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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2

       보조 관리자의 접속을 확인. 환영합니다 ‘Yuna The Greatmage’.

       

       관리자에 대한 수면 명령 확인됨. 진행하시겠습니까? => 예.

       

       수면 작업 완료.

       

       ⋯⋯⋯⋯.

       

       ID_013 (#외신) 에 대한 미인가 정보 업로드 시도 확인됨.

       주의(!) : 해당 정보는 서큐버스 등의 악성 프로그램일 수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 예.

       

       진행 중⋯⋯.

       

       업로드 완료. 

       

       ※

       깜빡. 깜빡.

       명령어를 입력하는 패널의 마지막 문장에서 점멸하는 언더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을 잘라내 NPC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고, 앞으로 벌어질 온갖 부작용들은 유나가 해결해야 하는 몫이었다. 유나는 몸을 웅크리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화면에 반투명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불안과 초조로 가득했다. 이번에도 다시금 묻는다. 꼭 이래야만 했는가?

       

       그는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었다. 이따금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중요한 부분은 꽉 쥐고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50년 후에야 터질 폭탄일지도 모른다. 

       

       “⋯⋯그가 조금만 더 무능하고 멍청했더라면.”

       

       자신의 세계를 본떠 만든 시뮬레이션 세계에서 함께 인터넷이니, 만화니 하는 것을 읽으며 즐겁게 웃고, 리소스니, 모델링이니 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냥, 그렇게 순수하게 웃고 떠드는것밖에 못 하는 바보였더라면. 시뮬레이션 연구에만 족히 백 년은 걸려서, 그 긴긴 시간 동안 유나와 함께 오순도순 연구나 하며 살아가야 했던 바보였더라면.

       

       그랬더라면 두고 볼 수 있었을지도.

       

       그의 재능은 별처럼 빛났다. 그렇기에, 그 재능으로 세상에 악의를 품었을 때를 생각하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금은 그가 못된 마음을 먹더라도 유나가 막을 수 있었다.

       

       아니, 유나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면 어떨까. 세션으로 온갖 사람들의 믿음을 훔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 끝에, 세상을 모조리 덮어버리게 된다면?

       

       그가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자고 결정했을 때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션 속의 세계가 미리 알려주었다. 사악한 존재가 밤하늘로부터 굽어보는 끔찍한 세상이 되리라.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덜 많은 사람을 죽인다. 이미 해 본 일이었다. 이번엔 더 쉬웠다. 적어도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죽을 일은 없지 않은가. 유나는 떨리는 손으로 학생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이 지옥의 끝에서,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미래가 찾아오기를 바라며.

       

       ===============================================================

       

       ID_127 (#니오레) 에게 ID_013에 의한 리소스 공유 시도 확인됨. 

       

       Yuna : 그러니까, 니오레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거야?

       

       Yuna : 내용을 알 수 있을까?

       

       ID_127 : 당신은 당신을 해체해서 나눠주는 걸 즐기는 거잖아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하세요. 음, 당신은 미치광이가 되어 불운한 인생을 보내겠지만, 적어도 옆에서 수혜를 받는 베네트와 타라는, 행복할 거예요⋯⋯ (중략).

       

       Yuna : ⋯⋯막아!

       

       보조 관리자에 의해 차단됨.

       

       ⋯⋯⋯⋯.

       

       ID_013에 의한 날짜 변경 확인됨.

       

       ID_013에 의한 설정값 변경 확인됨.

       

       ID_013으로부터 보조 관리자에게 메시지 가 반복적으로 전송되었습니다. (14319 건 / 이미지 347 건)

       

       Yuna : 어, 어? 

       

       Yuna : 시간 왜 바뀌어. 태양은 왜 빙빙 돌고?

       

       Yuna : 잠깐만, 권한이⋯⋯ “외신 강림할 때 해가 모습을 감추고 별이 꺼지고 하면 멋있으니까, 자체적으로 맵 배경을 바꿀 권한이 내장됨.”⋯⋯, 이걸 써서 한 거야? 그것이? 

