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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2

     저녁, 7시.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거리에는 햇빛보다 라이트 마법을 걸어둔 마석이 더 반짝이고 있고, 서서히 술 냄새가 짙어지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 누아르, 레타르, 루비와 함께 이미 집으로 돌아갔다.

     

     저택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안전한 곳에서 불꽃이 아름답게 터지는 모습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겠지.

     나도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국의 그림자들은 황손녀가 누군가의 목줄을 움켜쥐고 돌아다녔다고 할 것이며, 황태자는 이런저런 정보를 수합해 개처럼 끌려다닌 이가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어린아이들이나 할 소꿉장난이군. 하, 그렇게 좋은가. 그러면 나야 좋지.

     라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등 뒤에 숨기고 있는 칼이 들키지 않을 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오후 내내 연기를 했다.

     오전에도 돌아다니면서 사기꾼들을 살피고 다녔으니, 이제 저녁은 그레이 지브롤터의 시간이다.

     “역시 제게는 이쪽이 편하네요!”

     잠시 보육원으로 돌아와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아스타시아가 치마를 펄럭이며 배시시 웃었다.

     “도련님도 다른 색보다는 원래 색이 더 어울리고요!”

     “그렇습니까?”

     “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아스타시아는 이 회색을 좋아했다.

     잿빛에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완전히 어둡지는 않은 회색.

     “저는 개인적으로 하양이 검정에 물들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만.”

     “저는 하양과 검정의 딱 중간 같은데요? 보기 엄청 예뻐요! 그런데….”

     내가 집게 가위를 들려고 한 순간.

     “안 돼요!”

     아스타시아가 바로 달려들어, 내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거, 자르려고 하시는 거죠?”

     “목줄은 이제 더 필요 없잖습니까?”

     “모처럼 산 건데, 잘라서 망가뜨릴 수는 없죠.”

     바로 목줄을 자르려고 했더니, 아스타시아는 천천히 목줄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건 제가 간직할게요.”

     “간직?”

     “네! 축제 기념으로.”

     “기념이라….”

     아스타시아의 눈에 욕심이 얼핏 보였다.

     이 상태의 아스타시아는 에르윈 회장이 와도 못 막는다.

     “화관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습니까?”

     “화관도 화관이지만, 도련님이 손수 만든 거라는 게 제일 좋은 건데요?”

     “이번에는 급하게 만드느라 그랬던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솜누스 화관, 그냥 먹는 거라서.”

     “먹는 거라도, 도련님이 직접 손으로 엮으셨다는 게 중요한 거죠!”

     아스타시아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린다.

     “초콜릿도 수제로 직접 만들어서 주는 게 의미 있는 것처럼!”

     “그래봐야 시중에 있는 제품을 중탕하고 녹이고 굳히는 과정이 전부 아닙니까?”

     “그 과정에, 정성이 깃들잖아요!”

     “농담입니다.”

     아스타시아라면 직접 형틀을 주문 제작하여 초콜릿을 만들 사람이다.

     “혹시 제게 주실 거라면, 장난이랍시고 안에 이상한 거 넣으시면 안 됩니다.”

     “엇. 들켰다!”

     이미 받아봐서 잘 안다.

     “축제 기념품으로 뭔가를 받고 싶어 하시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한 게 있는데….”

     “어, 진짜요?”

     “예.”

     내가 품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내려는 순간.

     “아앗, 잠깐!”

     아스타시아가 나를 막았다.

     

     “저, 저는 아직 준비 못 했단 말이에요!”

     “교환이라도 하려고요?”

     “으으, 당연하죠! 쭉 둘러봤는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걸요!”

     아스타시아는 오전부터 저녁까지 제법 많이 축제를 돌아다녔다.

     “제국 황손녀 전하의 눈에 들만한 장신구나 보석은 이곳에서는 찾기 어려울 겁니다만.”

     “으으….”

     “왕도의 살롱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에서나 만족스러울 겁니다.”

     “이왕이면 좀 예쁜 걸 드리고 싶었는데.”

     아스타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브롤터, 실망이에요.”

     “저한테 실망하지 마시고, 이 나라 평민들의 장신구 제작 기술을 따지십시오. 그리고.”

     나는 아스타시아가 쥔 목줄을 가리켰다.

     “전하께서 제게 건 목줄을 순순히 받은 것처럼, 저는 전하께서 주신 무엇이라도 달게 받을 겁니다.”

     “어, 정말요?”

     “그럼요. 선물이라는 건 원래-”

     “주는 사람의 정성이 중요한 법이다!”

     역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히힛, 알겠어요. 그러면 축제 피크 때 뵙는 걸로 할까요?”

     “불꽃놀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 뭐라더라. 사실은….”

     아스타시아가 작게 속삭였다.

     “백작님이랑-”

     “크림슨 백작님.”

     “예?”

     “크림슨, 이라고 붙여주시겠습니까. 어느 백작을 말하는 건지 헷갈려서.” 

