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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0

       *

         

         “어우 지루해 뒤지는 줄 알았네.”

         

         

         모르드는 어깨를 뚜둑 풀며 교문을 나섰다. 기사학부 수업은 끔찍할 만큼 지루했다. 애초에 전쟁 시절을 모두 겪은 그가 대학 수준에서 무언가를 배울 리가 없었다.

         

         훈련은 지루하고, 대련은 시시하고, 전술 수업은 그저 교범만 들고 읽는 수준. 여기에서 뭘 배우길 바라느니 허스칼들 사이에서 대련을 하는 편이 낫다.

         

         

         “좋았어. 이제 우리 애들이나 보러 갈까!”

         

         

         프리첸카야는 삭막한 도시였지만, 드로안의 사내 답게 모르드는 그 와중에도 적당한 취미거리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고아원 봉사활동이었다.

         

         시작은 다소 강압적이고, 모욕적이었지만… 계기가 뭐 중요하겠는가.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면 그만인 것을.

         

         모르드는 어느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고아원을 향해 걸었다.

         

         그 야무진 꼬마들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애교도 많고, 활발하고, 당찬데다, 심지어 재능도 넘치는 아이들이다.

         

         

         ‘대체 어떻게 내 감각을 속이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현역 허스칼의 감각을 속이고 뒤에서 살금살금 걸어와 왁, 하고 놀래킬 때는 하마터면 도끼를 뽑아들 뻔 했지만. 뭐, 거기 원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잖은가.

         

         

         “모르드.”

         “…?!!”

         

         

         모르드는 화들짝 놀라 허릿춤에 손을 뻗으며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오싹, 하고 소름끼치는 살기가 골목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도사린 늑대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감각.

         

         그 섬칫한 살의, 단련된…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야생의 살기가 줄기줄기 뻗쳐 골목 어귀에서 몰려나왔다.

         

         

         ‘미친…!’

         

         

         모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익숙한 감각이다. 이 정도의 살기를 가진 존재는 칠용장 이외엔 한 사람뿐이니까. 단박에 알아챌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이건….

         

         개빡친 형님이다…!

         

         왜? 어째서 여기에…?

         

         

         “혀, 형님…?”

         

         

         프리첸카야에, 이 도시에 분노한 형님을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아니, 이건 잘못된 표현이다. 사람이 아니라, 군대가 필요할 테니.

         

         이 도시에 ‘그 사내’를 막아설 수 있는 군대가 있나…?

         

         

         “보고가 누락됐더군.”

         “형님, 잠시만. 제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어떻게 여기에 와 계시는지…. 그, 말씀이라도 하고 오시지….”

         “에시의 편지를 받았다.”

         

         

         에시의 편지…? 그 조카가 대체 뭐라 말했길래 형님이 저 먼 드로안에서 여기까지 달려와서는, 살기를 터트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단 말인가!

         

         

         “누구냐.”

         “…네?”

         “에시가 결혼한다는 그 사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폭발적인 야성이 터져 나온다.

         

         아, 에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그는 철없는 조카를 원망하며 눈 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마족들의 공포, 시산혈해. 몰살의 에이나르를.

         

         모르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무기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편히 죽을 수 있다는 듯이.

         

         더운 여름 햇살에도 골목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말해라. 요즘 에시가 만나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

         “그… 그것이….”

         

         

         모르드는 전력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대체 누구지? 그가 지켜보는 와중에 그 어떤 사내도 감히 에시디스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했거늘.

         

         봉사활동 시간에야 에시디스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지긴 했다만, 그래도 징조라는 것이 있기 마련 아닌가.

         

         젊은 혈기의 청춘이 연애를 한다면, 그처럼 노회한 전사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러나 에시가 최근에 만난 남자라고 해봐야….

         

         

         ‘어…?’

         

         

         이반 페트로비치.

         

         모르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나 있었다. 이반…! 에시디스에게 채식을 권하고 이따금씩 훈련을 봐주는….

