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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0

       “미안해요. 제 아랫도리가 좀 바빠서.”

       

       “……?”

       

       아차 적당히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이브가 내 말 하나하나에 너무 솔직하게 반응하니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이 짧은 시간에 정신적으로 연이어 얻어맞은 탓에 너덜너덜해진 이브. 그녀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괘, 괜찮아요. 어찌됐건 제가 싫어서라는 뜻은 아닌 거죠…?”

       

       “네? 앗, 네. 솔직히 이브 씨를 싫어할 이유는 없죠?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에요.”

       

       “…정말인가요?”

       

       또 나를 그럴듯한 말로 구워삶으려는 것이냐(X)

       

       처녀 졸업 각이 아직 살아있나…?(O)

       

       어쩐지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브의 목소리. 솔직히 흑화를 막는다 해놓고 너무 심하게 군 게 아닐까 싶어 미안했던 차였다.

       

       이브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로 한층 더 몸을 기울였다. 확 가까워지는 거리.

       

       엘프답지 않게 큼직한 이브의 가슴이 내 고간에 밀착했다. 마치 감싸기라도 하는 것처럼.

       

       “읏….”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떼려던 이브였으나, 이미 그녀의 머리는 내게 붙잡힌 상태였다.

       

       결국 이도 저도 못 하고 어중간한 자세로 나와 달라붙은 이브. 계획대로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약간의 미안함이 담겨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요. 당연히 이브 씨는 좋아하죠. 아까는 필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을 결정할 이유가 아닐 뿐 매력 포인트인 건 사실이잖아요?”

       

       “허면 완전히 제 청혼을 거절한 건 아니라고 봐도 좋을까요?”

       

       네 마음을 사로잡을 기회가 남아있는 건가(X)

       

       이게 남자의….(O)

       

       말로는 한 줄기 희망을 찾은 순정녀 같은 대사를 하고 있지만…머리속에는 야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니.

       

       최고잖아??

       

       판 대륙의 남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한테는 호감도가 올라갈 만한 포인트다.

       

       이브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듯 지금 당장은 안 돼요. 하지만 언젠가 제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그리고 이브 씨가 제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때 다시 반지를 선물해 주시겠어요?”

       

       “그때는….”

       

       “네. 그때는 직접 제 손에 끼워주세요.”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이브의 머리를 풀어주며 몸을 떨어뜨렸다.

       

       “아….”

       

       아쉽다는 듯이 탄성을 내지르는 이브. 미안하지만 서비스는 여기까지다. 아니, 하나 정도는 더 해도 괜찮겠지?

       

       씨익 웃으며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졌다. 그리고는 이브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그건 그거고…지난번에 이브 씨와 했던 약속은 유효해요. 세계수의 권능이 필요할 때 뭐가 됐든 한번 도와드릴게요. 이걸 어디에 어떻게 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

       

       잠시 침묵하던 이브가 이내 평소의 음험한 미소로 화답했다.

       

       “후후. 제게 백지수표를 쥐여주시다니. 괜찮으시겠나요?”

       

       이걸로 내가 너한테 무슨 부탁을 할지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X)

       

       남왕 능욕 플레이 쌉가능!(O)

       

       이브이브야.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니. 야한 거 안 해준다니까??

       

       하지만 저 마음은 이해한다. 당장 나 같아도 황제에는 별 생각이 안 들지만, 여황이라고 하면 개 같이 따먹히는 모습을 떠올리곤 하니까.

       

       …근데 나는 야설작가 출신이라 그런거고, 이브는 여왕 출신인데 대체 왜?

       

       문득 떠오른 의문을 꼼꼼히 포장해 뇌 깊숙한 곳에 쑤셔 넣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안 그러면 이브가 너무 불쌍해서 남자답게 한번 대줄 것 같았으니까….

       

       대신 피식 웃으며 이브의 위협 아닌 위협에 끄덕여 주었다.

       

       “당연히 괜찮죠. 애초에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들른 거니까요.”

       

       내 말에 만족했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브. 그녀가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흠흠. 그럼 저는 볼일도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요.”