       

       Yuna : 뭐가 이렇게 많이 떠, 나한테 보낸 거라고? 오믈렛 레시피는 또 뭐야. 사진, 엑, 아, 이, 이상한 거 보내고 있어⋯⋯! 잠깐만, 명령어가⋯⋯ 차단, 차단해 줘. 쟤한테서 오는 연락을 막아!

       

       ID_013과 관련된 알림을 차단할까요?

       

       Yuna : 그래.

       

       Yuna : 앗⋯⋯.

       

       Yuna : ⋯⋯아, 아니. 잠깐만 메시지 보내는 것만 막아. 혹시 차단한 사이에 무슨 일 생겼어?

       

       ID_013 => ID_098 (#불량배 남자) 에게 할당된 리소스값을 일부 공유. ID_128 (#타라) 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 부여됨. 

       

       Yuna : 잠깐만, 타라, 지금 무방비⋯⋯. 

       

       Yuna : 주변에 우호적인 NPC 없어?! 샐리, 샐리한테 지금 당장 슈퍼파워를 부여해서⋯⋯! 요, 용량이 모자라? 

       

       Yuna : 베네트!!!

       

       Yuna : 베네트한테 도와달라고 해, 타라가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돌아오는 길을 짧게 바꿔.

       

       보조 관리자에 의한 명령 확인. 실행됨.

       

       Yuna : 해결됐나⋯⋯?

       

       

       ※

       베네트는 늦지 않게 도착해서 타라를 구했다. 유나는 긴장이 풀려 의자 등받이에서 쭉 미끄러졌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 했다. 

       

       그것이 깃든 NPC는 한껏 악의를 담아서 행동했다. 니오레에게 사악한 말을 속삭이고, 사람들을 조종해 타라를 공격했다. 그것은 플레이어들이 최대한 고통을 받게끔 움직였다. 

       

       처음에는 움직임이 굼떴으나.

       

       니오레에게 말을 거는 것을 유나가 차단한 이후로부터, 저 바깥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그것은 온갖 수단을 써서 유나의 눈을 가리고 비수를 찔러넣었다.

       

       그것이 깃든 악신이 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상정 내였다. 방해 공작을 걸어오는 것도 상정 내였으나, 이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적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공격한다는 것도.

       

       기껏 해봐야, 학생들을 죽이기 위해서 강림을 준비하는 정도를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아냐, 아냐 할 수 있어 유나야. 고작 7%잖아. 시뮬레이션 안에 갇힌 꼴이잖아. 그리고 나는 관리자니까, 어떻게든 끄집어내서 때리게만 하면.”

       

       NPC를 투입하는 것은 GM의 권한. 지금이야 외신이 실컷 날뛰고 있다지만, 서로간의 권한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저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라는 일행들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고 당차던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무방비로 습격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미안, 미안 타라야⋯⋯! 미안 니오레⋯⋯!”

       

       유나는 망설임 끝에 진행을 선택했다.

       

       ===============================================================

       

       

       Yuna : 좋아, 여신의 수정도 쥐여줬으니까. 이대로 쭉쭉 가서 때리기만 하면 돼! 베네트가 의식을 진행하면, 뭔가 잘못 됐다구 하면서 외신을 강림시켜서⋯⋯.

       

       Yuna : ⋯⋯왜 이렇게 잠잠한 것 같지?

       

       D_013 => ID_099 (#지나가던 남자) 에게 할당된 리소스값을 일부 공유. ID_128 (#타라) 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 부여됨. 

       

       D_013 => ID_101 (#어린 소녀) 에게 할당된 리소스값을 일부 공유. ID_128 (#타라) 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 부여됨. 

       

       D_013 => ID_037 (#사이비 교주) 에게 미확인 데이터 공유. 