         

         하지만 나이차이가… 아니, 그 전에. 이반 그 놈이 에시디스와 결혼을 하려 했다고? 그게 말이 되나?

         

         모르드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걸 말해도 되나? 이반은 절대 그럴 생각을 품을 놈이 아닌데.

         

         그 놈에게 연애감정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럴 시간도 없을 놈인데다, 모르드는 그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었다.

         

         아니.

         

         드로안의 사내는 결코 은혜를 잊지 않는다.

         

         모르드의 눈이 굳은 의지로 뜨였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들었다.

         

         

         “….”

         

         

         골목 어귀에 한 청년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몸에 품은 짙은 마력, 그리고 언제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어마어마한 분노가 그의 노화마저 빗겨내어. 젊은 시절, 전성기의 육체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괴물.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사내 중 하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에이나르의 눈동자는 보는 것 만으로도 영혼이 찢겨나갈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드 또한 드로안의 사내다. 드로안의 전사는 결코… 결코.

         

         

         “이반 페트로비치입니다, 형님!!”

         

         

         아무렴 형제 간의 우애보다 목숨을 빚진 과거가 더 무겁진 않다. 목숨 값이야 뭐 나중에 따로 치루면 될 일이니까.

         

         모르드는 굳건한 드로안 허스칼 답게 형님께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놈은 죽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죠! 형님, 그 자식 그거 살아있습니다!!”

         “흐으음….”

         

         

         에이나르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살의가 주춤 흐려졌다. 그는 곧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칠용장을 베고도 살아남았단 말이지.”

         “예, 형님!”

         “그건…. 놀랍군.”

         

         

         에이나르는 고개를 돌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찾아라.”

         ““예, 형님!!””

         

         

         골목과 담벼락 사이에 기대어 있던 허스칼들이 일제히 도시 전역에 흩어져 달려나갔다.

         

         

       

       

       

       Ep 13. 상견례

       

       

         

         

         나른한 오후, 에시디스는 음표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드로안의 여전사 다운 장렬한 최후였다. 그녀는 적어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녀는 반쯤은 낙서로 뒤덮인 악보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으뭭…!?”

         

         

         황급히 입가를 쓸어 닦고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다행히 교정에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으드드… 기지개를 켜며 악보를 추스르던 그녀의 눈에 기이한 것들이 들어왔다.

         

         담벼락 사이를 폴짝거리며 뛰어 사라지는 기괴한 거한 같은….

         

         꼭 마치 드로안에서나 볼법한 차림을 하고선, 학교와 골목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뭐야, 아직 꿈인가…?”

         

         

         에시디스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피곤했나, 무슨 이런 꿈을. 프리첸카야에 삼촌들이 왜… 아니, 삼촌’들’?

         

         그 중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근육 덮인 두꺼운 팔을 붕붕 휘둘렀다.

         

         

         “어 에시, 잘 지냈니!”

         “어… 어어…?”

         “우리 공주님, 나중에 보자! 삼촌이 지금 좀 바빠서!”

         

         

         그녀에게 따듯하게 말을 건넨 광전사 하나가 폴짝 담벼락을 뛰어 사라졌다.

         

         에시디스는 헤, 하고 입을 벌리고 있다가 곧 주위를 살폈다. 공포에 질린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삼삼오오 뭉쳐 여기저기 도망다니고 있었다!

         

         

         “꿈이…. 아니잖아악!!”

         

         

         에시디스는 기함하며 일어서서는 삼촌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달렸다.

         

         대체 왜! 학교에까지! 삼촌’들’이 몰려왔단 말인가!

         

         내 학창생활을 더 이상 망칠 순 없어!!

         

         관현악부는 반쯤 포기했고, 이제 막 성악과 애들이랑 좀 친해지던 차였는데!

         

         에시디스는 비명을 지르며 교문을 향해 질주했다.

