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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2

     

    덜컹거리며 마차가 움직인다. 창밖으로 풍경이 지나갔다.

     

    나는 아셀라와 마주앉았다. 아셀라의 옆에는 시녀장이, 내 옆에는 타냐가 앉았다.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며 건네받은 문서를 넘겼다.

     

    “1황녀파는 종종 전장에 나가곤 하죠. 거기에 끼겠다는 계획이신가요?”

     

    “그 말대로야.”

     

    “북서부, 블뤼허 백작령. 여기서 멀지 않네요. 닷새면 도착하겠고, 1황녀파도 비슷하게 만나겠네요.”

     

    “월광궁이 처음 출전하는 전투야. 즐겁지?”

     

    “아이고 그럼요.”

     

    내가 억지 미소를 지어줬다.

     

    아셀라가 후작령까지 따라온 이유는 처음부터 이거였다.

     

    어차피 백작령으로 이동할 예정이니 가까운 텔레포트 게이트를 쓰고 거점으로 후작가를 이용했다.

     

    마침 일정도 딱 들어맞았다.

     

    이런 계획이 있었으면 미리 좀 알려주면 안 됐을까? 마음의 준비 좀 하게.

     

    “블뤼허 백작령은 장기간 야만족과의 전투로 물자가 점점 떨어지는 상태. 황실에 지원 요청이 들어온 게 한 달 반 전이군요.”

     

    “헤이케는 요청을 받은 즉시 출정을 준비했어. 군비 준비에 1주일, 백작령까지 진군에 한 달이 걸려.”

     

    “저희 군은요? 월광궁 기사단이나 2병영 본대는 황궁에 있잖아요.”

     

    아셀라가 대답 대신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휴가 올 때 이미 출발시키셨구나.”

     

    “응. 동맹 관계니까 헤이케는 우리가 토벌전에 참가하는 걸 환영할 거야.”

     

    항상 헤이케와 게오르크가 독점 중이었던 외부 전투 공적을 빼먹는 작전이다.

     

    과연 아셀라였다. 어느새 이런 요망한 공작을 세웠을 줄이야.

     

    나는 문서의 다음 장을 읽어나갔다.

     

    “야만족 세력은 천둥족입니까?”

     

    “그런 보고는 없었는데. 야만족에도 세력이 있구나. 공자, 야만족에 대해 잘 알아?”

     

    “어느 정도는요. 단순하게 구분하자면 돌무기를 들었으면 바위족, 철무기를 들었으면 천둥족입니다.”

     

    “그럼 바위족이겠어.”

     

    “그렇군요.”

     

    나는 상태창의 엔딩리스트를 스크롤했다.

     

     

    [No. 032 : 오염된 야만족 17%]

    [No. 035 : 야만족 침공 8%]

     

     

    야만족은 관련된 배드엔딩이 몇 개 있다.

     

    미개척된 야생의 땅에서 사는 커다란 세력이다. 앞으로 있을 사건들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오염된 야만족] 엔딩.

     

    선행한 마법사 부대가 마족의 땅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열기 전까지, 용사파티는 제국을 침공해오는 마족을 방어했다.

     

    마족은 온갖 술수로 제국을 공격해 왔는데, 야만족을 마기로 감염시켜 수하로 써먹은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쳐들어오는 야만족이 그때그때 랜덤이었단 말이야.’

     

    야만족에는 몇 가지 부족이 있다.

     

    지금부터 토벌하러 가는 바위족은 지능이 낮은 대신 신체 무력이 상당하다. 이들이 마왕군의 수하가 되면 막아내기가 어렵다.

     

    반면 천둥족일 경우는 족장의 정신력이 강한 덕인지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는다.

     

    대화도 가능한 부족이라 타협과 교섭의 여지가 있다.

     

    [오염된 야만족]은 부족 간 내전에서 바위족이 승리, 압도적으로 강대해지면 발생하고, [야만족 침공]은 어느 쪽에게건 제국이 패배하면 발생하는 멸망이다.

     

    ‘기왕이면 바위족의 세력을 약화하는 게 내게 이익이야.’

     

    마침 지금 토벌하러 가는 건 바위족이다.

     

    운이 좋다면 랜덤 발생이라 까다로운 [오염된 야만족] 엔딩을 삭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타냐에게 물었다.

     

    “단장, 야만족과 싸워본 경험 있어?”

     

    “있습니다. 북부 숲에서 마물을 토벌하다가 간혹 소규모 부대와 마주쳤습니다.”

     

    “이겼어?”

