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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03

        

       “나는 자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네. 공감하고 있어….”

         

       너무나 또렷한 소리.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아프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로 사람이 가까이 왔으면 못 알아챌 리가 없다.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걸까?

         

       “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는 자네의 감정을 깊게 공감하고 있다네…. 이 통렬하리만치 다가오는 통감…! 사무치는 자네의 마음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의 파랑(波浪)과 같은, 그 물결 아래에서 잔잔한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휘몰아치며 분출되기를 축망(祝望)…. 아, 깊고 깊은 갈망은 마치 숙망(宿望)에까지 다다라 있음을…!”

         

       흐릿한 시야.

       저 멀리에서 검은 인영(人影)이 보이는 것 같다.

       냉장고와 자그마한 식탁이 있는 부엌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만 같은 그러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는 차마 그것을 또렷하게 담지 아니하였고, 어지럼증 때문인지 일그러지는 시야 속에서 그것은 이리저리 형체를 바꾸어가는 것이 마치 연기와도 같은 형상 같다.

       중국의 저승사자인 흑백무상(黑白無常) 중에서 새까만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흑무상(黑無常)이 저런 형상이 아닐까? 일그러진 시야 속 그 형체의 머리는 마치 길쭉한 모자를 쓴 것처럼 보였고, 온몸에 치렁치렁한 검은 것을 걸친 것이 그들이 입는 옷처럼 보였다.

         

       길쭉한 것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 주르륵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저것은 혀인가? 아니면 옷 일부인가?

       저것이 혓바닥이라면 교살(絞殺)당한 이가 내민 혓바닥과 견줄만하고, 저것이 부적이나 어떠한 옷가지 일부라면 저것으로 사람의 목도 능히 졸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구나….

         

       그 형체는 어지러이 몸을 일그러뜨리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 옛적 사람들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아니하다 목 놓아 외쳤건만, 왕후장상은 씨가 따로 있어 태생부터 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왼쪽 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

         

       아니. 오른쪽인가?

         

       “길가에 자라난 풀을 본 적이 있는가? 보도블록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잡초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농민공의 밭에서 자라나는 작물은, 공원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부자의 담 안에서 화려하게 가지를 뻗는 나무는 과연 어떠한가. 과연 그것의 앞에서도 왕후장상의 씨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모르겠다.

         

       “날 때는 맨몸으로 나오는 것이 이치라지만, 그 이후 몸에 걸쳐지는 것부터가 그들의 씨앗을 말한다…. 비단결에 몸을 감싸이고, 명품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긴 이름을 가진 소재로 만든 비싼 장난감들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느니라.”

         

       머릿속에 울리는 걸까?

       저 검은 그림자는 부엌 쪽에 있는데.

         

       “자네의 어릴 적이 기억나는가? 어미의 배에서 처음 나오고, 자네의 몸에 처음 옷이라는 게 닿았을 적을 기억할 수 있는가? 산파가 자네의 몸을 감싸주고, 자네의 어미와 아비에게 안기게 하였을 적 자네가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는가?”

         

       옷….

       아기 때 처음…. 걸쳤던….

         

       “주마등 속에서도 나오지 않을 그 기억. 하지만 자네의 몸은 알고 있네. 어릴 적이기에, 너무나 어릴 적이기에 머릿속에서는 그 기억의 편린조차 남지 아니하였어도. 자네의 몸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네.”

         

       옷….

       뭐지…?

       내 몸…?

         

       “자…. 떠올려보게. 자아, 내가 천천히…천천히 자네의 기억에 들어갈 것이야…. 어둠 속 깊숙한 곳에 자네의 정신이 빠지고, 마치 늪에 잠기는 것처럼 자네의 몸은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하지만 자네의 몸에는 편안함이 가득하고, 마치 겨울철에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따스함과 포근함이 자네의 온몸에 돌고 있다네…. 발끝에서부터 힘은 점점 빠지고, 다리는 힘이 완전히 풀려서 마치 따스한 욕탕에 몸을 담근 것만 같은 느낌이야…. 노곤한 몸이 풀리는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몸은 편안함을 느끼면서 머리끝까지 몸이 가라앉고….

       아…. 그러한 편안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네는 기억을 떠올리고 있어….

       그저 단 한 가지, 자네의 기억 속의 감각을….”

         

       감각…?

         

       “비단결의 감촉을 아는가? 손끝으로 훑어보았을 때 전율이 일 정도로 부드럽고, 그것을 몸에 감았을 적, 마치 선녀가 자네의 몸을 감싼 것만 같은 그러한 황홀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너무나 가벼워서 그것을 입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기도 하였던 그러한 경험이 자네에게 존재하는가?”

         

       …아니.

       그런 감각은 느낀 적이….

       없다….

         

       “자아. 떠올려보게. 손끝에는 무엇이 느껴지는가? 자네가 처음 느꼈을, 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그 감각은 무엇인가? 말한 것처럼 선녀의 피부 감촉처럼 느껴지는 그러한 보드라운 감각인가? 너무나 부드러워서 구름을 훑어보는 것만 같은 그러한 착각인가…?

