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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2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 뒀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에요.”

   

   페이비는 자신의 손 안에 머무르던 신성이 담긴 마력을 지워버리며 조이에게 말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조이는 그런 페이비를 보고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듯 냉철한 표정이었지만 조이와 오래 알고 지낸 페이비는 저 가면 너머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조이.”

   

   페이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니 조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절 봐요.”

   

   허나 그 뒤에 한 마디가 더해지자 다시금 조이의 차가운 눈이 페이비를 마주했다.

   

   “아직 완전히 안정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요?”

   “네. 그렇죠.”

   “근데 왜 굳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일을 하신 건가요?”

   

   페이비의 추궁에 조이는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물욕에 져서 던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분명 어이없어 하며 성녀님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 걸 보게 될 텐데.

   

   조이가 침묵을 지키자 페이비가 두 손으로 조이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조이. 당신은 강한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강한 사람에게도 극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철이 굳기 전에 그를 휘두른다면 부서질 뿐이잖아요.”

   “그쵸.”

   “아르마디의 말씀에 따르면…”

   

   조이는 페이비가 잔소리가 시작되는 걸 보며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분명 페이비는 선인이다.

   

   수십 년을 살면서 화 한 번 내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다 신의 뜻이 있는 거라며 웃어넘기기만 한다.

   

   심지어 루시에게 무례한 어휘를 듣더라도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평상시에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것처럼 어지간한 일도 가볍게 주의를 주고 넘기는 사람이 잔소리를 시작하면 무척이나 길어지는 것이다.

   

   몇 번인가 페이비에게 잔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 조이는 페이비가 성경을 언급하며 설교를 시작하면 가볍게 두 시간 정도는 말을 이어갈 수 있음을 알았다.

   

   공식과 비공식을 가리지 않는 수많은 자리에서 설교를 해 온 성녀님에게 설교라는 것은 지극히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정신적인 피로를 호소하며 쓰러지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조이가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에 양호실의 문이 열렸다.

   

   짙은 분홍색의 트윈 테일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동자.

   

   장난스러운 웃음.

   

   백작 영애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박스러운 움직임을 지닌 여자아이.

   

   그리고 나쁜 의미로 지금 소울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루시 알른.

   

   그녀는 자신의 기사에게 ‘허접견. 기다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라고 말을 하고는 양호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허접 성녀가 얼빵 영애를 치료하는 중이었어?”

   

   조이는 이 장소의 분위기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루시 알른의 목소리가 너무도 반가웠다.

   

   “알른 영애님. 안녕하신지요.”

   “보면 알지 않아 허접 성녀? 지방 덩어리에 가려서 내 얼굴이 안 보이는 거야?”

   “지…지방 덩어리요?”

   

   루시의 말에 양호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굳었다.

   

   양호실의 치료사는 물을 마시다가 사례가 들린 듯 연신 기침을 해댔고,

   

   조이는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를 의심하고 있었으며,

   

   페이비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굳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속에서 태연한 것은 오롯이 한 명 루시 뿐이었다.

   

   “지방 덩어리라고 말한 게 이상해? 그럼 ㄱ…”

   “그. 그보다! 알른 영애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조이는 저토록 당황한 페이비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주신 교회의 고위직으로써 온갖 사람들을 만나 온갖 상황을 겪어 본 페이비의 평온을 깨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역시 알른 영애라고 해야 하나.

   

   “얼빵 영애가 불러서 왔는데.”

   “그러시군요! 그.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아뇨! 어차피 조이랑 할 이야기는 다 끝냈거든요!”

   

   허둥지둥거리며 눈동자를 한 자리에 두지 못하던 페이비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침착해졌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루시의 목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희미한 목소리로 루시에게 물었다.

   

   “알른 영애님. 목걸이에 축복이 더해지셨나요?”

   “힐끗 성녀님. 용케도 눈치 챘네? 맞아. 근데 왜?”

   “신기해서요. 이렇게 단기간에 이만큼이나 신성이 늘어나시다니. 알른 영애께선 신의 사랑을 받으시는군요.”

   

   순수한 감탄이 어린 페이비의 목소리에 루시가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딱히? 누구나 이 정도 관심은 받지 않나?”

   “그랬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답니다. 알른 영애님.”

   “뭐야. 허접 성녀. 질투하는 거야? 푸훗. 완전 성녀 실격이네.”

   

   여느 때와 같은 건방지고도 독선적인 언동.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자랑하는 거냐며 투덜거릴 내용이었지만 페이비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만 그 전에 잠시.”

   

   의자에서 일어난 페이비는 고개를 돌려 조이를 바라보고는 얼굴을 들이밀더니 속삭이듯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말씀드릴게요.”

   

   설교를 멈추지 않겠다는 선언에 조이의 눈동자가 떨렸다.

   

   성녀님께서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시려 하시는 구나.

   

   *

   

   자살 마렵다.

   

   호감도고 퀘스트고 뭐고 그냥 다 포기하고 게임 오버를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지. 그럼 너무 늦잖아.

   

   좀 더 얌전하고 조용한 죽음을 위해서는 알새틴에게 독약을 구해달라고 하는 게 낫겠지.

   

   그래. 그게 제일 좋겠다.

   

   <여아야. 그.>

   ‘할아버지. 조용히 해주세요.’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의 박살난 마음이 돌아오지는 않는답니다.

   

   할배는 꺾여버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아.

   

   허접하고 무능하고 쪼잔한 주신님?

   

   당신 때문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메스가키 스킬을 강화시킨 바람에 이게.

   

   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성녀님에게 음담패설을 내뱉은 걸로도 모자라서 비틱질까지 하다니!

   

   시이발.