       

       D_013 => ID_103 (#꼬장꼬장한 할배) 에게 할당된 리소스값을 일부 공유. ID_128 (#타라) 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 부여됨. 

       

       Yuna : 권한 어떻게 뺏을 수는 없어?!

       

       Yuna : “말 잘 듣는 AI로만 시킬 생각이었어서, 따로 권한을 뺏는 기능은 구현하지 않았다”⋯⋯? 그, 그냥 같이 손잡고 하는 게 나았을까, 아냐. 나 혼자서도 해낼 수 있어. 응.

       

       Yuna : 그래, 자꾸 타라를 노린다 이거지. 아냐, 괜찮아. 여차하면 빔 쏘면 돼, 데이터째로 도려내 버리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Yuna : 지나가던 남자 삭제하고, 아니, 땅속으로 옮겨버리자. 아무것도 못 하게. 침식당한 NPC들 싹 다 여기, 지하로 옮겨버려! 

       

       ⋯⋯⋯⋯.

       

       Yuna : 교주 왜 이래? 왜 갑자기 벌크업을⋯⋯?

       

       Yuna : 혹시 내가 뭔가 놓쳤⋯⋯나? 

       

       Yuna : 2%⋯⋯ 정도일까. 자신을 떼어 내서 교주에게 넘겼다는 말이야? 왜? 아니, 잘라서 처리할 수 있으면, 나한테는 좋은 일⋯⋯ 인가?

       

       Yuna : 그래! 베네트, 니오레, 해치워 버려! 흑마법으로 영혼 안 깎이게, 백업으로 보충⋯⋯ 하고!

       

       Yuna : 해냈구나-!! 베네트-!!

       

       D_013 에 의한 맵 이동 명령 입력됨. #니오레 와 #베네트 를 S3 으로.

       주의(!) 해당 맵은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텅 빈 공간은 플레이어들에게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배치하세요.

       

       Yuna : 악!!

       

       Yuna : 괜찮아, 괜찮아. 아무거나 맵을 로딩하면 돼. 페로, 페로네 고향으로 하자. 거기서, 으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플레이어 #타라 로부터 이상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ERROR CODE 017 : “우화 발생.”

       

       Yuna : ⋯⋯⋯⋯.

       

       Yuna : 아니, 아니야. 타라야, 모두 살아있어. 착각이니까.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 그건, 그건 베네트의 시체가 아니야.

       

       Yuna : 이렇게까지 상처를 줄 생각은 아니었어. 

       

       Yuna :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멈출게. 정말 미안해⋯⋯. 

       

       보조 관리자에 의한 강제 종료 시도 => 보류.

       주의(!) 세션이 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무리한 강제 종료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 전원의 의식을 가라앉힌 뒤 다시 시도해 주세요.

       

       Yuna : ⋯⋯⋯⋯.

       

       진행중인 시나리오에 결함이 발생했다고 판단, 관리자를 긴급 호출합니다.

       

       ⋯⋯⋯⋯.

       

       ===============================================================

       

       공허를 본 적이 있던가.

       

       으레, 공허하다. 텅 비었다. 그런 표현을 입에 담고는 하지만. 사람은 살아있는 한 공허함을 몸으로 느낄 일은 없었다. 하늘과 땅의 사이에 인간은 바로 서 있기에.

       

       야산에서 사냥개에게 쫒기는 처지라도, 집까지 비집고 들어온 강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항아리 안에 몸을 숨겼더라도, 그곳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있었다. 까끌거리는 흙, 매끈한 항아리의 단면, 자신의 육신과 오감으로 느껴지는 세상.

       

       심장에 칼이 박히더라도, 핏물이 빠져나가 싸늘하게 식은 그 순간까지도 어머니 대지는 인간을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던가. 그러니 없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공허를 몰라야 했다.

       

       “⋯⋯⋯⋯.”

       

       그러나 니오레는 이제야 공허를 알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는.

