왜 발정 나 있는 거냐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몬…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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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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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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