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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1

       오늘은 아예 장사를 안 하기로 한 걸까.

       

       안쪽에서 엘리와 리디아의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요정과 은화의 문은 휴무 표지판과 함께 굳게 닫혀있었다.

       

       “음….”

       

       달칵달칵…철컥.

       

       “엘리! 리디아 님! 저희 점심으로 뭐 먹을까요? 저는 고기 들어간 게 먹고 싶은데!”

       

       “무, 뭐야! 나 아직 안 열어줬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요나. 문고리 부쉈어? 소리 안 들렸는데….”

       

       마찬가지로 내 기척을 느꼈는지 홀을 걸어오던 엘리와, 조용히 술잔을 홀짝이던 리디아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 열렬한 반응에 양손으로 브이를 날리며 답해주었다.

       

       “그냥 따고 들어왔는데용?”

       

       “어떻게?!”

       “아무리 자물쇠가 아니라 걸쇠라지만….”

       

       어이없어하는 엘리와 리디아.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이번에 새로 얻은 권능인 바실리우스를 살짝 응용해 봤을 뿐이니까.

       

       활짝 열린 문틀. 그중에서도 걸쇠 부근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특이하게도 매끈하게 손질된 다른 부위와 달리 툭 튀어나온 나뭇가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문틀도 나무잖아요. 이번에 얻은 권능으로 조작할 수 있던데요?”

       

       문틀에서 뽑아낸 나뭇가지로 걸쇠의 고정을 해제하고 밀어내면 끝.

       

       “…이미 죽은 나무인데?”

       

       “어쨌든 나무고, 식물이잖아요.”

       

       “…….”

       

       입을 꾸욱 다문 엘리. 그 사이에 리디아는 길어진 나뭇가지를 똑 잘라 이리저리 살펴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거. 살아있는데?”

       

       “살아있으니까 자라는 거죠.”

       

       “…죽은 나무에서 살아있는 가지가 어떻게 나와.”

       

       “그게 기적이니까요?”

       

       “…….”

       “…….”

       

       권없찐…아니, 권능이 없는 엘리와 리디아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속삭인다.

       

       “저기. 신기한 건 알겠는데 이거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거든요? 결과만 보면 제가 죽은 식물을 살려낸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 신성력이 가지로 변환된 거에 가까워요. 그만큼 비효율적이라 이렇게 작은 것만 피워낼 수 있고요.”

       

       “벌써부터 이렇게 잘 다루는 거에 놀란건데?”

       

       “우리가 가진 권능은 없지만, 권능을 가진 사람은 몇번 봤어. 요나처럼 빨리 적응하는 사람은 처음.”

       

       “그거야 뭐어….”

       

       던전에서 권능을 얻은 건 처음이지만, 가챠에서 스킬이나 권능을 뽑은 건 여러 번 있었으니까.

       

       강제로 각인되는 지식, 어느 순간 내 안에 자리 잡은 낯선 힘.

       

       내겐 이미 몇번 경험해 본 익숙한 일이다.

       

       물론 둘에게는 말할 수 없으니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체하기로 했다.

       

       “제가 천재라 가능한 일이랍니다. 엣헴.”

       

       “그럴지도 모르겠네…리디아. 넌 어떻게 생각해?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잖아.”

       

       “응. 내 눈에도 요나는 천재. 다만 재능 말고도 뭔가 있어.”

       

       “그거야 여신님의 은총 아니겠냐.”

       

       “그럴지도.”

       

       담담히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둘.

       

       아니, 농담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인정해버리면 내가 많이 뻘쭘하거든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카운터 앞의 자리에 앉았다.

       

       “됐으니까 둘 다 이리 오세요. 저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아.”

       

       “그렇지.”

       

       반쯤 장난스레 수군거리던 둘이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는 내 양옆에 앉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고 있었건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마자 엘리와 리디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묘하게 무거운 공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리였다.

       

       “요나야. 이제 말해줄 생각이 든 거야?”

       

       “괜찮아. 뭐든 제대로 들어줄 테니까. 우리는 요나 편.”