       자아….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자네의 몸을 지금 감싸고 있는 무언가의 감촉은 무엇인가…?”

         

       감촉….

       느껴진다….

       약간 꺼끌꺼끌하고, 중간중간 보푸라기가 솟아있고, 뜯어진 자국 특유의 느낌….

       기운 자국이 있는 듯 중간중간 감촉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오랫동안 사용한 천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냄새….

         

       천….

       시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천….

         

       “가난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찾아오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대를 이어서 찾아오기 마련이지….

       자네의 부모 역시 그러하였네. 군벌들이 사라지고, 전쟁이 끝나서 마침내 나라가 평화가 찾아올 처지가 되었음에도 그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어.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어 걷기조차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싸구려 천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고, 때로는 온 나라에 식량이 없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지.

       그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도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저 발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부자들의 살을 찌우면서 또 다른 귀족들을 만들어내었네. 그들의 한 끼 식사가 자네 부모의 일 년 식사와 금액이 맞먹었다면 과연 믿어지는가…?”

         

       그런….

       아니….

       아니야….

         

       “부정하지 말게…. 자네는 알고 있었어. 당이 아무리 소리를 쳐도, 세뇌하듯 자네에게 아무리 말을 하더라도. 눈과 귀가 있는데 그것을 어찌 모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불평을 토해내면 누리고 있는 이 자그마한 행복조차 무너질까 봐, 부딪친다고 할지라도 달걀을 바위에 던지는 것처럼 너무나 허무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자네는 그러한 부조리를 알고 있음에도 그저 눈을 돌리고, 눈을 감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을 뿐이야….”

         

       아니….

         

       “깊은 좌절감, 부정의한 사회환경. 하지만 쌓여가는 분노는 표출할 곳이 없고, 복수를 정산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아니하였네. 노동을 할 적에 주어지는 싸구려 빵 하나, 그리고 텃밭에서 막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흙이 묻어있는 채소 약간. 손질조차 되지 않은 파와 빵을 번갈아 씹으면서 배를 채우고, 짠지로 소금기를 보충할 수 있음을 감지덕지하게 여기며. 자네는 가축처럼 그렇게 살아왔지.

       아. 가축이라면 이를 내보이며 물기라도 해보련만.

       그저 약간의 불만만 품어도 끔찍한 일이 닥칠 줄 알고 있으니 그저 짓밟힐 수밖에.”

         

       …부엌이 보인다.

         

       “자아. 자네는…. 우리는. 흐흐….

       부와 명예를 얻고 싶지만 얻을 길이 없고, 권력을 얻고 싶지만 영영 그러할 수 없지….

       사람의 눈(目)을 자른다고(十)하여 백성(民)이라 하였던가…? 사람의 한쪽 눈을 실명시키고, 눈을 멀게 한 뒤 인신공양을 하였으니. 백성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수를 불리는 풀이요, 공양에 쓰이는 가축이라.

       옛적부터 지금까지 백성(民)은 사람(人)이 아니었네.

       우리는 사람이 아니야….”

         

       부엌에는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의 그림자가 있다.

       어지러워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것이 분명히 보인다.

         

       “사람은 하늘에 예를 바치고 하늘에 기원을 하지.

       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이라.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지만, 악인을 놓치지 아니하는 법이니,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하늘은 악인을 놓치지 않고 잡아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만든다고 하지….

       하지만 어찌 가축이 감히 하늘에 탄원을 할 수 있으랴? 하늘에 계시는 상제(上帝)도, 도를 닦고 있는 신선도, 신선의 수발을 드는 선녀들도. 그들 전부는 오직 사람(人)의 말만을 들을 뿐, 사람이 아닌 것(非人)을 위하여 그물을 던지려 들지 아니하는 법이니.

       아, 그러하다면 사람 아닌 것들은 어디에 억울함을 토로해야 하는가?

       감히 어디에 탄식하고, 탄원해야 하는가?”

         

       검은 천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벌레로 우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

       저것은, 사람도 흑백무상도 아니다.

         

       어찌 벌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것이 사람(者)이라는 명칭이 붙을 수 있겠는가….

         

       저것은 요괴다.

       괴이하고 기괴한 무언가다.

         

       “사람이 위에 말한다면, 사람 아닌 것은 아래에 말하는 것이 이치일 것이니.”

         

       요괴가 속삭인다.

         

       “제단을 쌓으라.

       의식을 행함으로 복수를 할 기회를 주겠노라….”

         

       그리고 그 속삭임과 함께, 다시 눈이 감긴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를 깨버릴 것 같은 두통과 열은 사라졌다.

       그리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누가 온 흔적도 없었다.

         

       다만 아플 적에 들었던 목소리는 너무 또렷하게 남아서.

       그저 꿈일 것이라고, 아팠을 때 환상을 본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제단.’

         

       지금, 이 순간에도 물을 펑펑 쓰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있을 부자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동해서.

         

       그래서.

         

       ‘…어떻게 만든다고 했더라?’

         

       …그 의식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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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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