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뻘건 불길이 나무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고 있었다.
그 불길 사이로 언데드가 걸어나오는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제롤트는 어디에 있는가?”
노르딘 백작의 물음에 옆을 지키던 기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까 전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
“명예를 지킨 듯합니다.”
명예를 지켰다는 말.
애써 돌려 표현한 그 말의 뜻은 기사로서 생을 마감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노르딘 백작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작의 작위를 가지게 되었을때부터 옆을 지켜 준 기사였다.
기사 하인츠.
그의 얼굴과 몸은 불길에 그슬려 화상자국이 가득했다.
소중히 관리하던 수염이 불에 타 꼬부라졌고, 그 위의 얼굴은 반이 일그러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몸은 어떻던가.
검을 휘둘러야 할 두 팔중 하나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못난 주군을 따르게 해 미안하군.”
하인츠의 검이 오러를 머금고 스펙터를 베어냈다.
선명하지 않은 오러였으나, 그의 주군을 지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방에 불길이 가득합니다. 주군께서도 몸을 피하시지요.”
그의 말대로 이곳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곳은 산을 오르는 전력의 가장 뒤에 위치한 자리였다.
병력들이 포위되지 않도록 노르딘 백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후미로 내려온 것이다.
사전에 계획이 되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전쟁이 어디 계획대로만 흘러가겠는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산 위의 병력들이 통째로 포위가 되어 버리네.”
“….”
“불이야 꺼질 테니, 퇴로는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곧 엘프들이 올 것이다.
이 길을 지켜내 엘프들에게 넘겨주는 것.
그것이 노르딘 백작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군께서 이곳을 이끄신 기사는 오십. 살린 병력은 수천입니다.”
“죽기전에 공을 세우는군.”
“주군의 공을 높이는데 한 손 보태겠습니다.”
습관처럼 수염을 매만지려던 하인츠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수염을 만질 팔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스나이트 둘을 잡았으니, 팔이 아깝지는 않았다.
노르딘 백작이 농담을 하며 하인츠를 나무랐다.
“두 손을 다 보탰어야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
“허허, 팔 하나 없다고 무시하시는 겁니까?”
피식 –
죽기전에 나누는 대화 치고는 가벼웠다.
서로가 마지막 순간에 충분한 벗이 되어 주리라.
백작이 검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고통스럽지는 않은가?”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인내와 절제는 기사의 주요 덕목입니다.”
“크게 배웠네.”
백작의 뒤로 살아남은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얼핏봐도 삼십이 넘어가는 인원.
마법사의 도움 없이도 살아남은 그들은 정예중의 정예들이었다.
하인츠와 기사들 사이에 눈빛이 오고 갔다.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주군이시여, 무례를 용서하소서.”
“음?”
하인츠의 손이 벼락 같이 노르딘 백작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퍼억 –
풀썩.
망설임이 없는 깔끔한 동작.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 앞에서도 기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막내야.”
“예! 단장님!”
“주군을 모셔라.”
막내라고 불린 기사가 노르딘 백작을 등에 업었다.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 이곳을 지킨다!”
쿵 –
***
흠칫.
“이게 도대체…”
정신을 잃고 있던 병사가 깨어났다.
벤시에 홀려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무언가를 쥐고 있는 손을 내려다본 병사는 깨달았다.
크리스가 주었던 부적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뒤따라 오던 동료가 구겨진 갑옷을 부여잡고 있었다.
“자네도 살았는가?”
그 병사 또한 전날 밤에 크리스에게 점사를 받았다.
가슴이 꿰뚫려 죽을 수도 있으니 두꺼운 갑옷을 챙겨 입으라고.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르겠군.”
어린 시절 대륙전쟁을 경험해 본 노병이었다.
처참하게 구부러진 흉갑.
원래 입던 갑옷을 챙겨 입었다면 가슴이 꿰뚫려 즉사했으리라.
신비한 경험은 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이 친구랑 꼭 붙어 있으라더군.”
“서로가 서로를 살렸네.”
창술에 능한 병사들.
서로가 서로에게 궁합이 좋았다.
살아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었다.
“폭발이 피해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개 병사가 어떻게 마법진이 일으키는 폭발을 피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 병사는 전날에 크리스에게 이런 점사를 받았다.
‘충동적으로 나가기 전에 한번 망설이세요. 그것만 해도 운기가 완전히 바뀔거예요. 그것도 대운으로.’
그 말대로였다.
달려 나가기 전에 잠시간의 망설임.
그가 가려고 했던 곳에는 여지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나중에는 그와 동행하며 몸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손재수라고 했던가? 여분의 무기를 챙기라고 하시더군.”
그 말을 따라 창과 더불어 작은 도끼를 가지고 올라왔다.
놀랍게도 점괘는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연이은 공격에 창이 뚝 하고 부러졌던 것.
도끼를 챙기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으리라.
“오다가 들었네만, 높으신 분들도 상황이 비슷한 모양일세.”
“저 친구는 다치기는 하는데 죽지는 않을 거라더니 딱 그대로야!”
***
동쪽에서 올라가던 필라드 백작.
