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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1

     

    아셀라의 지팡이가 황금색 마나를 기묘한 방향으로 뿜었다.

     

    그려진 다섯 개의 마법진은 고차원의 틈새에서 예술품과도 같은 조형을 이루었다.

     

    ‘앗.’

     

    순조롭게 시전이 이어지던 도중, 마지막 마법진이 삐걱거리며 궤도가 비틀렸다.

     

    라스의 앞이라 조금 들뜬 탓일까.

     

    천리안은 몇 번을 시전해도 어려운 마법이기도 했다.

     

    ―후욱!

     

    아셀라의 시야가 빨려 들어간다.

     

    다음 순간.

     

    ―화르륵!

     

    입김이 나오는 겨울은 사라지고 뜨거운 열기가 덮쳐온다.

     

    눈앞에서 대화재가 일어났다.

    고트베르크 저택이 불타고 있었다.

     

    ‘윽.’

     

    아셀라에게 극심한 두통이 일었다.

     

    전과 다르게 시전이 불안정했다. 당장에라도 의식이 튕겨 나갈 것 같다.

     

    마치 영화 필름을 조각내 붙여다 상영기에서 빨리감기로 돌리는 느낌이다.

     

    자신의 입이 멋대로 소리를 외쳐댔다.

     

     

    ―집, 내 집이!

    ―네리아! 시버스! 거기 아무도 없나!

    ―나는 후작가의 영식이다! 거기 너, 당장 저택의 불을 꺼라!

     

     

    ‘뭐야?’

     

    아셀라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잘 아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라스야. 이건 라스의 시점이야.’

     

    시모어의 조언은 정확했다.

     

    황실 밖에서 시전한 천리안은 그녀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고트베르크가 반역죄로 멸문한 이후구나.’

     

    다만 전혀 유쾌하진 않았다. 어마무시한 절망이 아셀라를 덮쳐 짓눌러왔다.

     

    라스가 느끼게 될 감정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무너지는 저택에 달려들어 어떻게든 불을 꺼보려 양동이를 집어던졌다.

     

    적디적은 양의 물은 넓은 바다에 한 줌 재를 뿌린 마냥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증발해갔다.

     

    고트베르크 가문이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화아악!

    다시 한 번 시야가 점프했다.

     

    같은 장소다. 고트베르크 저택이다.

     

    아니, 정확히는 저택이 있었던 터.

    이제는 흔적만 남은 황폐한 땅이 됐다.

     

     

    ―훌륭한 땅이다! 멍청한 제국 놈들. 이런 명당을 버려두다니!

    ―지금부터 여기는 우리 천둥족이 접수한다!

    ―족장님을 따르라! 복종하라! 찬양하라!

     

     

    그간 고트베르크가 지켜왔던 북부의 성벽이 무너졌다.

     

    모피로 몸을 덮고 도끼를 든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야만족이야.’

     

    바바리안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이다.

     

    그들은 제국의 북부보다 더욱 북쪽인 극한의 땅, 야생을 문명도 없이 누빈다.

     

    기세가 등등해진 야만족 대군이 제국을 향해 돌진한다.

     

    마지막까지 북부에서 삶을 구가하던 제국민들이 처참하게 유린당한다.

     

    그것이 한때 고트베르크 후작령이었던 땅의 최후였다.

     

    그 장면을 몰래 숨어 지켜보던 자신― 성을 잃은 라스가 도망친다.

     

    가쁜 호흡에는 슬픔과 고독이 섞였다.

     

    와중, 다리가 꼬여 차가운 땅에 쓰러졌다.

    입을 막았던 양손에 토혈이 묻어나왔다.

     

    분한 마음에 양 주먹을 꽉 쥐어보지만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라스의 고통이 비수가 되어 아셀라의 심장을 아련하게 찔렀다.

     

    가족을 잃은 그의 슬픔이, 지난 시간을 낭비한 후회가, 세상에 대한 증오가 몰려왔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셀라는 한 가지를 다짐했다.

     

    ‘이런 미래는 있어서는 안 돼.’

     

    라스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괴로워하며 매달려오는 건 좋다.

     

    자신 없이 맘대로 행동했다가 큰 코 다치는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멸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폐하는 병마 때문에 곧 돌아가셔.’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 음모를 꾸며 시해한다.

     

    그때 관련된 주치의와 치유사는 모두 반역죄로 잡혀 처형당한다.

     

    보았던 미래에서는 차기 황제가 된 자신이 처형을 진행했지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반드시 할 일이다.