       

       손을 뻗어도 닿는 것이 없고, 숨을 들이켜도 들어오는 것이 없다. 온기를 나눌 수도, 감정이 번져나가지도 않는다.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것을 그저 ‘검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색에 대한 모욕이었다. 니오레는 망원경 너머로 보았던 일렁이는 우주의 검은색이 애타게 그리워졌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은 지독하게도 외로웠다.

       

       나는 지금 무엇을 겪고 있는 걸까.

       

       니오레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베네트와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도 녹아 사라질 것 같은 공허에서, 서로를 인식하고 있으므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베네트의 몸을 꽉 안은 채로 표류했다.

       

       얼마나 흐른 걸까.

       

       이윽고, 빛이 있었다. 어딘가로 빨려드는 느낌이 났고, 베네트와 니오레는 황량한 사막으로 내뱉어졌다. 

       

       “⋯⋯⋯⋯흐, 악.”

       

       니오레는 숨을 쉬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중력, 손아귀 사이로 까끌거리는 모래. 찌르는 듯한 햇빛. 모든 것이 반가웠다. 그녀는 베네트의 몸을 안아 들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로 날려 보내진 걸까. 이곳은, 어디일까. 돌아갈 수는 있을까.

       

       멸망해 가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불시착해 버린 두 사람은, 몸도 마음도 취약해진 상태였다. 거듭된 전투와 거듭된 실패는 산성비처럼 표면을 깎아내려, 연약하고 야들야들한 심장을 내보이게 만들었다.

       

       이 심장을 쿡 찌르는 것이 악신의 취미이자 목표였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여신은 간단하게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러니, 기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두 사람을 괴롭힐 일만 남은 것이다.

       

       원석을 깎아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보석의 단면은 하나하나가 깊고 예리한 상처를 의미한다. 멋진 커팅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온 사방에 빛을 뿌리는 보석이 완성된다. 

       

       세상에 좀 더 보석이 많았으면 좋겠다.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악신은 촉수를 뻗었다. 연심을 자극하고 비틀어, 지독한 집착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리라. 거듭 새겨넣은 무력함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리라.

       

       어쭙잖은 정의를 쫒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었으니, 진작에 그 알량한 도덕성을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속여, 소중하게 지켜오던 신념을 증오하게 하리라. 자신의 여동생을 구할 길이 없으며,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무능 때문임을 자각하게 하리라.

       

       시간은 많았다. 어리고 여린 마음을 보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는 데에는 그렇게 큰 수고가 들지 않는다. 우선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자. 교주의 마지막 저주를 막아내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고 믿게 만들자.

       

       저 청년은 너를 위해 영혼마저 불태우며 싸웠거늘, 너는 고작 그 수명이 아까워서 수정만을 사용해 주문을 썼다. 네가 1년이라도 자신을 희생했더라면 교주는 마법을 쓸 여유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실패에 방점을 찍은 건. 처음부터 끝까지 네 탓이로군⋯⋯ 니오레.

       

       공포와 두려움에 물든 소녀를 향해 짙은 그림자가 뻗어졌다. 별들은 웃고 떠들며 소녀의 정신이 도축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귀를 틀어막은 채로 외면하는 것 뿐일 테다⋯⋯.

       

       그때, 악신이 뻗은 속삭임이 변질되어 잘려 나갔다. 

       

       ⋯⋯누구냐.

       

       악신은 동시에,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증식하기 시작한 암 덩어리를 느꼈다. 방치한다면 자신의 모든 정보를 오염시킬 독이었다. 악신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동이 떠올랐다. 세상을 비추는 찬란한 태양의 광채에 달과 별이 물러나고, 그림자에는 불이 붙어 잿더미가 되었다. 악신은, 그 사이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만. 지랄은 거기까지다.”

       

       눈을 뜬 마법사가 밤을 몰아냈다.

       

       ===============================================================

       

       오랜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사실 좋은 꿈은 아니었다.