       

       “뜻대로 하시길. 오늘은 너무 추태를 보인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너만 없으면 아무도 내 부끄러운 모습을 모를 것이다(X)

       

       내가대체무슨짓을저지른거람누가내기억을지워줘!(O)

       

       어느새 평소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실눈과, 여유로운 미소로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이브.

       

       속마음이 참 짠 내 나긴 하는데 아무튼 잘 회복한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완전히 이브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다행이고.

       

       덕분에 앞으로도 이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알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브의 프러포즈를 완전히 거절한 것이 아닌, 일단 거절한 뒤 조건부로 승낙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브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고.

       

       다른 여자랑도 할 거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3p가능을 외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지….

       

       나는 대체 무슨 몬스터를 만들어 낸 걸까.

       

       약간 자괴감이 몰려오긴 했지만 이 또한 내가 만들어 낸 설정의 여파. 즉,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였다.

       

       바실리우스로 생장시켰던 식물을 조종해 장식 비스무리한 느낌이 나도록 배치한 뒤, 권능을 해제했다.

       

       “후우….”

       

       머리에서 사라지는 나무 왕관의 감촉. 그리고 감각의 일부가 뜯겨나간 것 같은 공허함.

       

       그런가. 잠깐 쓰는 게 아니라 제법 오랜 시간 권능을 사용해 주변 식물과 연결되어 있으면 이런 부작용이 있구만.

       

       다리에 힘을 주어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고 이브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다음…언제쯤일지 물어봐도 괜찮을런지요?”

       

       그때까지 네 신상이 무사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X)

       

       오늘 얻은 딸감이 다 떨어지기 전에 찾아와라(O)

       

       “글쎄요. 뭐, 일이 있으면 들르겠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곧 1층을 클리어하고 2층에 올라갈 것 같으니까요.”

       

       “어머. 벌써 말인가요? 역시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니고 계시군요….”

       

       재능을 꽃피우기 전에 밟아버리겠다(X)

       

       강한 남자, 왜곡된 성욕(O)

       

       “넹.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문할 것 같네요. 혹시 괜찮다면 그때까지 제가 얻은 권능…바실리우스에 관한 정보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답니다. 바실리우스는 세계수님의 권능 중에서도 특별한 권능이랍니다. 저희 엘프에게도 먼 옛날의 역사지만 기록 자체는 확실히 남아있을 거예요.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요.”

       

       크큭. 뼛속까지 벗겨 먹어주마(X)

       

       오늘 입은 팬티 달라고 해볼까(O)

       

       “아하하! 걱정 마세요. 제가 설마 빈손으로 오겠어요? 대금은 따로 마련해 올 테니 자료만 잘 준비해 주세요.”

       

       “우후후. 믿어 주시길. 다른 누구도 아닌 요나 씨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천천히 나를 신뢰하게 만들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겠다(X)

       

       만족시키겠다는 말은 너무 야한 것 같으니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자(O)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성 있는 속내를 숨긴 이브와 악수를 마치고 만물상 에덴을 나왔다.

       

       엘리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이브는 요나가 사라진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치 식물과 건물이 하나가 된 것 같은 특이한 디자인. 이브에게도 오래된 고대 엘프의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는 양식이었다.

       

       식물을 지배하는 권능. 왕권의 상징. 세계수가 인정한 정통성 그 자체.

       

       초대 국왕의 이름과 같은 가장 오래된 권능. 바실리우스의 힘으로만 만들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우후후….”

       

       살짝 기분 좋아진 이브가 조금 전까지 요나가 누워있던 쇼파에 몸을 맡겼다. 아니, 그냥 똑같이 드러누워 숨을 깊게 마셨다.

       

       요나의 향기로운 체취가 살짝 남아있었다.

       

       “우와. 너무 노골적임다.”

       “두목. 변태.”

       

       구석에서 레몬과 애플이 시끄럽게 굴었지만 이브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요나가 남기고 간 흔적에 파묻혀,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되새기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던가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죠.’

       

       이미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 온 이브다. 기껏해야 몇십 년 더 기다린다고 해서 안달 낼 필요는 없다.