     

    ‘라스가 여기에 관련되어선 안 돼.’

     

    그 결과로 북부가 무너지고 야만족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가.

     

    ‘라스에게 알릴 수는 없어. 믿을 리도 없고, 경솔하게 행동했다가 망칠 수도 있으니까.’

     

    현실에서는 몇 년 뒤가 아니라 당장 내일 일어날지도 모른다.

     

    ‘내가 막아야 해.’

     

    아셀라가 결심한 순간이었다.

     

     

    ―후욱!

    또 한 번 시야가 바뀌었다.

     

    ‘어? 돌아왔어.’

     

    고트베르크 후작가의 저택.

     

    사방이 조용하다. 따사롭게 내려쬐는 햇빛에 눈가가 살짝 아프다.

     

    산들바람이 불면 사락, 만개한 노란 장미밭이 스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장미밭의 한 가운데.

     

    완연한 봄의 기운을 사랑스럽게 즐기고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수수한 드레스로 감춘 허리가 늘씬하다.

     

    바람이 쓰다듬으면 그녀의 허리가 넘게 자란 새하얀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흐트러진다.

     

    햇빛을 반사한 백발은 은색으로 보일 지경으로 찬란했다.

     

    ‘누구야?’

     

    아셀라는 그녀를 향해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가 아셀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화악!

     

    “읏.”

     

    아셀라는 어마어마한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녀님.”

     

    어느새 라스가 자신을 부축하며 허리에 팔을 둘러주고 있었다.

     

    아셀라는 지팡이를 떨어트리고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무리하셨습니다. 5위계를 쓰시다니요.”

     

    “아냐, 평소엔 잘 됐는데….”

     

    “처방하겠습니다.”

     

    “어, 응?”

     

    라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아셀라의 앞에 그가 무릎 꿇고 앉았다.

     

    그와 지근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한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잠깐 숨을 멈췄다.

     

    라스가 아셀라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컸다. 아셀라의 얼굴을 한 손에 넣을 정도였다.

     

    “코피가 나고 계셔요.”

     

    “몰랐어.”

     

    “고개 젖히시면 안 됩니다.”

     

    라스가 거즈로 아셀라의 코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당연하지만 고위계의 마법일수록 마력회로에 부담을 많이 주지요. 연습도 좋지만 너무 자주 시전하지는 마세요.”

     

    “…알았어.”

     

    얼굴을 잡힌 상태라서 그랬을까. 아셀라는 순순히 대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마법이었나요?”

     

    “음… 재밌는 마법.”

     

    “하하, 별로 안 그래 보였는데요. 잠깐 불빛이 반짝하더니 황녀님이 쓰러지셨거든요.”

     

    “그래 보이는지는 몰랐네.”

     

    “불꽃놀이 마법이라면 5위계보다 효율 좋은 게 있지 않아요?”

     

    “응. 많이 있어.”

     

    아셀라가 가볍게 진 두 개를 그리고는 불꽃을 피워올렸다.

     

    “따뜻하네요.”

     

    “효율적이지?”

     

    아셀라가 키득댔다. 코피의 잔여물이 말라붙다 못해 얼어붙어서 킁킁댔다.

     

    그녀는 방금 천리안으로 스쳐 지나간 장면을 떠올렸다.

     

    “라스, 네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에 없어요.”

     

    “흐응. 너처럼 새하얀 백발이었겠지?”

     

    “그렇지 않았을까요.”

     

    혹시 천리안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보여주기도 하는 걸까.

     

    자신의 시야에서만 볼 수 있는 마법도 아니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평생 궁에서만 마법을 연습했다면 결코 알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만일 천리안에서 본 것처럼 라스가 반역죄로 자신의 곁에서 사라진다면.

     

    절망하고, 분노하고, 죽어버린다면.

     

    ‘…그건 싫어.’

     

    이 남자는 조금 더.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라스.”

     

    “예.”

     

    “앞으로도 내 말만 들어.”

     

    “하하, 그러죠.”

     

    자신의 속도 모르고 실없이 웃는 라스였다.

     

    천리안이 없었다면 이 위기도 결코 알 수 없었겠지.

     

    …더 많은 미래를 보고 싶다.

     

    모든 미래를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 아셀라였다.

     

    “그럼 일어서실까요. 날이 추우니 슬슬 들어가시죠.”

     

    “벌써? 싫어. 거리도 다녀오자.”

     

    “코피 나셨잖아요. 안 돼요.”

     

    “음… 그러면 저기 숲이라도.”

     

    아셀라가 저택 안의 버드나무 숲을 가리켰다. 라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죠 뭐.”

