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05

        

       땅을 판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랴.

       넓게 파도 제 몸 눕기도 좁은 것이 현실이요, 깊이 파도 그것이 땅 위에 세워진 집만 하겠느냐?

       짙은 흙내음은 싱그러운 초목의 냄새에 비할 바가 되지 아니하며, 맞이하는 벌레들은 그림자(影)를 뜻하는 글자의 형상을 딱 빼닮아 수많은 다리가 달려있으니 그 성질 또한 그림자와 같아 음습하기 그지없다.

       날개 달린 새들도 없어 땅을 기어 다녀야 하는 이들에게 무어 영광이 있으랴? 그리하여 하늘조차 이고 살지 못하는 이곳에는 오직 죽은 자가 관을 짜서 제 몸을 뉠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다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돌로 만든 관은 고사하고 나무로 짠 관조차도 사치에 불과할 것이니.

       헌 옷을 둘둘 둘러싸서 땅속에 몸을 뉘는 것조차도 호상이다 할 것이다.

         

       그러하니 어찌 그럴싸한 무덤 하나 갖출 수 있겠는가.

       아! 어두운 밤을 이불처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한들 비바람 막아줄 무덤이 없으면 그것이 풍찬노숙(風餐露宿)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이며, 제 몸을 보호해줄 관짝 하나 없으니 침상조차 없는 것과 같음이니 거적때기 두르고 길거리를 전전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며, 지전 하나 만족스럽게 태우지 못하여 저승에서 쓸 돈이 없으니 생전 가난했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이냐.

         

       가난은 어쩜 이리도 끈질긴지.

       죽어서도 그 가난의 굴레를 쉬이 벗어날 길이 없다.

       가난한 이들은 제 몸 넣을 무덤터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권세 있는 이들은 산 하나를 능(陵)으로 삼아 죽어서도 그 부와 권력을 떨치며 자랑하니.

         

       이것을 보고도 어찌 세상이 공평하게 돌아간다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어쩌겠느냐.

       거인의 걸음걸이는 족적 하나하나가 크게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거인이 쓰러진 자리는 산맥이 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감히 수북하게 죽어도 먼지가 되는 것으로 그치는 백성들이 어찌 그것에 대해 불평하고 감히 넘볼 수 있겠는가.

         

       힘 있는 자들이 거인이라면 백성은 먼지.

       그렇기에 백성은 사람이 아니다.

       죽어도 먼지밖에 되지 못하는 이들이 벌레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하지만 그렇기에 이들이 행하는 주술은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땅을 기고, 땅을 파고, 하늘보다는 땅에 가까운 이들.

       하늘에 속해있는 사람보다 땅에 속해있는 벌레이기에 이들은 주술 의식을 행할 수 있었다.

         

       “모월 모일. 장(葬)을 치르고자 하니 염라께옵선 저희를 굽어살펴주소서.”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제단.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법.

         

       그들이 만든 제단은 하늘을 뜻하는 원은 온데간데없었고, 사각형과 팔각형으로 가득하였다.

       마치 네모난 관 여럿이 가지런히 들어갈 것처럼 네모나게 파헤친 땅 위에 흙더미를 그러모아 팔각형으로 형태를 잡아 봉긋 솟아오른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네모난 판을 올린 뒤 빨간색과 검은색 펜으로 팔각형을 여럿 겹치도록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 제사에 쓸법한 향 하나에 불을 피우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피를 그릇에다가 담아 향의 앞에 두었다.

         

       “혈연(血緣)이 없으되 어찌 세상의 인연이 핏줄만 있겠습니까? 사제(師弟)의 인연은 부자의 그것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고, 은원(恩怨)의 깊이는 살이 아닌 뼈에 새기는 것이니 죽은들 감히 잊힐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선 인연으로 제사를 지냄을 갸륵하게 여기시옵고, 마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기특하게 보아 굽어살펴주소서.”

         

       “굽어살펴주시옵소서.”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모여있는 빈민들.

       흙먼지가 잔뜩 묻어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마치 어두운 밤 홀로 피어나 춤을 추는 도깨비불처럼 그들의 눈빛은 빛났고, 구부정했던 허리는 쭈욱 펼쳐져 있었다.

       다만 그들의 몸이 잘게 떨려오는 것은 기대감과 불안감에 그러한 것일 것이다….

         

       주술 의식.

       아무리 배운 것이 없다고 한들 주술에 대해 모르겠는가.

         

       그들은 안다.

       방법만 알면 무지렁이라 할지라도 주술로 기기괴괴한 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가혹하리만큼 거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 역시도.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제단’의 흉험한 모습이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핏물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불러오고, 코끝에 비릿하게 감도는 혈향은 지금이라도 의식을 행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목불식정(目不識丁)이라는 말처럼 제 눈앞에 고무래를 두고도 정(丁)자를 모르는 무식한 놈이 아닌 이상에야 주술 의식을 행하게 된다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아직.