       

       목적에 집중하다가 수단을 그르친 어느 한 GM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세션 마지막에 꼭 드래곤을 집어넣고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드래곤과의 전투를 위해서 준비해 둔 게 많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드래곤 이미지, 크와아앙 하는 효과음, 웅장한 전투 맵, 적절한 브금, 재미있는 기믹을 넣은 전투 데이터.

       

       그런데 세션의 이야기는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플레이어들이 드래곤을 잡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드래곤과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플레이어 중 하나가 그랬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그걸 돕고 싶어 했다. 

       

       플레이어들은 의뢰를 마치면 온갖 금은보화와 싱싱한 소 한 마리를 사서 드래곤에게 바쳤다. 그리고 바드의 기가 막힌 연주 (20면체 주사위에서 20을 띄웠다)와 함께 절절한 고백 공격을 감행했다.

       

       GM은 플레이어의 고백 공격이 재밌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드래곤과의 전투를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하, 둘 다 하면 되겠구나.’

       

       GM은 그 선언을 성공 처리 하고, 플레이어와 드래곤은 성공적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행복한 신혼 생활을 묘사한 뒤에, 갑자기 지나가던 사악한 마법사의 광분 주문에 맞은 드래곤이 발톱을 휘둘러 왔다.

       

       전투가 벌어졌고, 방금 전에 결혼한 새신랑은 자기 신부의 머리에 칼을 꽂아 죽여야만 했다. 세션이 끝난 뒤에 GM과 플레이어들은 존나 싸웠고, 그 팀은 터졌다.

       

       참고로 용박이 새신랑은 나였다.

       

       이 이야기에서의 교훈은, 플레이어가 바라지도 않은 걸 억지로 떠먹이려고 하는 건 죽창 맞을 짓이라는 이야기였다. 

       

       피폐, 좋다. 시련과 고난, 좋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도움닫기용 발판이어야 한다. 플레이어가 자기 캐릭터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역시 모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편이 좋지 않은가.

       

       

       그렇게 잠에서 깼다.

       

       “으드드드드⋯⋯.”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뭔가, 가끔씩. 진짜 잘 잤다 싶은 기분 좋은 기상이 있지 않던가? 지금이 그랬다. 머릿속에 얹힌 돌덩이가 7% 정도 치워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도 팽팽 돌아갔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세상이 다채롭게 보이는 기분도 들었다. 발걸음 한 번이 설레고, 나뭇잎 살랑이는 풍경만으로도 한 시간은 사색할 수 있을 법한 영감 넘치는 느낌.

       

       잃어버렸던 설렘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

       

       자색 마탑주의 테라피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효과가 좋담.

       

       세션은 끝났으려나?

       

       엔딩은 어떻게 났을까. 1일차로 돌아가서 교단 개작살내버리는 루트? 아니면, 보다 과거로 돌아가서 이사악까지 구원해 버리는 루트? 커플링은 생겼을까?

       

       타라는 스스로 생각하고 나아갈 수 있었을까. 니오레는 현실과 타협해서 적절한 정의감을 찾을 수 있었을까. 베네트는 자신의 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었을까.

       

       두근두근했다. 

       

       로그, 로그를 보자.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내가 끝까지 운전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을 달래볼 수 있을 거다.

       

       [타라도, 민간인 몇 명보다는⋯⋯ 은의 황혼 교단을 더 죽이고 싶지 않나요?]

       

       어?

       

       “⋯⋯베, 넷, 트⋯⋯!”

       

       오⋯⋯.

       

       “모조리 죽여버릴 거야.”

       

       음.

       

       나는 도로 제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내가 잠깐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다시 한번 자고 일어나면, 희망편으로 세션이 종료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해서.

       

       어림도 없었다.

       

       “아이씨⋯⋯!”

