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성기사들이 먼저 진입했네.”
여기저기를 다니며 기사들을 살리고 온 파라몬이 들은 이야기였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산 정상.
하지만 그 앞은 두꺼운 불길로 막혀 있었다.
“마법사들의 마나는 온전한가?”
“다들 지쳐 있네, 벤시의 울음도 무력화 시키며 올라왔으니.”
바로 교단의 뒤에 따라붙어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불 앞에서 막막한 상황임에도 파라몬은 걱정이 없었다.
“왔군.”
주위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너무나 이질적인 광경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불길 사이로 파도가 만들어졌다.
촤아악 –
족히 사람키의 두 배는 될법한 높이.
산속에서 치는 파도를 본적이 있는가.
한줄기의 파도가 불을 꺼뜨리며 길을 만들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엘프가 한 일이었다.
“가지를 지키는 잎사귀. 아이린이라고 해요.”
“드디어 도착했군.”
“이미 도착한지는 시간이 조금 지났답니다. 크리스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
클로셀과 파라몬이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몸을 가다듬었다.
엘프들이 온 이상 이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
파라몬이 주변을 둘러보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많이도 왔군…”
“그러게 말일세.”
이미 근처에 엘프들이 빼곡했다.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막말로 엘프의 숲에 있던 전력의 반을 데려온 것 같지 않은가.
“좌측과 우측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착했을 거예요.”
“고맙네.”
파라몬이 하는 감사 인사에도 아이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주변의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살짝 화가 난 듯 보였다.
“어디 있어요?”
“…무엇이 말인가?”
“엘프의 은인을 괴롭힌 자들 말이예요.”
곧장 분노한 엘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히, 크리스님을!”
“내 화살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화를 내면서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엘프들.
주변을 덮치던 불길들이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치이익 –
불에 물이 닿으며 수증기가 피어올랐지만 그조차도 실프들이 움직이자 하늘로 흩어졌다.
아이린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산 위를 올려다보았다.
“엘프들은 길을 여세요.”
착 –
착 –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근처에 있던 마법사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압도적인 마나의 양.
인간의 마법사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엘프들이 동시에 정령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부 정령사라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힘이야.”
마법사들이 정령에 반응했다면, 기사들은 다른 것에 반응했다.
엘프들이 외치고 있는 말의 내용 때문이었다.
“은인의 부탁이다!”
“크리스님의 털끝 하나라도 상했다가는 모두 가지를 꺾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같은 의미를 담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말로 엘프들이 크리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것.
황당한 시선을 주고 주고받는 그들 사이로 아이린의 살벌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네크로맨서를 포위하겠습니다.”
사사삭 –
아이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프들이 흩어졌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불이 났다고는 하지만 산속에서 엘프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화난 엘프들을 말이다.
순간, 산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
화르르륵!
땅이 울릴 정도로 강한 충격파였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산 전체에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불이 나고 있었다.
클로셀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보게 라몬, 엘프들이 안 왔다면 말일세.”
“음?”
“저 불들이 우리를 감쌌지 않겠는가?”
엘프의 시기적절한 등장과 때맞춰 일어난 폭발.
그들이 없었다면 나무들이 타는 연기만으로도 상당수의 병사들이 힘을 잃었으리라.
그것뿐이겠는가.
크리스가 교황을 비롯한 성기사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전투의 사상자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런 전쟁은 처음일세.”
사람이 살다 보면 뭐든 되는 날이 있다.
준비된 것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날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마치, 모든 행운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 같군.”
이건 정말로 무심코 던진 칼이 표적에 적중 하는 꼴이었다.
그것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이대로라면 화살도 알아서 빗겨나갈 것 같군.”
파라몬이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러고 있지 않은가.”
저벅 –
저벅 –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던 교황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교단에서도 그랬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
“말씀해주시겠소?”
“인간이 계획을 세워 봤자 신의 뜻 안이라고.”
참으로 성직자 다운 말이었다.
다만, 이 상황에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그런 일을 일으키는 게 고작 한 사람의 힘이었으므로.
파라몬이 검을 고쳐잡았다.
“이제 그만 끝을 내야겠소.”
피식 –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안 그렇겠는가.
대 정령사, 대마법사, 소드 마스터, 교황.
대부분이 생존한 병력들까지.
“완승이로군.”
***
“데스나이트를 모두 진격시켜라!”
“어,어느 곳으로 말입니까?”
혼란.