         

         

        *

         

         

         엘리자베타는 들고 있던 펜을 툭 떨어트린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반문해야 했다.

         

         

         “…경은 다시 말해보게. 본인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전하.”

         

         

         궁내부총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또한 지금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에이나르 대왕이 지금 프리첸카야에… 그. 음. 이 도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있는 것 같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그것이… 아무래도 밀입국을….”

         “입국관리청은 대체 무얼 하기에 올해에만 밀입국자가 이리도… 아니, 됐다. 대체 일국의 국왕이 타국에 밀입국할 일이 뭐가… 아니… 그것도 됐다. 혼자… 혼자 왔다더냐?”

         “아닙니다. 전하. 허스칼로 추정되는 병력이 적어도 열 사람 이상 확인되고 있습니다.”

         “주여.”

         

         

         엘리자베타는 이마를 감싸쥐며 한참 끙끙거렸다.

         

         

         “얌전히 있진 않겠지? 무언가… 분쟁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보이던가?”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별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방위군을 소환하는 것은 어떠신지….”

         “그 에이나르의 앞에 군대를 던져주자고? 하하, 경은 농이 심하군.”

         

         

         엘리자베타는 전쟁을, 그것도 최전방을 겪었던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절멸부대 사령관직을 역임했으며, 절멸부대의 창설 초기 목적은 용사 파티의 후방 지원이었다.

         

         즉, 그녀는 용사 파티의 전투를 전선에서 직접 마주한 적이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란 의미였다.

         

         

         ‘에이나르는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뽑은 인선이었다.’

         

         

         [요새파괴자] 베올그린과 [시산혈해]의 에이나르는 다대일에 특화된 인선이었다. 이 자들을 상대할 때엔 병력의 수보다 병력의 질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에이나르는 드로안의 국왕이란 점이다. 국왕이 대체 왜 타국의 국경을 몰래 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싸움 밖에 없는 사내의 속을 누가 알겠는가.

         

         지금의 소란은 엘리자베타의 선택에 따라 전쟁으로 심화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문득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대외첩보부는 무얼 하기에 일국의 국왕이 사라진 것조차 감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응? 본인더러 대체 어쩌란 말이야….”

         

         

         엘리자베타는 미간을 꾹 누르며 흐느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정성껏 준비한 축제는 펑 터져버리고, 연애사업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하고, 귀족들은 말을 듣지 않고, 군부는 여전히 불안하게 쑥덕거리고.

         

         그 와중에 그나마 우방국이던 드로안에선 대뜸 국왕이 쳐들어와서는, 외교적 절차와 라인을 모조리 무시하고 도시를 쏘다니고 있다.

         

         그녀는 위경련을 느끼며 훌쩍였다. 이건 모두 알렉산드르 그 개자식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반카… 반카를 불러주게.”

         “예, 전하.”

         

         

         에이나르를 그나마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도시에 단 둘 뿐이다.

         

         엔리케와 이반. 엔리케는 지금 부재중이니…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 이반 뿐이었다.

         

         그래도 이반이라면, 에이나르와 면식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반카에게 본인을 찾아오라 하게.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할 일이군.”

         “하오나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에이나르가 다른 뜻을 품고 이 도시에 숨어들었다면 이 도시에 안전한 곳 따윈 없다네.”

         

         

         엘리자베타는 피폐해진 눈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그 시점, 이반은 에이나르와 독대하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에이나르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죽은 줄만 알았더니…!!”

         

         

         그는 심지어 이반의 묘비 앞에 헌화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배신감과 반가움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그는 이반의 무표정한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법 사내답게 변했잖나!”

         “엑.”

         

         

         이반의 곁에 서있던 이자벨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복잡하게 땋은 에이나르의 수염을 바라보다가, 이반의 얼굴을 보고는 이마를 탁 짚었다.

         

         

         “드로안 남자들이란.”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바이킹이 수염을 기르는 건 ‘상식’이잖아…?

    해피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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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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