     

    라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셀라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조금 놀란 아셀라가 라스를 노려보았다.

     

    “손은 왜 잡아.”

     

    “추워서요. 방금까지 불꽃 만들고 계셨으니까 따뜻하잖아요.”

     

    “내가 난로니?”

     

    “난로보다는 찜질팩에 가깝죠.”

     

    아셀라는 인상을 구기며 반대쪽 손으로 땅바닥에 쌓여있는 눈을 한 웅큼 집어 라스의 목덜미에 집어넣었다.

     

     

     

    ***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라스, 몸 조심히 지내거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라버니!”

     

    체감상 정말 짧았던 휴가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 네리아의 마중을 받았다.

     

    “도련님, 다음에 돌아오실 때도 연락 주십쇼! 제도 과자도 사다 주시고요!”

     

    보리스를 포함한 기사나 시종들도 우르르 저택을 나와 배웅해줬다.

     

    “오랜만에 후작가에 돌아와서 좋았군요.”

     

    브루노의 감상이었다.

     

    “자네들도 아끼지 말고 휴가 자주 써.”

     

    “저는 초과근무수당이 좋습니다.”

     

    브루노는 진지했다.

    나는 돈을 좀 덜 받더라도 지금 정도 워라밸이면 좋겠다.

     

    확실히 브루노의 말대로 좋은 휴가였다.

     

    돌아올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가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야지.”

     

    “훌륭한 자세십니다.”

     

    함께 저택을 나선 타냐가 내 혼잣말에 호응했다.

     

    타냐야 내가 무슨 생각으로 중얼거렸는지는 몰랐겠지만.

     

    ‘슬슬 가문이 멸문하는 사건도 대비할 때가 됐어.’

     

    이건 배드엔딩과 관계는 없어도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고트베르크 가문은 반역죄로 멸문한다.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저택은 불타며, 후작령은 야만족이 점령하게 된다.

     

    가문이 멸문하면 나 역시 주치의 직을 잃고 황실에서 쫓겨난다.

     

    ‘벌써 역사를 꽤 바꿔와서 아버지가 그 사건에 연관될 가능성은 줄어들었긴 해.’

     

    황제가 위독해지는 날, 치유사로 불려온 아버지는 앰브로시아와 실수를 저지르고 황제를 죽이고 만다.

     

    그것이 진짜 의료사고인지 아닌지 당시에 증명할 방도는 없었다.

     

    수년 후 아셀라가 즉위한 후 암살이라고 밝혀져 관련된 치유사가 반역죄로 처형됐다.

     

    직접 경험하진 않았어도 워낙 강렬해서인지 몸쪽 기억에 똑똑하게 박혀있다.

     

     

    처형식 날, 나도 몰래 제도 광장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직접 목격했었다.

     

    꽤 괴로운 장면이다.

     

    ‘타냐는 끝까지 아버지를 믿은 모양이었지.’

     

    아직 황제가 위독해질 때까지는 몇 년 시간이 있지만 혹시 진범이 먼저 움직이면 시기가 빨라질지도 모른다.

     

    그 사건 때는 황실도 급격히 움직일 테니 준비는 필요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셀라의 본대가 먼저 나가있는 큰길까지 걸어나갔다.

     

    어째서인지 마차에 타고 있는 아셀라에게 내가 물었다.

     

    “황녀님, 텔레포트 게이트는 바로 근처입니다만 마차까지 필요하셨습니까?”

     

    “아, 내가 이야기 안 했니?”

     

    “뭐를요.”

     

    아셀라가 마차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는 눈꼬리를 얇게 저미며 대답했다.

     

    “우리, 황궁으로 안 가.”

     

    시녀장이 내게 문서를 전해줬다.

     

     

    [1황녀파 야만족 토벌 출정 계획]

     

     

    “야만족 토벌 가자.”

     

    “아하.”

     

    매사가 참 갑작스러운 아셀라였다.

     

    야만족이라.

     

     

    [No. 032 : 오염된 야만족 17%]

    [No. 035 : 야만족 침공 8%]

     

     

    그들과도 할 얘기는 많지.

     

    나는 거리낌 없이 마차에 올랐다.

     

    “재미있겠네요. 바로 출발하시죠.”

     

    “어?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내가 순순히 따르니 아셀라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이 정도로 놀라실 줄 아셨습니까. 다음번엔 좀 더 극적인 연출을 기대할게요.”

     

    “나 참.”

     

    아셀라가 콧방귀를 뀌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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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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