       

       마탑주가 의도한 건 아니라지만, 삽시간에 곱창 난 세션에 암에 걸릴 것 같았다. 피폐쟁이가 찔러 들어오면, 그 피폐를 이용해서 사랑이나 우정 같은 걸 생산했어야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실 도피할 시간도 없었다. 이야기가 곱창이 나기 시작했으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부리나케 컨트롤 룸으로 달려갔다. 

       

       “어떻, 어, 어떻게, 하, 하지.”

       

       자신만만하게 나만 믿으라던 마탑주는 고장나 있었다. 아빠 컴퓨터로 놀다가 랜섬웨어에 걸려서 어쩔 줄 모르고 굳어버린 초등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비켜요!”

       

       “으엑⋯⋯!”

       

       시스템 로그를 살폈다. 

       

       ID_013번, 악신으로 설정해 놓은 NPC. 여기에 내 머릿속의 어떤 뭐시기를 옮겨서 이식하자, 무슨 화학작용이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바이러스 같은 녀석이 된 것 같았다.

       

       니오레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면서 비벼보다가, 마탑주가 차단을 박으니까 단단히 뿔이 나서는 온갖 혐짤과 뻘글을 달려버리는 모습. 마탑주는 거기에 휘말려서 버벅거리다가 말린 것 같았다.

       

       너는⋯⋯ 갤주 실격이다, 유나!

       

       통째로 날려버리는 데에는 베테랑인 마탑주지만, 상대적으로 정밀 조작에는 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악신의 분탕이 우연히 카운터로 작용한 것 같았다.

       

       마탑주는 날려버리자면 정보 폭탄으로 세션째로 터트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로그고 뭐고 개박살이 났을 테니까 쫄려서 못 썼겠지.

       

       일단은 견제부터 날렸다.

       

       안에서 아무리 날뛰어도 이쪽은 관리자. 능력의 가짓수는 명백한 상하관계가 있다. ID_013의 설정란을 열고 온갖 캐릭터성을 때려 박았다.

       

       사실은 외신이지만 미소녀고, 인간이 너무 좋아서 가끔은 고약한 장난을 치지만 사실은 인간을 좋아해서 몰래 브로마이드도 인쇄해 방 한 켠에 붙여놓는 데다가, 기본 패션은 고스로리 복장을 자주 입고 팬티는 검은색 고양이 팬티를 제일 아끼는데, 살짝 귀찮은 성격이라 데이트 할 때에는 단위시간 당 칭찬 수치가 일정 이하로 내려가면 짜증을 내는──.

       

       커다란 엿을 먹으니 녀석이 버벅거렸다. NPC들에게 상황 맞춰서 변화하라고 넣어 둔 수정 권한을 써서 열심히 돌려막기를 하는 중이었다. 시간은 벌었으니까, 정리.

       

       1. 세션이 피폐투성이다.

       2. 이걸 해피 엔딩으로 바꾸고 싶다.

       3. 저 피폐쟁이 악성 바이러스도 처분해야 한다.

       

       차근차근해 보자, 할 수 있다. 피폐는 해피엔딩의 추진제니까.

       

       “깨, 깼구나.”

       

       “⋯⋯⋯⋯.”

       

       마탑주는 쭈그리가 되어 오들오들 떨었다. 자기가 사고 치고 잘못한 걸 아는 강아지처럼, 흐아악 하고 달달 떨면서도 잘못했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볼을 꼬집었더니 으에엥 하고 눈을 꼭 감았다. 여전히 귀여웠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사후 처리도, 사고에 휘말린 플레이어에 대한 보상도, 유나에게 줄 벌도, 유나한테 다 떠맡기고 꿀잠 자버린 내게 줄 벌도, 우선은 싹 뒤로 미룬다.

       

       “100년 후 암시에 쓸 수 있는 모델링.”

       

       “⋯⋯⋯⋯?”

       

       “10, 9, 8⋯⋯.”

       

       “⋯⋯!!!”