     

    “물론입니다.”

     

    타냐가 아셀라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최근 타냐 공의 검술 실력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

     

    “황공합니다.”

     

    아셀라에게까지 이야기가 들어갈 정도면 벌써 기사단에서 타냐의 두각이 드러난 모양이다.

     

    “2연대에서 한자리 준다고 하지 않아?”

     

    “아, 알고 계셨습니까.”

     

    황실 기사단 2연대는 병영과 함께 게오르크 파벌에서 월광궁 소속이 됐다.

     

    최근엔 타냐가 훈련시설로 쓰고 있다.

     

    비무대회 전부터 드나들며 눈도장을 찍다 보니 벌써 2연대장과 검을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얼마 전에 후작가의 기사단장 경험을 살려서 대대장을 맡아달라는 오퍼를 받았습니다.”

     

    “단장 실력이면 대대장은 물론이고 연대장도 노려볼 만하지 않겠어. 어때, 좀 들어가고 싶어졌어?”

     

    내가 가벼운 태도로 던졌어도 타냐는 진중하게 대답했다.

     

    “제게는 선생님의 호위기사 임무가 있습니다. 현재는 월광궁 소속이나 공식적으로 고트베르크 기사단을 그만둔 것도 아닙니다. 당분간은 임무에 집중하겠습니다.”

     

    타냐는 평생 내 호위기사에서 멈출 그릇은 아니다.

     

    아직은 먼 미래지만, 마왕군이 나타나서 전쟁이 일어나면 소드마스터가 될 타냐는 엄청난 활약을 해줄 것이다.

     

    배드엔딩을 몇 개는 삭제해 줄 거라 기대하고 있다.

     

    타냐가 강해지는 건 나도 바라는 바다.

     

    “나도 단장이 지켜주면 든든하긴 하지만 그게 단장의 성장을 방해해서야 주객전도 아니겠어. 내 호위는 두 명 정도 기사를 더 섭외해서 4교대로 돌리고 남는 시간은 2병영에서 근무해도 좋아.”

     

    “음.”

     

    타냐는 내 제안에 살짝 고민하는 눈치였다.

     

    “검 실력을 더 높이고 싶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병영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

     

    “예. 강한 검사는 실전 없이 완성될 수 없으니까요.”

     

    “마침 잘됐네.”

     

    아셀라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말했다.

     

    “타냐 공에게 필요하던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야. 야만족이라면 얼마든지 쌓여있으니 맘껏 토벌하도록 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타냐의 눈빛에서 투지가 느껴졌다.

     

     

     

    이후 우리는 지루한 여행을 이어갔다.

     

    사흘쯤 지나가니 이야기할 거리도 떨어져서 다들 말수가 적어졌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북서부는 고산지야. 험준한 산맥 지형이고 후작령보다도 고위도라 훨씬 춥지.’

     

    산맥을 돌아 지나가야 하기에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묘하게 따뜻해지는 지역이 있었다. 창밖을 보던 나는 주변 풍경을 보고 말했다.

     

    “잠깐 마차를 멈추지요.”

     

    마차에서 내려서 빽빽 가득한 나무의 품종을 확인했다.

     

    ‘코카나무다.’

     

    잎을 씹어 성분을 분석하니 완전히 같은 품종은 아니어도 같은 계통이라고 확신했다.

     

    마약 성분을 추출할 수 있는 바로 그 나뭇잎이다. 한국에서는 재배할 수 없다.

     

    한때는 콜라에 사용되기도 했다.

     

    “공자, 그렇게 급했어?”

     

    아셀라를 무시하고 타냐와 함께 잎을 가능한 만큼 따서 복귀했다.

     

    “이게 다 뭐야.”

     

    “약을 만들 재료입니다. 고산지에서 필요해질 겁니다.”

     

    아셀라는 책을 읽으며 마차를 가득 채운 나뭇잎에 투덜댔다.

     

     

     

    마차 멀미에도 슬슬 익숙해질 즈음 스륵,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으응….”

     

    아셀라가 긴 이동에 지쳤는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덕분에 약을 조제하던 나는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무심코 아셀라의 정수리에 대고 코를 킁킁대니 부드러운 체리블로섬 향기가 났다.

     

    나는 어제 겨우 찾아낸 시냇가에서 물로만 몸을 씻었을 뿐인데 얘는 어떻게 이렇게 깨끗할까.

     

    심지어 강물이 아주 얼음장이라 심장마비 걸릴 뻔했는데 말이야.