       

       그냥 요나를 도와주며 조금 기다리면 되는 일 아닌가.

       

       진짜 문제는 요나의 주변에 다른 여자가 많다는 것인데….

       

       ‘누구를 사랑하든, 아무리 더럽혀졌든 상관없어요. 마지막에 이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의 곁에 있기만 한다면…!’

       

       어차피 인간의 수명은 100년 내외! 그나마 오래 사는 수인족이나 드워프라도 150년을 넘기 힘들다!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자라 한들, 주어진 수명의 2배를 넘게 살기는 요원한 일!

       

       반면 이브는 어떠한가.

       

       이미 천년을 넘는 시간을 살았건만 좀처럼 쇠하지 않는 젊음. 아프거나 다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몇백 년…어쩌면 천년도 넘게 수명이 남았을 것이다.

       

       전부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세계수의 권능 덕분.

       

       그리고 요나 또한 세계수의 권능,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얻었으니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적어도 평범한 엘프와 비슷한…어쩌면 이브의 여생을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아아…기대되네요.”

       

       엘프에게 존버는 상식.

       

       전부 늙어 죽어 땅속에 묻힌 경쟁자들. 그 무덤 위를 뛰놀 하프엘프들을 생각하니 이브의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비적비비적.

       

       본능적으로 다리를 꼬며 쇼파에 몸을 문대는 이브.

       

       그 모습에 구석에 있던 레몬과 애플이 경악하며 가게를 박차고 나갔다.

       

       “저, 저. 완전 미친년임다 저거.”

       “레몬. 저거가 아냐. 두목.”

       

       미친년이라는 부분은 끝까지 정정하지 않는 애플이 바깥에서 가게의 문을 잠갔다.

       

       오늘도 판그레이브는 평화로웠다.

       

       아무튼 평화로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남역가챠는 주 5일 연재랍니다.

    그리고 요즘 연재 시간을 보면 아시겠지만…슬슬 지금처럼 일일연재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러니 어느날 제가 휴재하더라도 올것이 왔다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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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0

EP.80





       “미안해요. 제 아랫도리가 좀 바빠서.”


       


       “……?”


       


       아차 적당히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이브가 내 말 하나하나에 너무 솔직하게 반응하니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이 짧은 시간에 정신적으로 연이어 얻어맞은 탓에 너덜너덜해진 이브. 그녀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괘, 괜찮아요. 어찌됐건 제가 싫어서라는 뜻은 아닌 거죠…?”


       


       “네? 앗, 네. 솔직히 이브 씨를 싫어할 이유는 없죠?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에요.”


       


       “…정말인가요?”


       


       또 나를 그럴듯한 말로 구워삶으려는 것이냐(X)


       


       처녀 졸업 각이 아직 살아있나…?(O)


       


       어쩐지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브의 목소리. 솔직히 흑화를 막는다 해놓고 너무 심하게 군 게 아닐까 싶어 미안했던 차였다.


       


       이브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로 한층 더 몸을 기울였다. 확 가까워지는 거리.


       


       엘프답지 않게 큼직한 이브의 가슴이 내 고간에 밀착했다. 마치 감싸기라도 하는 것처럼.


       


       “읏….”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떼려던 이브였으나, 이미 그녀의 머리는 내게 붙잡힌 상태였다.


       


       결국 이도 저도 못 하고 어중간한 자세로 나와 달라붙은 이브. 계획대로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약간의 미안함이 담겨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요. 당연히 이브 씨는 좋아하죠. 아까는 필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을 결정할 이유가 아닐 뿐 매력 포인트인 건 사실이잖아요?”


       


       “허면 완전히 제 청혼을 거절한 건 아니라고 봐도 좋을까요?”


       


       네 마음을 사로잡을 기회가 남아있는 건가(X)


       


       이게 남자의….(O)


       


       말로는 한 줄기 희망을 찾은 순정녀 같은 대사를 하고 있지만…머리속에는 야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니.


       


       최고잖아??


       


       판 대륙의 남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한테는 호감도가 올라갈 만한 포인트다.