이 단어 말고는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으리라.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엘프들이 나타났습니다!”
“전방의 성기사들이 거의 근접했습니다!”
“우측과 좌측에서 병사들이 출몰! 언데드의 수가 부족합니다!”
불리한 전황의 정점을 찍는 보고가 이어졌다.
“교황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더 올 것이 남아 있느냐?”
“보고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이대로 계획에 실패 할 수는 없었다.
산전체에 불을 질렀으니, 제물이 쌓이는 속도도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생각은 빗겨나갔다.
“…변함이 없군.”
조금씩의 변화는 있었다.
언데드와 불이 저들을 공격하니 사상자가 없지는 않은 것이다.
티가 나지 않는 양이었지만.
“….”
손 발이 꽉 묶인 기분이었다.
네크로맨서가 주섬주섬 물건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서나 흔적을 남겨서는 안되는지금, 아공간 주머니만은 저들이 확인할 수 없는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
“이대로 소환을 진행한다. 모두 몸을 던져 시간을 끌도록.”
***
“온몸이 아파.”
업무가 많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만병의 근원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
“만신이나 됐으면 몰라.”
“…만신이요?”
“무당으로 살다 보면 이신 저신 다 인연이 닿아서 결국엔 그렇게 돼.”
세레나에게 설명해주려 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든 와중에 등산까지 하고 있으니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있나.
다행이라면 기우제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것.
하늘의 구름이 죄다 검게 물들어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이다.
“따로 연락은 없었어?”
“모두 정상에 진입했다고 했어요.”
잠깐 망설이던 세레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많이 살았다는 소식도 전해왔어요.”
이제는 내가 뭘걱정하는지도 짐작이 가는 모양이다.
물어보려고 했던 것을 먼저 말하는 걸 보니.
“그럼 됐어.”
여전히 산 정상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불 한줄기가 보인다는 것뿐.
일 전에 들었던 파란색의 불이었다.
“홀릴 만 하네.”
기우제를 지내던 중에 문득 보이기 시작한 불.
정말로 보기만 해도 편안 함이 느껴지는 불이었다.
산에 지른 불이 육신을 태운다면 저것은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였다.
휘릭 –
딸랑 –
“아저씨, 정신 차려 봐요.”
오다가 이 사람의 시체를 봤다.
노르딘 백작의 휘하에 있는 기사.
“팔은 어디다 두고 오신거야.”
– ….!
솔직히 뭐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팔 하나를 잃었으면 됐지, 남은 팔을 왜 나무에다가 꽂아 놓았다는 말인가.
단검을 찔러서 고정시켜 놓은 그 팔을 본 나는 마음이 찝찝했다.
노르딘 백작이 나에게 알려 준 신호였으니까.
영혼이 홀린다고 했더니, 몸으로 신호를 남긴 것을 보라.
기사라는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사람들이었다.
“이러니까 제 명에 못죽지. 못해도 십 년은 더 살았을 텐데….”
– …..
“이제 좀 쉬어요. 거의 끝났으니까.”
이렇게 말한다고 쉴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불에타서 쓰러질까 봐 검으로 몸을 고정시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고 뭐가 달라졌겠는가.
생전의 고집불통 그대로지.
“백작님 살아계시는 거만 보고 갈길 가시는 겁니다? 알겠죠?”
끄덕.
“머리 떨어진 영혼도 있으니까, 신경 안쓰셔도 괜찮아요. 두 번은 안죽어요.”
끄덕.
“마지막까지 버티셨나보네요.”
아마 다른 영혼들은 불길에 홀려서 산을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이 양반이 제일 나중에 죽어서 밑에 있는 것이겠지.
“할 일이 자꾸 늘어나네.”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걱정과 염려들.
이걸 다 어떻게 풀어 준다는 말인가.
순간, 산 정상에서 불길함이 잔뜩 피어올랐다.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가진 무언가였다.
쑤욱 –
등에 머리를 대고 있던 루나가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 교황아저씨를 볼때처럼 아무런 동요가 없는 무표정.
곧이어 차분한 옹알이가 들려왔다.
“자우.”
“작두?”
성검을 향해 팔을 버둥거리는 루나.
그러고 보니 루나는 성녀이지 않은가.
또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일 테지.
원래 성검의 주인 또한 루나이기도 했고 말이다.
“자이!”
“잡귀?”
“푸!”
“푹?”
루나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꺄륵!”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세레나, 날아가자.”
이제 크리스 휴가 좀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