       

       “넹? 그건 또 뭔….”

       

       이번에는 내가 의아해하자 엘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도 모른척할 필요는 없어. 미안해. 그런 선택을 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대신해 주지 못해서.”

       

       “…넹?”

       

       갑자기 내 어깨를 토닥이며 그리 말하는 엘리. 리디아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이제 1층을 클리어 했으니까 요나는 내 짐꾼. 빌린 돈을 전부 갚을 때까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나랑 같이 미궁에 들어가.”

       

       진지한 얼굴로 빚을 들먹이며 갚으라고 하는 중이었으니까.

       

       1층에서는 나 혼자 싸운 대신 수익도 나 혼자 가져갔었는데…짐꾼이 되어버리면, 짐꾼 수당밖에 못 챙기리라.

       

       대체 얼마나 나를 데리고 다니려는 건지.

       

       이건 아동 착취가 아닐까. 하지만 이왕 착취하는 거 정자를 착취해 주면 안 되는 걸까?

       

       자꾸만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헛소리를 꾸욱 내리누르며 엘리와 리디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뜸 성자(아님) 커밍아웃한 나.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다는 엘리.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두려는 리디아.

       

       “…아.”

       

       그런가. 그런 건가. 전부 이해해 버렸다.

       

       “엘리.”

       

       “응.”

       

       “저랑 엘리는 앞으로도 쭉 얼굴 보고 살 사이잖아요? 그렇죠?”

       

       “어…그, 렇지?”

       

       “그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지금까지 엘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니까요. 엘리는 언제나 제게 고마운 사람이에요. 언제나요.”

       

       “요나야….”

       

       살짝 감동받은 것인지 눈시울을 붉히는 엘리. 좋아. 이쪽은 어떻게든 됐군. 다음은 리디아다.

       

       리디아의 무표정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디아 님.”

       

       “응.”

       

       “리디아 님이 말씀하셨죠? 언제나 제 편이라고.”

       

       “맞아. 나는 요나의…….”

       

       뒷말을 얼버무린 건지 말을 하려다 그만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확실한 건 리디아 또한 내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단, 엘리처럼 무상으로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명백히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

       

       아마도 내가 성자(아님)인 것과 관련이 있을 텐데….

       

       “으음.”

       

       역시 리디아가 이렇게까지 할만한 계기라면 하나뿐인가.

       

       기사.

       

       리디아의 최종적인 목표는 여느 모험가들처럼 성공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다.

       

       미궁과 모험가 생활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 기사로서의 힘과 명성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

       

       리디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기사가 되어 가문을 부흥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기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무슨 공작이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기사다. 이미 고결한이라는 이명까지 얻은 인재가 기사가 되고 싶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럼에도 리디아가 아직 기사 아닌 모험가로 남은 이유는…역시 하나뿐인가.

       

       실력도, 인성도 검증된 리디아가 어디 가서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하는 이유.

       

       분명 그 정도의 ‘불명예’가 리디아의 가문에 걸려 있기 때문일 터.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자의 동료라는 타이틀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미끼였다.

       

       세상 누가 성자의 파티원을 불명예스럽다 손가락질하겠는가.

       

       나는 아직 신전에 들어갈 생각이 없긴 하지만, 영원히 신전과 거리를 둘 수는 없으니 공식 성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고.

       

       그러니까 리디아 입장에서 지금의 나는 저점 매수하기 딱 좋은 매물이라는 뜻이다.

       

       누가 아는가. 혹시라도 공식 성자가 된 내가 리디아를 명예 성기사로 삼기라도 할지.

       

       성기사는 일반적인 기사와 달리 세습되는 권위가 아니지만, 평범한 기사 이상의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다.

       

       적어도 가문이 뒤집어쓴 불명예를 불식시키기엔 충분하리라.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는 리디아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마치 기사로 임명할 때처럼.

       

       “리디아 님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진심으로 리디아 님은 이미 훌륭한 기사님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세요. 가슴은 활짝 펴고, 머리는 당당하게 치켜드세요. 나의 기사님.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

       

       적게 벌어진 입술. 반대로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인 눈.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일전에 리디아가 과몰입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귀족 영식의 연기를 곁들여서.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응!”

