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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0

     

    아셀라는 수술 중인 라스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황녀님, 앉아 계시지요.”

     

    “됐어.”

     

    시녀장의 배려도 무시한 채 라스가 수술 중인 방 앞을 지킨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나 평소답지 못할까.

     

    평민의 집에 들어와서 위엄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도저히 평소의 자신 같지 않다.

     

    황궁을 오래 떠나 있었던 탓일까.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고 아셀라는 잘 알고 있었다.

     

    ‘다 라스 때문이야.’

     

    평소에는 그렇게나 경박하고 가벼운 태도를 보이는 남자다.

     

    하지만 환자를 눈앞에 둔 그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눈빛이 달랐다.

     

    생각해보면 업무를 할 때의 라스는 항상 진지한 태도였다.

     

    자신을 진찰할 때만 해도 절대 평소처럼 농담 한 마디 건네는 일이 없어진다.

     

    ‘어라. 라스가 일하는 모습을 처음 봤나?’

     

    그러고 보니 아셀라는 여태 라스가 내의원에 근무할 때나 자원봉사에 나간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밖에서는 늘 저런 태도일까?’

     

    어쩐지 자신이 모르던 라스의 일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조차 강경하게 의견을 피력하던 그의 태도를 생각하니 살짝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도 침착한 태도와 예의를 잃지 않는 라스였다. 분명 자신의 심기를 거슬러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환자를 고치는 일은 중요하니까.

     

    주치의로서, 치유사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자세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시선으로 라스를 볼지도 모르겠다.

     

    그런 발상에 도달하니 이번만큼은 누추한 오두막에 자신을 내버려 둔 그가 괘씸하다기보다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응원을 해주고 말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을 응원했다고?’

     

    그 생각을 하니 괜히 부끄러워지는 아셀라였다. 이 대가는 나중에 배로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우아앙!!

     

    그때 방안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방으로 들어가려던 아셀라였지만 타냐가 그녀를 저지했다.

     

    “타냐 공.”

     

    “황녀님, 선생님께서 나오시기 전까지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셀라가 한 발짝 물러섰다.

     

    실제로 제왕절개술은 아이를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절개 이후 10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이후의 처리가 오히려 한참 걸린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아셀라는 더욱 초조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 뻔했다.

     

    잠시 후에 쿵, 급히 문이 열렸다.

     

    라스가 아니라 클로에였다. 그녀가 급하게 외쳤다.

     

    “사, 산모에게 피가 부족해요! 피를 나눠주실 분이 필요해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수혈은 아예 없는 개념이다. 타인의 피를 섞는 건 흑마술 의식에나 있을 법한 행위다.

     

    주방 구석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아낙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라스에게 혈액검사를 받았던 아셀라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그녀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산모를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협력하는 게 좋을 것이야. 본녀가 보장하마.”

     

    그녀가 품에서 인장을 꺼내 들었다. 황가의 징표였다.

     

    “저, 저건.”

    “황족이셨습니까! 미처 몰라뵙고 이 무식한 것들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평민들이 아셀라에게 무릎을 꿇는다.

     

    평소 같으면 그 격의 차이를 증명하는 행위에서 만족감을 느꼈을 아셀라였겠지만 지금은 라스의 수술이 더 신경 쓰였다.

     

    “간호사, 저들을 쓰도록 해.”

     

    “어, 어읍. 혀, 혈액형이 맞아야 해서요. 검사를 먼저….”

     

    산모의 남편이 조심히 손을 들었다.

     

    “저부터 부탁드립니다. 아내를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무엇이라도 내놓겠습니다.”

     

    클로에가 남편의 손끝을 따 검사를 실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A형, 운 좋게 같으셔요. 드, 들어오세요! 아, 소, 소독하고!”

     

    남편이 클로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30분 후.

     

    마침내 수술이 끝난 라스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황녀님?”

     

    라스는 아셀라가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셀라가 라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피범벅이네.”

     

    “방금 수술을 마쳐서요. 구역질이 나실 수도 있으니 밖에 나가 계시는 게 좋습니다.”

     

    “안에 보고 싶어.”