       


       이브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듯 지금 당장은 안 돼요. 하지만 언젠가 제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그리고 이브 씨가 제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때 다시 반지를 선물해 주시겠어요?”


       


       “그때는….”


       


       “네. 그때는 직접 제 손에 끼워주세요.”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이브의 머리를 풀어주며 몸을 떨어뜨렸다.


       


       “아….”


       


       아쉽다는 듯이 탄성을 내지르는 이브. 미안하지만 서비스는 여기까지다. 아니, 하나 정도는 더 해도 괜찮겠지?


       


       씨익 웃으며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졌다. 그리고는 이브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그건 그거고…지난번에 이브 씨와 했던 약속은 유효해요. 세계수의 권능이 필요할 때 뭐가 됐든 한번 도와드릴게요. 이걸 어디에 어떻게 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


       


       잠시 침묵하던 이브가 이내 평소의 음험한 미소로 화답했다.


       


       “후후. 제게 백지수표를 쥐여주시다니. 괜찮으시겠나요?”


       


       이걸로 내가 너한테 무슨 부탁을 할지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X)


       


       남왕 능욕 플레이 쌉가능!(O)


       


       이브이브야.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니. 야한 거 안 해준다니까??


       


       하지만 저 마음은 이해한다. 당장 나 같아도 황제에는 별 생각이 안 들지만, 여황이라고 하면 개 같이 따먹히는 모습을 떠올리곤 하니까.


       


       …근데 나는 야설작가 출신이라 그런거고, 이브는 여왕 출신인데 대체 왜?


       


       문득 떠오른 의문을 꼼꼼히 포장해 뇌 깊숙한 곳에 쑤셔 넣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안 그러면 이브가 너무 불쌍해서 남자답게 한번 대줄 것 같았으니까….


       


       대신 피식 웃으며 이브의 위협 아닌 위협에 끄덕여 주었다.


       


       “당연히 괜찮죠. 애초에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들른 거니까요.”


       


       내 말에 만족했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브. 그녀가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흠흠. 그럼 저는 볼일도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요.”


       


       “뜻대로 하시길. 오늘은 너무 추태를 보인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너만 없으면 아무도 내 부끄러운 모습을 모를 것이다(X)


       


       내가대체무슨짓을저지른거람누가내기억을지워줘!(O)


       


       어느새 평소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실눈과, 여유로운 미소로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이브.


       


       속마음이 참 짠 내 나긴 하는데 아무튼 잘 회복한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완전히 이브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다행이고.


       


       덕분에 앞으로도 이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알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브의 프러포즈를 완전히 거절한 것이 아닌, 일단 거절한 뒤 조건부로 승낙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브는 이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고.


       


       다른 여자랑도 할 거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3p가능을 외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지….


       


       나는 대체 무슨 몬스터를 만들어 낸 걸까.


       


       약간 자괴감이 몰려오긴 했지만 이 또한 내가 만들어 낸 설정의 여파. 즉,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였다.


       


       바실리우스로 생장시켰던 식물을 조종해 장식 비스무리한 느낌이 나도록 배치한 뒤, 권능을 해제했다.


       


       “후우….”


       


       머리에서 사라지는 나무 왕관의 감촉. 그리고 감각의 일부가 뜯겨나간 것 같은 공허함.


       


       그런가. 잠깐 쓰는 게 아니라 제법 오랜 시간 권능을 사용해 주변 식물과 연결되어 있으면 이런 부작용이 있구만.


       


       다리에 힘을 주어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고 이브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다음…언제쯤일지 물어봐도 괜찮을런지요?”


       


       그때까지 네 신상이 무사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X)


       


       오늘 얻은 딸감이 다 떨어지기 전에 찾아와라(O)


       


       “글쎄요. 뭐, 일이 있으면 들르겠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곧 1층을 클리어하고 2층에 올라갈 것 같으니까요.”


       


       “어머. 벌써 말인가요? 역시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니고 계시군요….”


