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톡, 톡,
가볍게 풀잎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리가 하나둘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호숫가 옆에 지어진 아담한 나무집 지붕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빗소리에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장에서 빗방울이 새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빗방울이 고이는 지점에 흙으로 빚어 만든 커다란 그릇을 발로 밀어 넣었다.
이미 몇번이나 겪어본 일이었다.
“누가 지었는지 참 형편없는 집이네,”
나는 듣는 이 없는 비난을 내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내 비난은 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는다.
이 집을 지은 건 나였으니까.
“말리스가 현자라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약 이백여년 전의 대 현자이자 대 마법사였던 말리스.
하루아침에 거대한 성을 지었다는 일화로 무척 유명한 역사 속의 인물이었다.
녹색의 여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나와 같은 정령 술사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아침에 성을 짓는 것 정도는 여러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 호숫가에서 혼자 살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수없이 많은 일을 정령과 함께 해온 나는 충분히 그 가능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말리스라는 그 양반도 분명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수준의 천재라는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성을 지었다는 그의 업적을 따라 해 보려던 내가 일주일 걸려 고작 방 두 개 달린 오두막 하나를 지은 걸 보면 그 차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오두막이 빗줄기조차 제대로 못 막는 엉터리 목조 건물이라는 건 덤이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무척 쉽게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 사람이 내공이 쌓일 대로 쌓인 증거라고 하던가,
내가 직접 해보고 느낀 바로는, 말리스라는 내 이전 세대의 정령 술사는 성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넣어놓고 다니는 수준의 천재였음이 분명했다.
같은 정령 술사인데다 스태프라는 성씨도 같은데, 나와 그 역사 속의 영웅은 수준의 차이가 너무나 심하게 났다.
거의 도마뱀과 용 정도의 차이다.
이 정도면 겸손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빗물이 고이는 그릇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본격적으로 추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건물이나 책상 같은 건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옷 같은 섬유나, 화로 같은 기계장치는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었기에, 나는 온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처음 짓는 집이라지만 멍청하게도 굴뚝을 뚫는 것조차 잊어버린 덕분에 집 안에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가진 난방 수단이라고는 지금 내 옆에 똬리를 틀고 앉아 제 꼬리를 베고 잠든 불타는 여우 한 마리 뿐이었다.
그렇다고 저 여우가 딱히 불꽃의 정령인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여우의 형태를 가진 정령의 몸에 내 마력을 실시간으로 태우며 불을 붙이고 있을 뿐이지만, 추워진 날씨 탓에 사실상 저 모습으로 늘 곁에 두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불을 뜻하는 마법 문자를 따서 피아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는 피아를 향해 손을 뻗으며 차갑게 얼은 손가락을 녹였다.
“… 집은 또 쓸데없이 넓게 지어서 괜히 찬 바람만 더 부는 거 같네,”
작은 오두막이긴 했지만, 전에 나와 실비아씨가 살던 오두막보다는 방 하나가 더 달려 있었다.
일부로 그렇게 지었다.
실비아씨와 함께 살 때를 대비해 창고, 혹은 그녀를 위한 옷방이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런 생각 하기 전에, 굴뚝이나 화로, 하다못해 비가 새지 않는 튼튼한 지붕을 먼저 고려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아직 문짝도 짜 맞추지 못해서 사실상 커다란 하나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창문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온 집안을 훓고 지나갔다.
당연하지만 내게 유리를 만드는 기술 따윈 없었기에, 창문도 뚫어놓은 채였다.
사실, 실비아씨가 찾아오면 같이 이곳저곳을 보수할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오시는 걸까.”
실비아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
비가 그치자 예상대로 확연히 낮아진 온도가 숲을 덮치기 시작했다.
금세 용사가 찾아올 것이라는 녹색 여인의 말이 무색하게도, 내가 이 호숫가에서 머무른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작 한 달 사이에 가을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제는 슬슬 입에서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호수 주변에 핀 식물이나 과일 등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는데, 겨울이 다가오면 그마저도 여의찮을 게 분명했다.