     

    “아이고, 별로 추천 못 드리는데….”

     

    라스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아셀라가 노려보니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아셀라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역한 피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새빨갛게 물든 침대, 온갖 쓰레기가 담겨 봉해진 봉투.

     

    방금까지 라스가 치열하게 싸웠던 전투의 현장이었다.

     

    전쟁터와 다른 점이라면, 그곳에선 죽는 자만 있는 반면 여기엔 살아난 이만 있었단 것이었다.

     

    “허허, 아이고 이 녀석.”

     

    먼저 들어갔던 남편이 다른 침대 옆에 앉아 조그마한 포대기를 안고 있었다.

     

    팔에는 작은 거즈를 붙인 채다. 주사를 맞고 나면 라스가 붙여주던 그것이었다.

     

    깨끗한 침대에는 배가 홀쭉해진 산모가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신성력의 흔적이 남은 것이 치유술도 사용된 듯했다.

     

    아셀라는 남자에게 다가가 포대기 안의 아기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어이쿠, 황… 황녀 전하.”

     

    남자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포대기로 양손을 뻗었다.

     

    안아 든 아기의 인상은 별로였다.

     

    시끄럽게 울어대고, 냄새나고, 얼굴을 잔뜩 찡그려서 밉상이다.

     

    신기하게도 아셀라의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손으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뻗어댄다.

     

    “바보 같아.”

     

    아셀라가 무심코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이를 꺼낸 후 자궁 내부를 비우고 4회 봉합, 합병증이 생기지 않도록 꼼꼼히 조치한 후 복벽을 꿰맸다.

     

    중간에 한 번 문제가 생기긴 했다. 산모의 출혈량이 너무 많았다.

     

    출산 중에 산모가 사망할 때는 백중 팔십이 과다출혈에 의해서다. 다행히 남편이 같은 혈액형이고 바로 수혈할 수 있었다.

     

    모든 외과 과정이 끝난 후에는 클로에와 치유술로 마무리했다.

     

    즉각적으로 체력을 회복시키는 데는 자연 회복보다 당연히 좋다.

     

    보통 제왕절개 후 회복까지는 1주일 정도 걸리고 정상적인 생활까지는 한 달이 필요하다.

     

    치유술이 보조했으니 이틀이면 충분하다.

     

    남편에게는 그간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일러두고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푸하.”

     

    겨우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좀 살 것 같다.

     

    처음으로 해본 큰 수술이었다.

     

    “내가 개복을 하게 될 줄이야.”

     

    뭐, 언젠가는 했어야 할 경험이니 오히려 잘 됐다.

     

    상태창에 뭐가 많이 떠 있었다.

     

     

    [의학 계열의 새 스킬이 대기 중입니다]

    [개방될 스킬 : 3개]

     

     

    확인해보니 진단 루트에서 둘, 응급처치 루트에서 하나가 팝업됐다.

     

    “오.”

     

    진단 루트에서는 [CT촬영]과 [MRI]가 나왔다. 엑스레이보다 상세하게 환자의 신체를 구석구석 판단할 수 있게 된다.

     

    “휴고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겠어.”

     

    응급처치 루트에서는 [수술]의 다음 단계 스킬이 개방됐다.

     

    “이건 필수겠는데.”

     

     

    [수술(복강경)]

     

     

    복강경 수술.

    기구만 준비되면 환자의 배를 열지 않고 작은 구멍만 뚫고도 수술을 할 수 있게 된다.

     

    환자의 리스크가 훨씬 줄어드는 혁명적인 수술법이다.

     

    아셀라에게는 꼭 쓰고 싶은 스킬이다.

     

    어느 쪽도 의학 경험치를 더 올리면 습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배드엔딩 하나가 삭제되어 있었다.

     

     

    [No. 021 : 평민의 죄 5% → 0%]

    [삭제됨]

     

     

    예전에 수치가 오르는 걸 원상복구 한 적만 있었던 엔딩이다.

     

    아셀라가 오늘 얻은 경험에서 평민에 대해 호감을 가지기라도 했을까.