     “지브롤터에서 백작님이라고 하면 한 분…알았어요. 뭔가 되게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있으시네요?”

     아스타시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없다.

     “하여튼 크림슨 백작님이랑 샤를로트 백작 부인께서 예전에 아카데미 다녔을 때, 아카데미 축제에서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앗.”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혹시 어머님께 들었습니까?”

     “네!”

     이런.

     “서로의 소중한 것을 교환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

     “어라.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뇨. 조만간 또 어머님께 효도를 하러 가야할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아주 뜨겁게 효도하리라.

     “그러면 아스타시아. 좀 이따 만나도록 하죠. 호위는 멘테 경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당연히-”

     “그 전에.”

     나는 아스타시아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힉…?!”

     “남장하고 멘테 경을 따돌려서 몰래 저를 놀라게 하려고 한다거나 그런 생각이라면, 저는 몹시 실망할 겁니다.”

     “……제,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스타시아의 눈동자가 잠시 옆으로 굴러갔다.

     “이, 이대로 갈 거예요! 선물은…으으, 불꽃놀이까지 찾아볼 테니까, 그때 교환하는 거예요. 알겠죠?”

     “예. 기대하겠습니다.”

     * * *

     아스타시아가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그레이 지브롤터로서 거리에 나왔다.

     “도련님.”

     “알아.”

     나오자마자, 주변 분위기가 사그라든다.

     “누가 봐도 동생 때문에 심통이 난 형이, 그래도 축제라고 구경을 나오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처럼 보이지.”

     “…저는 가끔, 도련님이 남들이 바라보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무섭습니다.”

     “사실인데 뭘.”

     로버트는 걱정스럽게 말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표정과 시선, 행동을 통해 나는 이미 주변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저것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딸을 붙잡는 여인.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슬그머니 몸을 돌리는 상인.

     부정한 것을 본 것처럼 빨리 걸어가는 경비대원.

     “이러다가 백작가 망나니 소리 듣겠어.”

     

     내가 나이가 20살 이상이었다면, 아마 누아르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했던 짓들을 그대로 했을 것이다.

     술 먹고 고함지르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 걸기.

     백작가의 사람에게 어디 한번 덤벼보라고 대가리 들이밀기.

     대가리 맞다.

     술에 취한 개가 된 누아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마물이라고 해야 하나.’

     꼴에 소드 마스터라고 깨진 와인병을 마구 휘두르고 다니는 바람에, 결국 몇 번은 내가 직접 나와서 잡아가고는 그래야 했다.

     

     ‘누아르를 보던 시선이, 지금 내게로 꽂히고 있네.’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하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뭐라고 해야 할까, 안쓰럽다면서도 공포스러운 존재를 바라보는 그런 분위기였다.

     허나, 이것도 나쁘지 않다.

     “로버트 경.”

     “예, 도련님.”

     “안타까워 보이겠지만, 지금 저들이 나를 저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연기를 제법 잘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어?”

     전방.

     “켁?! 서, 설마…?”

     “이건 뭐지?”

     “그, 그것이…!”

     아침에 자몽을 샀던 가게 앞에 도착하자,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자몽을 팔아치우려던 상인이 사색이 되어 나를 훑는다.

     회색 머리에 시선 한 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에 시선 한 번.

     그리고 등 뒤에 대동한 로버트에 시선 한 번.

     

     “지, 지브롤터 도련님이십니까…?”

     “내가 지브롤터의 장자기는 하지. 근데 나는 이게 뭔지 물어봤는데.”

     “그, 그것이! 이건 세이레네 백작령에서 공수한 레드 오렌지라는 것으로…!”

     상인이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굽신거린다.

     “도, 도련님께 팔기에는 하자가 있는 것들뿐입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상급이나 중급의 좋은 것들은 이미 다 팔려나가서…!”

     “이 바구니, 전부 얼마지?”

     “그, 그게. 전부 5개긴 한데….”

     상인이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3만 골드입니다.”

     “뭣.”

     뒤에 있던 로버트가 눈을 부라렸다.

     “도련님. 그게-”

     “떨이로 팔아치우고 빨리 장사 접고 싶은 거겠지. 됐어. 자네는 정가에 산 거고, 나는 할인가에 산 거라고 하지.”

     나는 잠시 진짜로 화를 내려고 하던 로버트에게 손을 뻗은 뒤, 품에서 3만 골드 하나를 꺼냈다.

     “도, 도련님…? 이, 이건….”

     “솜누스 골드 같은 거, 들고 다니기도 귀찮더군. 받아라. 귀찮게 하지 말고.”

     축제 규칙.

     모든 상인들은 골드가 아닌 솜누스 골드로 거래를 해야 한다.

     “뭐 해? 짜증 나게 할 건가?”

     “아, 아닙니다…! 그, 감사합니다!”

     규칙보다 더 무서운 게 눈앞의 권력과 폭력이다.

     제국에 그런 말이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세세한 건 다르지만, 왕국도 사람 사는 곳인 만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가져. 이건 바구니째로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도련님!”