그는 의외의 상황들에 당황하며 전진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영지는 병사들을 훈련시킨다.
그중 필라드 백작령의 경우엔 훈련의 체계가 깊었다.
병법에 능했던 그가 여러 가지 상황에 맞추어 훈련을 진행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생전 와보지도 못한 산에서 척척 펼쳐지고 있었다.
“주군! 오른쪽에 샛길이 있습니다! 약초꾼들이 사용하던 길인 것 같습니다.”
“그곳으로 간다 하여도 병력이 많이 움직일 수 없지 않겠느냐?”
“중간중간 나무들이 베어져 있습니다! 진형을 갖추며 올라가기 적합합니다!”
산악전에 대비하는 훈련 또한 여러 번 있었다.
신기한 것은 훈련장의 모습과 이곳의 모습이 흡사하다는 것.
산세가 험악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병사들이 익숙한 듯 자리를 찾아가는 것만 보아도 익히 짐작이 가능했다.
“이대로라면 정상까지 금방 돌파할 수 있습니다!”
“당장 병사들을 진군 시켜라!”
언데드들과 싸우며 올라갈 방법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이곳의 지형을 잘 활용하면 유리한 지점을 수도 없이 점할 수 있으리라.
“여러 팔자들이 꼬인다고 했던가…”
그것이 이런 결과로 나타날 줄이야.
유리한 지점으로 진격하려던 백작의 머리로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네크로맨서의 마법을 조심하세요. 백작님은 언데드에게 낭패를 볼 수도 있겠어요.’
흠칫.
“병력을 정지시켜라! 저곳에 매복이 있을 수도 있다! 조금 더 돌아간다.”
명령에 따라 기사와 병사들이 방향을 바꿨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닿지도 않을 방향으로.
금세 이변이 일어났다.
“저..전방에 네크로맨서와 언데드들이 다수 출현! 선두를 향해 방향을 돌렸습니다.”
펼쳐 놓은 함정이 의미가 없어졌음을 알아챈 네크로맨서들이 작전을 변경한 듯싶었다.
전력을 썩힐 바에야 선두로 합류하기를 택한 것이다.
“….정말로 노르딘 백작이 선두에 섰으면 위험할 뻔했군.”
반대쪽에 위치한 케베만 백작 또한 비슷한 상황을 맞딱드렸다.
그는 솔직히 크리스의 점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의 말처럼 왼쪽 팔에 부상을 입었던 것.
“….듣도 보도 못한 일이로군.”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말.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
그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고 했던가.”
백작이 머리를 휘저으며 생각을 바꿨다.
진군에 신중을 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저히 작전대로 움직인다. 알겠느냐?”
“명을 받듭니다!”
***
“영혼의 수급은 어찌 되었느냐?”
“그…그것이”
대답하는 네크로맨서가 말을 더듬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상보다 제물의 양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확했다.
지금 공격해오는 저들이 생각보다 많이 죽지 않았다는 것.
보고받은 네크로맨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네놈들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느냐?”
원래 이곳에서 제물을 담당하던 네크로맨서도 할 말이 많았다.
갑자기 교황이 성기사들을 이끌고 합류하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 아닌가.
거기다 저들의 전술과 전략조차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저..저들이 알 수없는 방법으로 함정들을 피해가고 있습니다.”
설치해 놓은 함정과 마법진들이 속속들이 파헤쳐 지고 있었다.
병력을 포위하려는 작전마저도 어떻게 알았는지 연이어 피해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세운 계획을 전부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대로라면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
“….”
“모든 마법진들을 발동시켜 불을 질러라. 저들을 모두 죽여야 제물의 양이 맞을 것이다.”
“예!”
잠시 생각하던 네크로맨서가 입을 열었다.
“수십 년전에도 이렇게 우리의 계획을 방해했었지.”
클라우스와 아스테르의 이름을 가진 자들.
사실상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들 때문이었다.
같이 오던 네크로맨서가 죽어 버렸지만, 여전히 기회는 남아 있었다.
“6써클 이상의 네크로맨서는 앞으로 나서라. 그들을 각개 격파 할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기었던 그들이라지만 협공에는 어찌할 수 없을 터.
이미 그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해 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계획은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 두 사람이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붙어 다니고 있습니다…!교황마저 그들과 같이 움직입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가 왜 붙어다닌다는 말인가.
거기다 교황까지 같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떨어져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거늘.
강자가 있는 곳에 다른 강자가 붙어 있는 것은 전력의 손실이었다.
저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그들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될 일.
움직이려던 그가 몸을 멈춰 세웠다.
그의 눈에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하늘이….”
구름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방금까지 맑았던 날씨가 변하고 있었다.
연이어 보고가 들려왔다.
“성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이미 불로 막혀 있었다.
도저히 지나올 수 없는 불길로.
“맨몸으로 불길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얼른 다음 명령을!”
“이익…! 신성력을 다 소모하면 별것 아닌 놈들이다! 그들만 따로 처리…”
그의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에.
“에,엘프들이! 막아 놓은 길의 불이 꺼지고 있습니다…!”
네크로맨서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 엘프들이 왜 나타난다는 말이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