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0

       “…….”

        

       자기가 전혀 다른 사람을 보고 ‘황녀님’이라고 부른 것이 부끄러운 건지 아닌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의외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시간을 돌릴 수라도 있지, 얘는 그러지도 못할 텐데.

        

       “마이어, 마이어…….”

        

       클레어가 아니라 ‘진짜 황녀’인 앨리스가 내 옆자리에 앉아 미간을 조금 모은 채 중얼거리다가,

        

       “아, 그래. 자치국 군 총사령관 이름이 필릭스 마이어였어.”

        

       나름대로 황녀로서 주변 국가에 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앨리스는 레나 마이어가 누구의 딸인지 금방 유추해냈다.

        

       그리고 나도 앨리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기억 저 깊은 곳에 묻혀있던 그 이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원작이나 게임 설정집에서 보았던 이름은 아니다. 게임에서 이름이 제대로 나온 자치국 인물은 총독인 막시밀리안 슈미트 뿐이었으니까.

        

       아제르나 전기는 새로 나온 캐릭터의 이름이 따로 밝혀지지 않으면 이름란에 ‘검은 생머리 여성’이나 ‘거칠어 보이는 남성’ 같은 식으로 표기된다. 이게 한 시리즈가 아니라 한 작품 단위로 적용되는지라, 전작의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도 누군가의 소개가 없거나 주인공 일행을 만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표현된다.

        

       솔직히, 신작 단위로 유입되는 플레이어보다는 시리즈 단위로 유입되는 플레이어가 훨씬 많을 텐데도 이미 대놓고 알고 있는, 심지어 오프닝에서까지 나온 캐릭터의 얼굴의 반 정도를 가려놓고 ‘붉은 머리의 청년’ 같은 식으로 묘사하니 가끔은 조금 웃기기도 했다.

        

       뭐, 필릭스 마이어라는 이름은 이쪽 세계로 오고 나서야 들은 이름이니 그거랑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했지만. 어쩌면 원작에서 총독 옆에 있던 독자 모델링이 존재하지 않던 엑스트라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습니다. 리클란트 자치국의 군인 가문, 마이어 집안의 독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무표정하긴 했지만, 그 말을 할 때만큼은 웬만큼 눈치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편입생이라고? 하지만 A반은 정원이 꽉 찼을 텐데.”

        

       “황제 폐하의 은혜 덕분에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앨리스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레나 마이어는 앨리스와 황제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보통의 부녀관계처럼 무난한 분위기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정작 앨리스는 내가 아카데미로 오기 전에 황제를 찾아가 화를 냈지만.

        

       어떤 식으로 화를 냈는지는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앨리스가 황제를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것은 평소에 황제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앨리스가 짓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앨리스의 시선이 나와 레나 마이어 사이를 오갔다.

        

       “오늘 오전에 식당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봐야 자기소개 정도뿐이었지만. 그 외에는 그냥 무표정하게 앉아서 시간만 보냈을 뿐이다.

        

       덕분에 아침에 뭘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 그래?”

        

       나를 더 쳐다봐도 별다른 소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앨리스는 다시 시선을 레나 마이어 쪽으로 돌렸다.

        

       “그래서…… 어때?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로 가는 거잖아. 자치국에도 괜찮은 아카데미가 몇 곳 있다고 들었는데, 외국으로 오는 게 어색하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앨리스의 말에 레나 마이어는 곧장 대답했다.

        

       “황립 론다리움 아카데미는 자치국에서도 이름 높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 특별히 편입하게 되었으니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니던 아카데미가 있었다면 친구들이랑 헤어지게 되는 거잖아?”

        

       “아직 아카데미를 들어가기에는 한 살 어립니다. 하지만 총독님과 황제 폐하께서 저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주셔서 편입할 수 있었으니 그저 여러분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음…… 그래?”

        

       우리보다 한 살 어리다는 이야기를 들은 앨리스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특별히 키가 작거나 신체 발육이 부실하게 보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레나 마이어의 얼굴은 다소 앳되어 보이기는 했다. 론다리움 아카데미의 입학생이 올해 열다섯이 되는 아이들이었으니, 레나 마이어는 올해 생일이 지났다는 가정하에 열 네 살이라는 뜻이다.

        

       상반신을 살짝 내밀고 있던 앨리스는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뭐, 아버지께서 생각이 있으니 편입도 허락하신 거겠지.”

        

       황제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레나 마이어를 더 수상해 보이게 만들었지만.