       아직 늦지 않았다.

         

       제단은 만들었으되 의식은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은 아니다.

       그저 나는 무섭노라고, 그냥 힘들지라도 이렇게 살아가겠다고.

       평소 쌓여왔던 분노와 불만 정도야 억누르고 살아가겠노라, 얼마나 지불해야 할지 모르는 대가를 지불하느니 차라리 그렇게 앞으로도 살아가겠노라.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서 나가거나, 아니면 다른 이들이 의식을 끝마치는 것을 기다린 다음 절대 발설하지 아니하겠노라고 맹세하고는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면 된다….

         

       “….”

         

       “….”

         

       “….”

         

       그래.

       그저 얼굴 조금 붉히고, 체면 조금 깎이는 것으로 끝이다.

       높으신 분도 아닌 이상에야 그들에게 체면이 무슨 큰 가치가 있으랴?

       그냥 평소 날품팔이를 할 때 다른 인부들과 멱살을 잡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

         

       “….”

         

       “….”

         

       하지만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등을 돌리는 이들도 아무도 없다.

         

       모두가 무언(無言)으로 동의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의식을 행하겠노라고.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이것을 해야겠노라고.

       이렇게라도 울분을 토해내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것 같기에, 이 기회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노라고.

         

       그들은 침묵으로 그렇게 소리를 지른다.

         

       그리하여 일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을 분기점.

       그곳에서 빈민들은 발을 디뎠다.

         

       “염라께 고합니다. 고인께서는 모월 모일 술시 명부(名簿)에 기록된 대로 허락된 수명을 마치고 때가 되어 무상야(無常爷) 사필안(謝必安)과 무상야(無常爷) 범무구(范無救)를 뵈어 명부에 인도되게 되었습니다.”

         

       선을 넘기로 각오한 자들에게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으랴.

       그들은 사교(邪敎)에서나 할법한 행위를 거침없이 행하기 시작하였다.

         

       길거리에서 사 온 싸구려 인형과 붓을 꺼내 제단에 올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핏물에 붓을 넣어 흠뻑 적신다. 그러고는 피를 먹물로 삼아 인형에 글귀를 써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 성씨와 이름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요,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핏줄이 조금도 섞이지 않는 완전한 타인의 것이었다.

         

       “무상(無常) 흑야(黑爷)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재착이(正在捉你)라 하여 몸을 사슬로 묶고 족쇄를 채우사 망자를 끌고 명부로 가 재판을 받게 하니 혼(魂)은 아래로 떨어져 고통을 받고 백(魄)은 온 세상으로 퍼져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나이다.”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이니 어찌 그것에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백은 찢기고 흩어졌으니 고통은 있으되 마땅히 이치를 따른 것이며, 백은 아직은 하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나 그 성질이 가벼워 언젠가는 귀천(歸天)을 할 것이니 대왕의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음을 알겠습니다.”

         

       빈민들은 이름을 새긴 인형을 천으로 칭칭 감고, 미리 파놓은 자그마한 구덩이에다가 집어넣었다.

       마치 정말로 장례를 치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禮)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었으니.

       보통 장례라 하면 죽은 자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이 대부분이거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지금 묻힌 이는 악인이어서 흑무상(黑無常)에게 사슬로 묶이고 족쇄를 차인 채 끌려가 혼이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미 그렇게 되었다.’라는 내용이었으니.

         

       이것은 예(禮)가 아닌 저주(咀呪)였다.

         

       “고인께서 떨어진 곳은 그 층수가 열여덟이니 그 이름도 십팔층지옥(十八層地獄)인지라. 내려갈수록 넓고 위로 갈수록 좁으니 어찌 등반이 쉽겠습니까? 혼이 가볍다고 한들 땅의 무거움에는 미치지 못하며, 망자의 망향(望鄕)이 아무리 강한들 판결의 지엄함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대왕께 바라옵건대 제를 올리나니, 망자가 홀로 고통을 겪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대왕께 바라옵건대 제를 올리나니, 망자가 홀로 고통을 겪지 않게 하시옵소서.”

         

       빈민들은 입으로는 저주를 담으면서도 그 행동은 정중했으며, 복창하는 부분에서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모아 동시에 말하는 것이 정말로 귀한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절을 한 번, 두 번.

         

       “여기 고인과 함께하기를 바라며 순(殉)을 택한 이들이 있나니 고인의 곁에 묻어 함께 장례를 치르니 염라께옵선 이들을 굽어살피소서!”

         

         

       

         

       

       

    다음화 보기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