   

   지방 덩어리가 뭐냐. 지방 덩어리가.

   

   조금만 더 강화되었다가는 아주 페이비를 음란 성녀라고 부르겠다?

   

   응?

   

   속으로 짜증을 내다가 왠지 진짜로 그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당장 칼을 부르는 호칭만 하더라도 메스가키 스킬이 강화된 후에는 허접견이 되지 않았던가.

   

   지금은 님자를 떼고 허접 성녀라고만 부르지만 선을 넘으면 분명 음란 성녀라고 불러 버릴 거야.

   

   그랬다간 매장이다 매장.

   

   현 주신 교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녀님을 성적인 의미에서 모욕해봐라.

   

   어떤 일이 펼쳐질지 짐작도 안 된다.

   

   게임에서도 그런 시나리오는 없었다고!

   

   “알른 영애?”

   

   속으로 한탄을 하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조심스레 조이가 나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라도 지금 내 표정은 여유로울 텐데 왜 조이가 날 걱정하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문제인가?

   

   뭐어. 괜찮냐 괜찮지 않냐를 물어보면 괜찮기는 하다.

   

   내가 여러 실언을 하긴 했지만 페이비라면 적당히 넘겨줄 테니까.

   

   다만 다음에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

   

   그래서 어깨를 으쓱이면서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날 걱정해주는 거야? 얼빵 영애? 실금 영애가 될 뻔 했던 것 치곤 여유롭네?”

   

   메스가키 스킬아.

   

   오늘 좀 보너스가 과하지 않니?

   

   자꾸 이렇게 고봉밥을 주면 내가 무척 곤란하단다.

   

   “제가 실금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농담이었어요.’

   “얼빵 영애. 농담이랑 진담도 구분 못하는 것야? 눈치없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알른 영애께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치?

   

   나 같아도 루시 같은 애한테 눈치 없단 소리를 들으면 열 받을 것 같긴 해.

   

   ‘조이. 그래서 왜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래서 얼빵 영애. 무슨 일이야? 혼자선 잠을 못 자는 거야?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알른 영애께서 부르는 자장가라니. 끔찍할 것 같으니 거절할게요. 제가 알른 영애를 부른 이유는 사과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해놓고서는 겁에 질려 던전에 들어가지 못한 일.

   

   그로 인해 내 일정을 망가트린 일. 괜한 오해를 사게 만든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갚지 못하게 된 일에 대해 사과한다면서.

   

   조이는 그녀 다운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를 들으면서 내가 한 생각은 얘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하지. 였다.

   

   굳이 따지고 보면 조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이유를 제공한 게 나라서 내가 조이한테 사과를 하면 했지 사과를 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를 날린 거?

   

   지금 내가 스피드런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날린 걸로 발작을 할 이유가 있나.

   

   이 정도는 소울 아카데미의 고인물에게 손해도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마세요.’

   “얼빵 영애. 허접답게 소심하네. 당신 따위가 빚을 갚건 말건 난 아무 관심도 없거든? 당신 같은 허접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괜찮대두요.’

   “얼빵 영애. 질척 거리지 말아줄래?”

   

   나는 그리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여기에 있었다간 조이한테 어떤 폭언을 늘어놓을 지 알 수 없었던 지라.

   

   겨우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온 애한테 이 이상 폭언을 박을 순 없잖아!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잘 있어. 얼빵 영애. 그땐 그 얼빵한 얼굴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네?”

   

   *

   

   조이 파트란의 측근 중 하나인 럼리 백작가의 에버리는 무의식 중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루시 알른. 그 빌어먹을 년.

   

   얼마 전 주제도 모르고 파트란 영애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그 망나니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그는 오롯이 파트란 영애를 위함이었다.

   

   던전에 안 좋은 기억을 지닌 파트란 영애님을 굳이 입구까지 끌고 가서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다니.

   

   그런 성질 나쁜 녀석이 또 다시 파트란 영애님을 만나러 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허나 그 망나니는 자신의 패악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에버리를 모욕하면서 밀쳐내 바닥에 넘어트린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한 가운데에서 치욕을 당한 에버리는 그 날로부터 며칠이 흘렀음에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이를 갈았다.

   

   대 럼리 백작 가문의 영애로 태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살아왔던 그녀는 이 치욕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망나니처럼 사교계에서 패악질을 부리며 모욕을 할 적에도 그랬지만 입학 시험 좀 잘 쳤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랄을 떨어대는 그 꼴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에요.

   

   만일 루시 알른이 어중간한 작위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에버리가 직접 예의를 알려줬으리라.

   

   하지만 루시 알른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무가인 알른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자.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1등을 차지해 자신의 재능을 널리 알린 유망주이자.

   

   유력한 차기 검성이라 여겨지는 프레이 켄트를 무력으로 쓰러트린 그 괴물 같은 망나니는 에버리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원래 같았으면 파트란 영애의 입김을 빌려 한 마디를 할 수 있었겠지만 파트란 영애는 그 빌어먹을 쌍년을 좋게 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면서.

   

   그 망나니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우연의 일치일 뿐이겠지만 어쨌든 파트란 영애께서는 그리 믿고 계셨다.

   

   ‘더 이상 알른 영애를 모욕하신다면 저도 조금은 화가 날 것 같네요.’

   

   에버리와 다른 영애들의 설득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게.

   

   그래서 에버리와 다른 영애들은 차선책을 택했다.

   

   분명 지금쯤 루시 알른을 향해 증오를 품고 있을 분.

   

   지난 패배에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사람.

   

   아서 솔라딘.

   

   솔라딘 왕국의 3왕자의 힘을 빌리기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자라 ~ 우리 허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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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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