       


       재능을 꽃피우기 전에 밟아버리겠다(X)


       


       강한 남자, 왜곡된 성욕(O)


       


       “넹.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문할 것 같네요. 혹시 괜찮다면 그때까지 제가 얻은 권능…바실리우스에 관한 정보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답니다. 바실리우스는 세계수님의 권능 중에서도 특별한 권능이랍니다. 저희 엘프에게도 먼 옛날의 역사지만 기록 자체는 확실히 남아있을 거예요.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요.”


       


       크큭. 뼛속까지 벗겨 먹어주마(X)


       


       오늘 입은 팬티 달라고 해볼까(O)


       


       “아하하! 걱정 마세요. 제가 설마 빈손으로 오겠어요? 대금은 따로 마련해 올 테니 자료만 잘 준비해 주세요.”


       


       “우후후. 믿어 주시길. 다른 누구도 아닌 요나 씨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천천히 나를 신뢰하게 만들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겠다(X)


       


       만족시키겠다는 말은 너무 야한 것 같으니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자(O)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성 있는 속내를 숨긴 이브와 악수를 마치고 만물상 에덴을 나왔다.


       


       엘리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이브는 요나가 사라진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치 식물과 건물이 하나가 된 것 같은 특이한 디자인. 이브에게도 오래된 고대 엘프의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는 양식이었다.


       


       식물을 지배하는 권능. 왕권의 상징. 세계수가 인정한 정통성 그 자체.


       


       초대 국왕의 이름과 같은 가장 오래된 권능. 바실리우스의 힘으로만 만들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우후후….”


       


       살짝 기분 좋아진 이브가 조금 전까지 요나가 누워있던 쇼파에 몸을 맡겼다. 아니, 그냥 똑같이 드러누워 숨을 깊게 마셨다.


       


       요나의 향기로운 체취가 살짝 남아있었다.


       


       “우와. 너무 노골적임다.”


       “두목. 변태.”


       


       구석에서 레몬과 애플이 시끄럽게 굴었지만 이브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요나가 남기고 간 흔적에 파묻혀,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되새기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던가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죠.’


       


       이미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 온 이브다. 기껏해야 몇십 년 더 기다린다고 해서 안달 낼 필요는 없다.


       


       그냥 요나를 도와주며 조금 기다리면 되는 일 아닌가.


       


       진짜 문제는 요나의 주변에 다른 여자가 많다는 것인데….


       


       ‘누구를 사랑하든, 아무리 더럽혀졌든 상관없어요. 마지막에 이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의 곁에 있기만 한다면…!’


       


       어차피 인간의 수명은 100년 내외! 그나마 오래 사는 수인족이나 드워프라도 150년을 넘기 힘들다!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자라 한들, 주어진 수명의 2배를 넘게 살기는 요원한 일!


       


       반면 이브는 어떠한가.


       


       이미 천년을 넘는 시간을 살았건만 좀처럼 쇠하지 않는 젊음. 아프거나 다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몇백 년…어쩌면 천년도 넘게 수명이 남았을 것이다.


       


       전부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세계수의 권능 덕분.


       


       그리고 요나 또한 세계수의 권능,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얻었으니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적어도 평범한 엘프와 비슷한…어쩌면 이브의 여생을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아아…기대되네요.”


       


       엘프에게 존버는 상식.


       


       전부 늙어 죽어 땅속에 묻힌 경쟁자들. 그 무덤 위를 뛰놀 하프엘프들을 생각하니 이브의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비적비비적.


       


       본능적으로 다리를 꼬며 쇼파에 몸을 문대는 이브.


       


       그 모습에 구석에 있던 레몬과 애플이 경악하며 가게를 박차고 나갔다.


       


       “저, 저. 완전 미친년임다 저거.”


       “레몬. 저거가 아냐. 두목.”


       


       미친년이라는 부분은 끝까지 정정하지 않는 애플이 바깥에서 가게의 문을 잠갔다.


       


       오늘도 판그레이브는 평화로웠다.


       


       아무튼 평화로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남역가챠는 주 5일 연재랍니다.

    그리고 요즘 연재 시간을 보면 아시겠지만...슬슬 지금처럼 일일연재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러니 어느날 제가 휴재하더라도 올것이 왔다 하시면 됩니다...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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