창문은 널찍한 나무판자로 틀어막았고, 거실 한 가운데 바닥을 뜯어내 작은 화로를 만들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온다면 장작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미리 준비해야만 했다.
자꾸만 마음이 초조해졌다.
실비아씨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
보통 혼자 살면 혼잣말이 는다는 클리셰를 여러 문학 작품 속에서 볼 수 있었지만, 내 경우엔 오히려 혼잣말이 줄어들었다.
피아를 제외하면 딱할 말을 걸 상대도 없었기에, 결론적으로는 그냥 말 수 자체가 줄어들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내 목소리조차 까먹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애타게 기다리는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귓가에 생생했다.
오늘도 나는 어느새 익숙해진 하루의 일과를 묵묵히 보내고 있었다.
나의 일과란 피아와 함께 호수 근처를 벗어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 보거나, 겨울 동안 장작으로 쓸 나무를 구해 건조하는 일, 그리고 녹색의 여인이었던 나무를 바라보며 호수에서 낚시하는 일 등이었다.
딱히 힘든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난도가 높은 일이라면 단연 나무를 구해오는 일이었다.
도끼나 톱 같은 적당한 도구조차 내겐 없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피아 덕분에 어떻게든 할 수 있기는 했다.
녀석은 꽤 훌륭한 정령이었다.
아직 정령을 다루는 게 영 어색한 내 실력이 아까울 정도였다.
우연히 만나는 늑대 한두마리 정도는 무리 없이 해치우기도 했고, 커다란 나무를 베어내는 신비한 힘도 사용하곤 했다.
문제는 이 쪼그마한 여우 정령이 그 나무를 직접 끌고 집까지 돌아올 방법이 없었던지라, 낑낑대며 끌고 오는 일이 내 몫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실비아씨와 함께 살 때도 몇 번 한 적 없었던 육체노동에 시달려 끙끙 앓고 있었다.
하루종일 달고 사는 근육통에, 잠을 잘 땐 무릎이 시큰거려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그래도 피아가 없었다면 아예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니 이 정도도 감지덕지긴 했다.
게다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외로움이 좀 사그라지기도 했기에, 나는 잠이 들 때를 제외하곤 매일 피아를 곁에 둔 채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었다.
실비아씨가 나를 찾아올 그날이 얼른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
거대한 나무로 변한 녹색의 여인.
어느 날, 그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 나오는 수많은 나뭇가지 중 하나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자그마한 끄트머리 부분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굵고 큰 나뭇가지가 통째로 떨어지는 일이었기에,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나뭇가지는 기묘하게도, 어딘가 부러지거나 베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뽑힌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골렘의 관절처럼 쏙 빠져나온 그 절단면이 무척이나 기묘했기에, 나는 이것이 녹색의 여인이 내게 주는 어떤 선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내 팔보다 훨씬 굵고, 내 몸통보다는 조금 얇은 이 커다란 나뭇가지가 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힘이 담겨 있음을 짐작게 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댔기 때문이었다.
그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집어 들자, 머릿속으로 무얼 해야 하는 지 직접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치 누군가 그렇게 하라 시키기라도 한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를 깎기 시작했다.
모든 게 부족한 숲속의 생활.
도구부터 자재까지, 없는 게 한둘이 아닌 이 생활은 늘 결핍과 필요로 가득 차 있었으나, 다행히 내겐 실비아씨가 내게 주었던 단검이 남아있었다.
사실상 내 유일한 공구이자 무기인 이 단검은 목공에도 무척이나 훌륭한 도구였다.
애초에 이 단검을 처음 들었던 내가 한 일은 싸움이 아닌 라일라의 모표를 깎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중간에 정령 계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정확히 그게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어느새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라일라의 무덤에도 잡초가 무성히 자랐을지도 모른다.
마기가 좀 줄어들면 관리하러 가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생기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실비아씨와 함께라면 갔다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느 정도 마기를 희석 시켜줄 수 있으니까.