       

       굳은 표정으로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아.

       

       좋아. 이걸로 성자(아님) 커밍아웃은 일단락났네.

       

       가챠 능력 자체를 밝히는 건 여전히 꺼려지지만…가챠에서 얻은 것을 숨기거나,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속일 필요는 없어졌으리라.

       

       그냥 ‘사랑의 여신님이 주셨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조용해진 가게 안. 어쩌다 보니 이야기하자 해놓고 나 혼자 내 할 말만 한 것 같지만….

       

       아무튼 결과가 좋으니 오케이 아닐까?

       

       식탁에 철푸덕 엎드려, 차가운 나무에 볼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아, 맞다. 제가 방금 에덴에 가서 이브 씨 만나고 왔잖아요?”

       

       “으응?! 응! 맞다. 그런다고 했었지. 볼일이 있다고 했던가?”

       

       “맞아요. 유니콘 단검을 만들 때 대금 대신, 세계수의 권능을 얻으면 그 힘을 한번 빌려주기로 했거든요. 오늘은 어떤 권능인지 보여주기만 했지만요.”

       

       “…용케도 허락해 줬네. 사실상 그냥 공짜로 만들어 준 거나 다름없는데?”

       

       “레몬과 애플을 구해준 빚이 조금 남아있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일단 말해두는 건데요.”

       

       “어. 뭔데.”

       

       “저 이브 씨한테 청혼받았어요.”

       

       “…….”

       

       “…….”

       

       습관처럼 마력초 연초를 꺼내다 말고 멈칫한 엘리.

       

       리디아에 이르러서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정적.

       

       정확히 3초 뒤에 엘리가 연초에 불을 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잠깐 이브이인지 뭔지 좀 죽이고 올게.”

       

       “살인 예고 멈춰…!”

       

       뭘 그리 담담하게 말하는 건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끼야아아악! 살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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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1

EP.81





       오늘은 아예 장사를 안 하기로 한 걸까.


       


       안쪽에서 엘리와 리디아의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요정과 은화의 문은 휴무 표지판과 함께 굳게 닫혀있었다.


       


       “음….”


       


       달칵달칵…철컥.


       


       “엘리! 리디아 님! 저희 점심으로 뭐 먹을까요? 저는 고기 들어간 게 먹고 싶은데!”


       


       “무, 뭐야! 나 아직 안 열어줬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요나. 문고리 부쉈어? 소리 안 들렸는데….”


       


       마찬가지로 내 기척을 느꼈는지 홀을 걸어오던 엘리와, 조용히 술잔을 홀짝이던 리디아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 열렬한 반응에 양손으로 브이를 날리며 답해주었다.


       


       “그냥 따고 들어왔는데용?”


       


       “어떻게?!”


       “아무리 자물쇠가 아니라 걸쇠라지만….”


       


       어이없어하는 엘리와 리디아.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이번에 새로 얻은 권능인 바실리우스를 살짝 응용해 봤을 뿐이니까.


       


       활짝 열린 문틀. 그중에서도 걸쇠 부근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특이하게도 매끈하게 손질된 다른 부위와 달리 툭 튀어나온 나뭇가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문틀도 나무잖아요. 이번에 얻은 권능으로 조작할 수 있던데요?”


       


       문틀에서 뽑아낸 나뭇가지로 걸쇠의 고정을 해제하고 밀어내면 끝.


       


       “…이미 죽은 나무인데?”


       


       “어쨌든 나무고, 식물이잖아요.”


       


       “…….”


       


       입을 꾸욱 다문 엘리. 그 사이에 리디아는 길어진 나뭇가지를 똑 잘라 이리저리 살펴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거. 살아있는데?”


       


       “살아있으니까 자라는 거죠.”


       


       “…죽은 나무에서 살아있는 가지가 어떻게 나와.”


       


       “그게 기적이니까요?”


       


       “…….”


       “…….”