        

       앨리스의 그런 시선에도 레나 마이어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검성과 만났던 일은 어떠셨습니까?”

        

       나는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카데미까지 가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그동안 어색한 침묵에 빠진 여자애들 사이에 끼어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네 사람뿐이라는 것일까.

        

       샤를로트와 미아 크로우필드는 다른 의자에 앉아있었고, 제이크와 레오도 다른 의자에 앉아있었다. 어차피 남는 자리는 많았으니 그렇게 두 사람씩만 앉아도 자리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제이크와 레오는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샤를로트와 미아 크로우필드는 가운데 복도를 끼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었기에 우리 대화를 듣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두 사람 다 창가가 아니라 복도 쪽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 대화에 흥미가 있다는 뜻이다.

        

       하긴 두 사람 다 황제를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카데미에 들어온 목적일 테니까. 그보다 더 과격한 방법을 실행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실행할 애도 있었고.

        

       “검성……?”

        

       “아, 맞아, 언니, 검성이라는 분이 괜히 검성이 아니더라!”

        

       순간 레나 마이어가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소득이 있나 싶었는데, 그 옆자리에 앉아있던 클레어가 바로 신나서 반응하는 바람에 레나 마이어의 표정을 관찰할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고작 하룻밤 수련했을 뿐인데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어. 우리 검술을 보더니 취약한 점을 바로 알아차리시고 교정해주시더라. 거의 밤새도록 연습했다니까?”

        

       “……덕분에 지금까지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지만.”

        

       앨리스가 급격하게 피곤해진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에이, 그래도 네 검술도 많이 교정되었잖아. 분명히 두고두고 도움이 될 테니까. 다시 오라고 하시기도 했고.”

        

       “……제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다시 한참 차를 타고 들어간 다음 몇 시간이나 산을 올라야 뵐 수 있는 분을 주기적으로 뵐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을까?”

        

       “방학 때 들르면 되잖아?”

        

       “……그 작은 오두막에는 사람이 묵을만한 곳이 없어 보였는데?”

        

       “응? 그야 매일 산으로 올라가면 되잖아. 어차피 몇 시간 걸리지도 않고.”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난다면야 산을 오르내려도 수련을 할 만한 시간은 아주 많을 것이다.

        

       물론 앨리스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만약 그럴 계획이라면 나는 좀 빼줬으면 좋겠는데.”

        

       “그래?”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던 클레어가 금방 다시 눈을 빛내며 내 쪽을 보았다.

        

       “……그래도 검성씩이나 되는 분이니, 후에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뵈러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반짝이는 압박감을 차마 피하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잘 생각했어!”

        

       “검성이라면…… 프레데릭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클레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기 무섭게, 클레어의 옆자리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나 마이어가 끼어들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겨우겨우 기다렸던 모양이다.

        

       “응, 맞아.”

        

       클레어가 당황하지도 않고 대답하자, 레나 마이어는 조금 멍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검성께서…….”

        

       은거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유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검을 수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웬만한 왕족이나 귀족들 이름보다 더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야 ‘검성’이니까. 루카스도 황제를 이기기 전 일차적인 목표로 검성을 벨 생각이었고.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 대상이 나로 바뀐 것 같다만.

        

       “응. 혹시 너도 만나고 싶다면, 그때 같이 가보지 않을래?”

        

       클레어는 그 미친 친화력을 오늘 처음 보는 무표정 소녀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뽐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조금만 더 기쁘면 컨셉 깨지겠는데?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상관없지 않을까? 가르치고 말고는 검성께서 정하는 거고, 만나러 가는 것 정도로 뭐라고 하지는 않으실 거야.”

        

       “…….”

        

       그럴 것 같은 사람이긴 했다. 자기가 제자로 인정한 사람이 데리고 오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지. 귀찮은 게 싫어서 은거했다고는 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을 마다할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레나 마이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

        

       그리고 내 주변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왜일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

        

       컨셉 자체는 분명히 내가 더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함이 일었다.

        

       문제는 그 불안함의 원인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기후원 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일반 후원은 익명으로 하시는 것인지 공개로 하시는 것인지 곧장 구분이 가능하지만, 정기후원의 경우 그런 것을 구분할 방법이 없어서 한 분 한분께 어떻게 후원감사를 해드려야 할지 고민중입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기후원 보상이 추가되는 것이지만… 언제 추가될지 잘 모르겠네요. 혹시 추가되게 된다면 바로 정기후원용 보상을 받으실 수 있도록 계획을 짜두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