“…”
나는 머릿속을 채우는 잡념을 떨쳐냈다.
며칠간 나무토막을 가지고 씨름한 끝에, 이젠 거의 완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손을 바삐 움직인다면, 오늘 안에 완성 시킬 수도 있으리라.
나는 단검을 내려놓고 손을 털며 잠시 내가 깎던 나무토막을 바라보았다.
녹색의 여인의 몸을 칼로 깎아 만드는 이 물건의 정체는 바로 가면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나뭇가지를 붙잡은 그 순간, 나는 이 가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면 뜬금없이 이런 결론을 내린 내 모습이 조금 기이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한번 겪어본 적 있는 일이었다.
정령계에서 그녀에게 정령 술에 대한 기초를 듣던 그날.
머릿속으로 직접 기억과 지식이 흘러들어오던 그 감각.
마치 그때처럼, 나의 머릿속에 이 나뭇가지로 가면을 만들라는 소리와 방법이 저절로 흘러들어왔다.
이 나무엔 아직도 녹색 여인의 의식이 잠들어 있는 걸까.
정령의 죽음은 인간과는 다르다고 했는데,
그 육신의 형태만 변한 채 자연에 귀속되는 것이 정령의 죽음이라면 내 곁엔 여전히 녹색의 여인이 있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문밖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이 나뭇가지가 정말 그녀의 신체인지, 가면을 깎으라는 그 의지가 그녀의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왜 ‘가면’ 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겐 퍼트려선 안 되는 저주가 있으니까.
요즘 마기가 옅어진 건지, 내가 마기에 적응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령 술사로써 성장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며칠간 나는 평소보다 더욱 먼 곳까지 정찰을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밖에 오래 있으면 몸이 망가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뜨기조차 괴롭고.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던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멀리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점점 내 활동반경이 넓어질수록, 나는 내 모습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의해 극도로 예민해지고 있었다.
예전에 숲에서 만난 그 사내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 눈이 붉게 빛나며 그들을 모조리 학살했던 그날의 내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가끔은 그때 내 시야에 박힌 그 끔찍한 피투성이 광경들이 꿈속에서 재현되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온한 꿈을 꾸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온몸에 땀을 흥건히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런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나 역시 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쳐버릴 테지만, 적어도 이 숲에 찾아올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사람이 냉정함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성을 잃은 나 따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따위 가면을 만들지 않아도 이곳에 콕 박힌 채 숨어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솔직히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실비아씨를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사각사각,
나무를 부드럽게 깎아내는 단검의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실비아씨가 내게 처음 단검을 건네주었던 그때와 비교해보면 베는 맛이 많이 안 좋아졌고, 날도 많이 무뎌졌다.
내가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사용할 때마다 무기를 손질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곤 했었는데, 솔직히 검을 다뤄본 적 없는 내가 칼의 손질법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방치해버렸다.
도리어 이렇게나 상태가 나쁜데도 평범한 단검보다는 훨씬 잘 베이는 걸 보면, 이 단검은 분명 엄청난 명품이겠지.
단검에 대해 생각할수록 실비아씨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실비아씨는, 왜 아직도 내게 오지 않은 걸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솔직히 내가 아무리 정령을 다룰 줄 안다고 해도 그녀에게 비하면 형편없이 약해빠진 존재였다.
그런 내가 실비아씨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제넘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술렁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멍하니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구해주고 싶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루, 아니 한시간이라도 더 빨리 그녀를 볼 수 있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었다.
그리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음속 한 구석엔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하는 멋진 내 모습을 그려보는…
이제는 멸종한 줄 알았던 내 마음속 자그마한 남성성이 내 행동을 부추기고 있기도 했다.
멀쩡히 살아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내게 달려와 안기는, 그런 실비아씨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떠올랐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거의 며칠 만에 처음으로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흘렸다.
“실비아…”
가면이 완성되었다.
.
여기도 비오니까 갑자기 추워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