     

    황족이라 기품을 지켜야 하는 건 알겠는데 나도 좀 나눠주면 안 되나?

     

    시녀장 누님이 어떻게든 노가다해서 이 극한환경에서도 온수며 욕조며 비누거품까지 만들어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얄밉네.’

     

    조금 심술을 부리고 싶어져서 내 머리를 아셀라의 머리털에 대고 비볐다.

     

    이러면 나도 향수 뿌린 효과가 나겠지.

     

    음, 조금은 깨끗해진 기분이다.

     

    “…….”

     

    건너편에서 타냐가 또 음흉한 미소로 나와 아셀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귀찮았기에 나도 눈을 감고 아셀라에 기대 자기로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아셀라는 목욕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손을 한 번 휘두르면 순식간에 보송보송해지더라.

     

    그런 실용적인 마법이 있으면 좀 걸어주지. 어렵지도 않아 보이던데.

     

    이래저래 불편한 원정이었다.

     

     

     

    ***

     

     

     

    정확히 닷새 째, 우리는 블뤼허 백작령에 들어섰다.

     

    백작령은 후작령만큼은 아니어도 국경 방어에 중요한 장소다. 험한 산지라 외적이 침입하기 힘들어 우선순위가 낮을 뿐이었다.

     

    그런 환경상 일반적인 백작령보다 인구수는 적었고, 소규모 마을이 산지마다 드문드문 있는 모습이었다.

     

    “황녀님, 두통은 없으십니까?”

     

    내가 아셀라에게 물었다.

     

    “괜찮아. 손발의 추위도 덜해졌어.”

     

    “선생님께서 신약을 만들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준비성이 훌륭하십니다.”

     

    타냐가 덧붙였다.

     

    나는 고산병 약과 동상 예방 연고를 만들어 일행 전원에게 배포한 참이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복장을 꽁꽁 싸매고 소복하게 내리는 눈을 밟으며 남쪽 성채에 입성했다.

     

    “어서 오십시오!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황녀 전하.”

     

    헤이케의 파벌인 1병영 중대장이 무거운 철문을 열며 우리를 맞아줬다.

     

    “헤이케는?”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아셀라, 타냐와 함께 쉴 틈도 없이 첨탑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여니 안쪽에 있던 몇 명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그중에는 헤이케도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에 지도를 펼쳐놓은 것이 기사들과 작전 회의를 하던 모양이었다.

     

    “아셀라, 늦지 않게 왔군.”

     

    “안색 좋아 보이네, 헤이케.”

     

    아셀라와 헤이케가 가볍게 인사했다.

    그 후 헤이케가 내게도 시선을 넘기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고트베르크.”

     

    “강녕하셨습니까, 황녀님.”

     

    “물론이다.”

     

    헤이케가 아셀라에게 물었다.

     

    “2병영 본대는?”

     

    “이틀 후 도착할 예정이야.”

     

    “음. 그간 이쪽 배치를 끝내놔야겠군. 마침 잘 되었다, 와서 상황을 파악하게.”

     

    우리는 지도를 둘러섰다.

    인근 산지와 함께 거점, 부대, 적군 야만족이 표시되어 있었다.

     

    “병력은 우세하다. 이미 집결한 1연대 천이백과 아셀라가 데려올 2연대 사백, 궁 기사단까지 총 천칠백이다. 야만족의 숫자는 대략 천으로 추정된다.”

     

    “개인 전투력 수준도 생각하면 압도적으로 토벌할 수 있겠어.”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1연대장이 말했다.

     

    “어떤 점인가?”

     

    연대장이 아셀라에게 대답했다.

     

    “저희 1연대 기사들은 이 지형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지형이라 하면.”

     

    “고지대인 산지, 그리고 추위다.”

     

    헤이케가 말했다.

     

    “야만족들은 이 지형이 익숙한지 멀쩡하다. 하지만 황실 기사단은 아니다. 기묘한 두통을 호소하며 기절한 이도 많고, 추위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미 치유사들이 상당한 신성력을 소모했습니다.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가기도 전에 전투력이 이렇게 약화되어서야….”

     

    헤이케와 연대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앞으로 나섰다.

     

    “두통의 원인은 고산병입니다. 추위로 인한 부상은 동상이군요.”

     

    이 환경에서 무거운 1병영의 중장갑을 입고 기동하면 없던 병도 생길 만하지.

     

    헤이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고트베르크, 해결법을 아는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헤이케가 원하는 건 지금 내 주머니에 들어있었으니까.

     

    “물론이지요.”

     

    헤이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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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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