       

       거의 바닥에 붙을 정도로 납작해졌던 마탑주가, 일거리를 쥐여주니 펄쩍 뛰어올라서 모델링을 깎기 시작했다. 

       

       저 ‘악신’은, 모든 노력과 의미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놓고 플레이어들이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사악한 놈이었다. 내 신념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존재다. 용납할 수 없었다. 

       

       네놈이 만든 모든 피폐를 꿈과 우정과 사랑을 위한 추진력으로 써 주마.

       

       견제구는 날렸지만 지금 당장 녀석을 도려낼 방법은 없으니, 완결까지 녀석의 방해를 뚫어가며 내달려야 하겠지만. 해볼 만 한 일이다.

       

       시도-실패-시도-실패-시도-실패로 개작살난 플레이어들의 의욕을 되살려주는 방법.

       

       그건, 그들 덕분에 이 세상이 어떻게 더 나아졌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거다. 너희들의 노력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노라고. 헛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앞으로 한 발짝 남았노라고 알려줘야만 했다.

       

       작전명⋯⋯ ‘시간 동조’, 개시.

       

       ===============================================================

       

       외신의 강림을 목전에 둔 세상은 어둡고도 괴상했습니다. 그림자가 생명을 얻어 악몽에 나올 법한 괴물이 되고, 시간은 느리거나 빠르게 변주되며, 죽어가는 사람들은 광기로부터 마지막 안식을 찾았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타락한 성녀는 검을 휘둘렀습니다.

       

       별을 우러러보며 감격하고 있는 광신도 사이로, 가녀린 육신이 뛰어들었습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순간을 방해하는 침입자들에게, 광신도는 저항했으나.

       

       소매로부터 성녀의 가시덩굴을 피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빨아들여라, 『회한만극(悔恨蔓棘)』.”

       

       “끄아아아아아-!”

       

       이교도로부터 힘을 뽑아내고. 그것을 마검에 둘러, 베어 죽이고, 다시금 거두어들여. 그녀는 우화로 빨아들일 수 있는 산 제물이 있는 한, 무한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우드득.

       

       타라는 광신도의 목을 뽑아낸 후, 한숨을 돌리며 깨진 유리창을 바라보았습니다. 박살 난 유리에는 피로 흠뻑 젖은 자신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얼굴 부분은 깨져 있어서,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툭.

       

       타라는 광신도의 잘린 목을 바닥에 던졌습니다. 분노는 더욱 거세져 갔지만, 분노가 태우고 남은 재 또한 마음속에 쌓여갔습니다. 무겁고, 무거운, 허무.

       

       이렇게 죽이고, 죽인다고 해서, 동료가 돌아올 일은 없는데.

       

       그 끔찍하게 외로운 공백을 느끼고 나면, 분노의 불길은 다시 한번 거세게 불타올랐습니다. 이대로. 화를 내고, 죽이고, 반복한 끝에⋯⋯ 마음 속에 잿가루만이 남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그런 두려움 섞인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지지직.

       

       “⋯⋯⋯⋯?”

       

       유리창 너머로 비추는 상이 일렁이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를 비추었습니다. 주변과 비슷한 건물이 드문드문 남아 있지만, 훨씬 낡고 부서진 듯한 풍경.

       

       외신이 가까워져, 시공간이 복잡하게 꼬이며 흐트러져 발생한 현상. 유리창은 100년 후의 미래를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타라는, 베네트와 니오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피소드 마무리가 코앞이네요. 어제 쉰 만큼, 오늘은 넉넉-하게 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저는 여태까지 공지 삭제 버튼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처음 알았어요. 저는 이게, 안 지워지는 줄 알고⋯⋯ 재활용을 한 거였거든요. 이젠 모든 공지가 알림이 잘 갈 겁니다. 마이 프렌즈.
    몸은 나았습니다. 요 녀석이 “하하 사실 안나았지롱” 하고 뒤통수를 때리지 않는 이상은, 나은 게 맞을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내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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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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