       


       권없찐…아니, 권능이 없는 엘리와 리디아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속삭인다.


       


       “저기. 신기한 건 알겠는데 이거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거든요? 결과만 보면 제가 죽은 식물을 살려낸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 신성력이 가지로 변환된 거에 가까워요. 그만큼 비효율적이라 이렇게 작은 것만 피워낼 수 있고요.”


       


       “벌써부터 이렇게 잘 다루는 거에 놀란건데?”


       


       “우리가 가진 권능은 없지만, 권능을 가진 사람은 몇번 봤어. 요나처럼 빨리 적응하는 사람은 처음.”


       


       “그거야 뭐어….”


       


       던전에서 권능을 얻은 건 처음이지만, 가챠에서 스킬이나 권능을 뽑은 건 여러 번 있었으니까.


       


       강제로 각인되는 지식, 어느 순간 내 안에 자리 잡은 낯선 힘.


       


       내겐 이미 몇번 경험해 본 익숙한 일이다.


       


       물론 둘에게는 말할 수 없으니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체하기로 했다.


       


       “제가 천재라 가능한 일이랍니다. 엣헴.”


       


       “그럴지도 모르겠네…리디아. 넌 어떻게 생각해?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잖아.”


       


       “응. 내 눈에도 요나는 천재. 다만 재능 말고도 뭔가 있어.”


       


       “그거야 여신님의 은총 아니겠냐.”


       


       “그럴지도.”


       


       담담히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둘.


       


       아니, 농담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인정해버리면 내가 많이 뻘쭘하거든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카운터 앞의 자리에 앉았다.


       


       “됐으니까 둘 다 이리 오세요. 저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아.”


       


       “그렇지.”


       


       반쯤 장난스레 수군거리던 둘이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는 내 양옆에 앉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고 있었건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마자 엘리와 리디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묘하게 무거운 공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리였다.


       


       “요나야. 이제 말해줄 생각이 든 거야?”


       


       “괜찮아. 뭐든 제대로 들어줄 테니까. 우리는 요나 편.”


       


       “넹? 그건 또 뭔….”


       


       이번에는 내가 의아해하자 엘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도 모른척할 필요는 없어. 미안해. 그런 선택을 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대신해 주지 못해서.”


       


       “…넹?”


       


       갑자기 내 어깨를 토닥이며 그리 말하는 엘리. 리디아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이제 1층을 클리어 했으니까 요나는 내 짐꾼. 빌린 돈을 전부 갚을 때까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나랑 같이 미궁에 들어가.”


       


       진지한 얼굴로 빚을 들먹이며 갚으라고 하는 중이었으니까.


       


       1층에서는 나 혼자 싸운 대신 수익도 나 혼자 가져갔었는데…짐꾼이 되어버리면, 짐꾼 수당밖에 못 챙기리라.


       


       대체 얼마나 나를 데리고 다니려는 건지.


       


       이건 아동 착취가 아닐까. 하지만 이왕 착취하는 거 정자를 착취해 주면 안 되는 걸까?


       


       자꾸만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헛소리를 꾸욱 내리누르며 엘리와 리디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뜸 성자(아님) 커밍아웃한 나.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다는 엘리.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두려는 리디아.


       


       “…아.”


       


       그런가. 그런 건가. 전부 이해해 버렸다.


       


       “엘리.”


       


       “응.”


       


       “저랑 엘리는 앞으로도 쭉 얼굴 보고 살 사이잖아요? 그렇죠?”


       


       “어…그, 렇지?”


       


       “그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지금까지 엘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니까요. 엘리는 언제나 제게 고마운 사람이에요. 언제나요.”


       


       “요나야….”


       


       살짝 감동받은 것인지 눈시울을 붉히는 엘리. 좋아. 이쪽은 어떻게든 됐군. 다음은 리디아다.


       


       리디아의 무표정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디아 님.”


       


       “응.”


       


       “리디아 님이 말씀하셨죠? 언제나 제 편이라고.”


       


       “맞아. 나는 요나의…….”