     

    “공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셀라가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죄송했습니다, 황녀님.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아냐, 재미있었어.”

     

    아셀라는 산들바람에 금발을 슬며시 흩날리며 대답했다.

     

    “평민들, 기뻐하더라.”

     

    “산모도 아이도 무사하니까요. 잘 됐죠.”

     

    “응. 행복해 보였어.”

     

    “실망하셨어요?”

     

    “내가 왜?”

     

    아셀라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갓 태어난 아기를 처음 봐서 신기했을 뿐이야.”

     

    “황녀님도 처음엔 저러셨어요.”

     

    “내가? 절대 안 그랬어. 나는 처음부터 위엄 있는 모습으로 태어났을 거야.”

     

    “물론 그러셨겠지요.”

     

    내 대답에 아셀라가 키득거렸다.

     

    “공자.”

     

    “예.”

     

    “아기는 좋아하니?”

     

    “좋아하는 편입니다. 귀엽잖아요.”

     

    “그렇구나.”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서 곱씹는지.

     

    아셀라는 흘러가는 구름을 잠깐 바라보고는 몸을 틀었다.

     

    “그럼 돌아가자. 휴가 중이었잖아.”

     

    “기억해주고 계셨네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시간을 뺏은 대가는 제대로 치르게 할 거야.”

     

     

    그 길로 나와 아셀라는 후작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평민들이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며 작물을 바치려 하길래 그건 놔두고 내 이름 소문이나 많이 내고 다니라고 했다.

     

    기껏 살려냈는데 겨울을 날 식량이 부족해져 굶어 죽으면 기분이 안 좋다. 이제는 입도 늘었으니.

     

    “영차.”

     

    그런데, 올 때와는 다르게 아셀라가 나와 같은 마차에 탔다.

     

    “왜 오실 때 탔던 마차에 안 타시고요?”

     

    “응? 아.”

     

    아셀라가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대답했다.

     

    “저쪽 마차, 바퀴가 나갔는지 탑승감이 안 좋았어. 너무 덜컹거렸거든.”

     

    “그러셨군요. 손보라고 말해놓지요.”

     

    그리 대답하고 반대편을 바라보니 미리 앉아있던 타냐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얜 가끔씩 이러고 있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

     

     

     

    휴가가 닷새쯤 남았을 때, 어김없이 아셀라가 아침부터 나를 귀찮게 해왔다.

     

    “공자, 산책가자.”

     

    “산책 엄청 좋아하시네요.”

     

    “하지만 오늘은 밖에 눈이 왔는걸.”

     

    “눈 말이죠.”

     

    마왕성 앞에는 지긋지긋하게 깔려있는데. 거기 가시면 눈으로 월광궁을 지으실 수 있을 거라고 해주고 싶었다.

     

    뭐, 제도는 내륙이라 비교적 눈이 안 내리기도 하니 신선하게 보이는 걸까.

     

    나는 아셀라를 따라 별관을 나섰다.

     

     

     

    “추워.”

     

    “눈이 오니까 춥죠. 북부의 겨울은 굉장히 길어요.”

     

    아셀라는 에스키모 설인처럼 온몸을 꽁꽁 감싸고도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장미 하나도 안 피었네.”

     

    “이런 계절에는 무리죠. 오히려 피어 있으면 기적이에요.”

     

    우리는 별관 뒤쪽, 노란 장미밭에 나와 있었다.

     

    지금은 장미밭이 아니라 민둥산이지만.

     

    “여기는 왜 나오고 싶으셨어요?”

     

    “공자랑 처음 만난 장소잖아.”

     

    “그렇지요.”

     

    “여기서는 뭐가 보일지 궁금했거든.”

     

    “보여요?”

     

    아셀라는 나를 향해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는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이거 뭔가 꾸미고 있는 얼굴인데.

     

    “후후, 공자는 봐도 뭔지 모를걸.”

     

    내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아셀라는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칠성추님 500 코인 후원 감사합니드아앗..! 덕분에 이번 한파를 손난로 더미에 파묻혀 지낼 수 있겠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네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밀린 소설을 보는 날이라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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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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