     나는 바구니를 챙긴 뒤, 바로 몸을 돌려 축제의 열기로 가득한 광장으로 향했다.

     “경. 하나 먹겠나?”

     “너무 시려서 못 먹겠습니다.”

     “돈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고?”

     

     로버트 경은 자몽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다.

     “확 그냥 그 자리에서 패대기를 치려다가 참았습니다.”

     “참아. 만일 패대기를 치려고 한다면, 그자가 위조 솜누스 골드라도 들고 와서 정산해달라고 하면 그때 조져.”

     “그자도 위조했습니까?”

     “위조했든 말든, 일단 가지고 있으면 그게 위조지.”

     “그냥 조지려고 명분만 갖다 붙이는 거 아닙니까.”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거기도 하고.”

     나는 로버트에게 자몽을 하나 건넸다.

     “죄 없는 사람도 죄지은 자로 만들 수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사람도 스스로 죄를 짓게 만들 수 있지.”

     증거 조작, 사건 은폐, 위증교사, 범죄 행위 유도, 그 외 기타 등등.

     “경. 비록 나를 계속 본 건 아니지만, 축제를 쭉 지켜보니까 어떻던가?”

     “…….”

     “다섯 명 중 네 명 정도는 축제를 즐기고, 즐겁게 축제에 참여하고 그랬겠지.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이 축제의 물을 흐리고 다녔을 거야.”

     사기를 치든.

     위조를 하든.

     누군가를 향해 좋지 못한 시선을 보내거나 뒷담화하든.

     “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양호한 수준이야. 일단 사람은 안 죽었으니까.”

     “아, 그렇군요. 도련님 기준 최악의 사건 사고는 살인사건인 겁니까?”

     “그것도 그냥 살인이 아니라….”

     나는 내 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지브롤터의 핏줄을 향한 암살 시도.”

     “제가 몸을 던져서 지켜드리겠습니다.”

     “감동적이네. 고마워.”

     슬슬, 시간이 되었다.

     “마침 저기, 오고 있군.”

     “혹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물론.”

     품에 넣어둔 장신구를 다시금 확인한 뒤, 나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메이드를 향해 인사했다.

     “엘리.”

     “도련님~!”

     엘리가 내 앞에 도착하자마자 호흡을 가쁘게 내뱉는다.

     “뛰었어?”

     “예! 급하게 이거 찾아오느라, 늦었어요! 하아, 하아.”

     “늦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기대감이 생긴다.

     “도대체 뭘 가져오려고 하셨길래, 이렇게 달려오신…잠깐.”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잠깐, 잠시만요.”

     “뭐, 뭐죠?”

     “엘리.”

     나는 아스타시아의 뒤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 잘랐습니까?”

     “……..”

     “조금 전에 봤던 것보다 10cm는 더 줄어든 것 같은데.”

     “……와, 소름.”

     아스타시아가 입을 떡 벌리며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누굽니까?”

     “누군지 묻기 전에, 저한테 존대하시면 안 되죠.”

     “…….”

     아차.

     “누가 그랬지? 내 메이드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

     뒤에서 멘테 경과 함께, 나리아가 천천히 걸어왔다.

     “자베스.”

     “엘리가 줬을 때, 도련님이 가장 기뻐할 것 같은 선물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제가 추천한 물건입니다. 엘리. 꺼내세요.”

     “네? 지금? 으으, 타이밍 맞추려고 했는데….”

     아스타시아는 울상을 지었으나, 곧 메이드 에이프런의 앞주머니에서 고풍스러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짜잔!”

     “…머리카락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까?”

     “네!”

     트로피가 담겨있을 것 같은 상자.

     붉은 천의 가운데, 보라색 작은 비단으로 묶여있는 하얀 머리카락이 술처럼 내려오고 있다.

     “나중에 어디든 장식하시면 될 것 같아요. 히힛.”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인상적인 선물이네요.”

     “어…?”

     아스타시아가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시, 실망하셨어요? 누, 눈에….”

     아스타시아가 손을 뻗는다.

     “우, 울 것까지는….”

     “우는 거 아닙니다. 실망이 지금 눈에서 흘러나온 겁니다.”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길을 피하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래도 저는 축제에서 파는 장신구를 사기라도 했지, 설마 머리카락을 선물로 줄 거라고는.”

     정말이지.

     “하여튼, 당신은.”

     변하지 않는구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현재 썸네일은 레타르 양(회귀 전 버전)입니다

    에이프런만 입고 있는 버전은 에단 세자르(회귀 전, 고자)만 가지고 있습니다

    남캐 일러는 계속 일러레 분들을 찾고 있는데
    남캐를 그다지 많이 뽑아본 적이 없어서 조금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경우가 아닐 경우, 아마 계속 여캐 주연/조연/바리에이션 만 나올 것 같습니다
    그 쪽이 제작하는데 필요한 자료 모으기 쉽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소설은 근친이 아닙니다(※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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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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