       


       뒷말을 얼버무린 건지 말을 하려다 그만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확실한 건 리디아 또한 내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단, 엘리처럼 무상으로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명백히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


       


       아마도 내가 성자(아님)인 것과 관련이 있을 텐데….


       


       “으음.”


       


       역시 리디아가 이렇게까지 할만한 계기라면 하나뿐인가.


       


       기사.


       


       리디아의 최종적인 목표는 여느 모험가들처럼 성공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다.


       


       미궁과 모험가 생활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 기사로서의 힘과 명성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


       


       리디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기사가 되어 가문을 부흥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기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무슨 공작이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기사다. 이미 고결한이라는 이명까지 얻은 인재가 기사가 되고 싶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럼에도 리디아가 아직 기사 아닌 모험가로 남은 이유는…역시 하나뿐인가.


       


       실력도, 인성도 검증된 리디아가 어디 가서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하는 이유.


       


       분명 그 정도의 ‘불명예’가 리디아의 가문에 걸려 있기 때문일 터.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성자의 동료라는 타이틀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미끼였다.


       


       세상 누가 성자의 파티원을 불명예스럽다 손가락질하겠는가.


       


       나는 아직 신전에 들어갈 생각이 없긴 하지만, 영원히 신전과 거리를 둘 수는 없으니 공식 성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고.


       


       그러니까 리디아 입장에서 지금의 나는 저점 매수하기 딱 좋은 매물이라는 뜻이다.


       


       누가 아는가. 혹시라도 공식 성자가 된 내가 리디아를 명예 성기사로 삼기라도 할지.


       


       성기사는 일반적인 기사와 달리 세습되는 권위가 아니지만, 평범한 기사 이상의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다.


       


       적어도 가문이 뒤집어쓴 불명예를 불식시키기엔 충분하리라.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는 리디아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마치 기사로 임명할 때처럼.


       


       “리디아 님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진심으로 리디아 님은 이미 훌륭한 기사님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세요. 가슴은 활짝 펴고, 머리는 당당하게 치켜드세요. 나의 기사님.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


       


       적게 벌어진 입술. 반대로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인 눈.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일전에 리디아가 과몰입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귀족 영식의 연기를 곁들여서.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응!”


       


       굳은 표정으로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아.


       


       좋아. 이걸로 성자(아님) 커밍아웃은 일단락났네.


       


       가챠 능력 자체를 밝히는 건 여전히 꺼려지지만…가챠에서 얻은 것을 숨기거나,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속일 필요는 없어졌으리라.


       


       그냥 ‘사랑의 여신님이 주셨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조용해진 가게 안. 어쩌다 보니 이야기하자 해놓고 나 혼자 내 할 말만 한 것 같지만….


       


       아무튼 결과가 좋으니 오케이 아닐까?


       


       식탁에 철푸덕 엎드려, 차가운 나무에 볼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아, 맞다. 제가 방금 에덴에 가서 이브 씨 만나고 왔잖아요?”


       


       “으응?! 응! 맞다. 그런다고 했었지. 볼일이 있다고 했던가?”


       


       “맞아요. 유니콘 단검을 만들 때 대금 대신, 세계수의 권능을 얻으면 그 힘을 한번 빌려주기로 했거든요. 오늘은 어떤 권능인지 보여주기만 했지만요.”


       


       “…용케도 허락해 줬네. 사실상 그냥 공짜로 만들어 준 거나 다름없는데?”


       


       “레몬과 애플을 구해준 빚이 조금 남아있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일단 말해두는 건데요.”


       


       “어. 뭔데.”


       


       “저 이브 씨한테 청혼받았어요.”


       


       “…….”


       


       “…….”


       


       습관처럼 마력초 연초를 꺼내다 말고 멈칫한 엘리.


       


       리디아에 이르러서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정적.


       


       정확히 3초 뒤에 엘리가 연초에 불을 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잠깐 이브이인지 뭔지 좀 죽이고 올게.”


       


       “살인 예고 멈춰…!”


       


       뭘 그리 담담하게 말하는 건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끼야아아악! 살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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