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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2

       숨 막히는 정적.

       

       입에 문 마력초 연초에 불을 붙인 엘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잠깐 이브이인지 뭔지 좀 죽이고 올게.”

       

       “살인 예고 멈춰…!”

       

       뭘 그리 담담하게 말하는 건데! 그러니까 진짜 저지를 것 같잖아!

       

       엘리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으며 붙잡았다. 하지만 근력의 차이일까. 내 몸을 질질 끌면서도 멈추지 않는 발걸음.

       

       “지, 진정해요 엘리! 제대로 거절했어요! 바람 같은 거 아니니까!”

       

       “…그건 잘했어. 하지만 내가 문제로 보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못해도 나이 차가 100년은 넘을 텐데 이렇게 어린애한테 프러포즈가 말이 돼?!”

       

       “어 어린이 아니거든요? 완전 어른이거든요?! 그리고 저한테 발정하는 건 엘리도 마찬가지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큭…!”

       

       너도 꼴렸잖아.

       

       그 말이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잇소리를 내며 멈춰 선 엘리. 이 틈을 타 계속해서 몰아붙여야 한다.

       

       “애초에 말이에요. 정작 제가 결혼하자고, 오늘 방문 열어놨다고 해도 이 악물고 아무것도 안 하던 건 엘리잖아요. 그런데 이제와서 제가 프러포즈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이렇게 화를 낸다고요?”

       

       “그건…!”

       

       “제가 무조건 처음은 엘리라고 정해둬서 다행이지! 만약에 엘리의 차가운 태도에 지쳐서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때도 지금처럼 화내게요?”

       

       “…벼, 별로 차갑게 대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해요?!”

       

       빼액 소리 지르자 움찔하는 엘리. 귀와 꼬리가 추욱 처진 것이 일견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아…엘리. 저 좀 보세요.”

       

       “응.”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엘리. 그런 그녀의 볼을 양옆으로 쭈왑쭈왑 늘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엘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엘리 생각은 어떤가요?”

       

       “음…미안?”

       

       “사과가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자, 따라해보세요 엘리.”

       

       그리 말하고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긴가민가하면서도 나를 따라 하나 남은 팔을 벌리는 엘리.

       

       아직 전신 슈트 차림이라 그런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몸의 라인.

       

       크게 부푼 가슴부터 시작해 잘록한 허리, 다시 솟아오르는 골반. 배꼽으로 추정되는 오목한 부분….

       

       여체 특유의 매혹적인 곡선에 홀린 듯 다가가 그대로 끌어안겼다.

       

       “얍.”

       

       “어? 어어…?”

       

       팔을 벌린 채 어버버거리는 엘리. 이런 모습이 귀엽다면 귀엽지만…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으음. 쉽지 않아.”

       

       어정쩡한 자세로 어색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제가 뭐라고 했나요? 저를 따라 해보라고 했죠? 제가 지금 팔 벌리고 있어요?”

       

       “…아니?”

       

       “잘 아시네요. 그럼 이제 똑같이 안아주세요.”

       

       “…응.”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내 말에 따르는 엘리. 그녀의 팔이 내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감싸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빈틈 하나 없이 밀착한 자세. 다만 평소에 그러하듯 야한 분위기는 아니다.

       

       은근슬쩍 어디 하나 비비는 것 없이 순수하게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는 허그.

       

       그 상태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리.”

       

       “듣고 있어.”

       

       “저는 이브 씨랑 결혼 안 할 거예요.”

       

       “응.”

       

       “그리고 엘리랑도 안 할 거예요.”

       

       “…응?”

       

       어이없어하는 엘리의 등을 꽈악 끌어안았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나를 마주 끌어안는 엘리.

       

       조금 강할 정도의 힘으로 휘감기는 것이 묘한 안정감이 든다. …그만큼의 책임감도 함께 딸려 왔지만.

       

       나는 앞으로 판 그레이브에 뿌려놓은 위험한 떡밥을 처리해 갈 예정이다. 엘리라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나를 도우려 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지금은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지만요.”

        

       “아. 그런 소리냐.”

       

       “네. 해야 할 일이 생겨버렸거든요. 그것도 꽤나 많이.”

       

       “그렇게 보이더라.”

       

       짧게 대답하며 내 등을 쓸어주는 엘리.

       

       사실 처음에는 이 세상을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뿌려놓은 위험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중간에 써먹을 수 있는 에피소드용 떡밥.

       

       즉, 최종장에 자주 나오는 피할 수 없는 종말 같은 게 아니라는 소리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급급했고, 소매치기로 좀 여유로워졌을 때도 엘리랑 함께 판 그레이브를 떠날 생각을 했었지.

       

       내가 무언가 하지 않더라도 주인공이 알아서 문제를 처리해 주리라 믿었다. 설령 몇 개 놓치더라도 그 불길이 나한테까지 뻗으리라는 생각도 안 했고.

       

       하지만 주인공은 죽었다. 내 손으로 죽였다.

       

       이젠 내가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언젠가. 제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끝마친다면. 그때 다시 한번 프러포즈할게요.” 

       

       “…일단 묻는데 그때는 언제쯤이야? 20살은 넘겼겠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엘리가 나름 진심인 것 같았으니 순순히 대답해 주기로 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미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데 1, 2년 걸리진 않을 테니까요.”

       

       “다행이네. 어른이기만 하면 괜찮……잠깐. 뭐라고?”

       

       엘리가 포옹을 풀고, 한쪽 어깨를 붙잡아 거리를 벌렸다.

       

       “에휴. 그렇게 다시 듣고 싶었나요? 어쩔 수 없네요…흠흠. 이제 한동안은 결혼해달라고 안 조를게요. 대신 제가 어른이 되면, 그때 저를 안아주실 수 있나요…?”

       

       “아니! 이거 말고!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거 있잖아!”

       

       “이보다 위험한 말이라니. 설마 엘리…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어린 제가 좋은 건가요?!”

       

       “그건 그것대로 위험한 말이긴 한데 종류가 달라! 내가 말한 건 미궁이야! 미궁의 밑바닥까지 간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인데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서 사랑의 여신님을 봐야 해요.”

       

       “사랑의 여신을 알현한다고…?”

       

       엘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사랑의 여신에게도 질투하는 건가?

       

       “걱정마세요 엘리. 저는 여신님보다 엘리가 조금 더 좋으니까요!”

       

       “그런 걱정한 거 아니거든? 스케일이 너무 커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을 뿐이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마구 긁적이는 엘리.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흐뭇하게 끄덕이던 리디아도 비슷한 반응이다.

       

       “요나. 아직 아무도 미궁의 끝에 도달한 적 없어. 지금 심층부라고 부르는 최전선도 겨우 7층. 그리고 멸신전쟁에서 살아남은 신은….”

       

       “열셋이죠. 그중에서 사랑의 여신을 빼면 열둘이고요.”

       

       “응. 그래서 추정 미궁 층수는 12층. 그리고 천 년 동안 모험가들이 개척한 층수는 겨우 7층. 심지어 아직 절반도 공략하지 못했어. …그럼에도 미궁의 끝을 보겠다고 하는 거야?”

       

       “네. 다 알면서 하는 말이에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해야 하는 거지.”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책임을 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해낼 뿐이다.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와 리디아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저도 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거 오늘 보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미궁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여신님 말고도 있어요.”

       

       3층. 기계장치의 신이 잠든 곳.

       

       멸신전쟁 중에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은 폭발적인 진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마법, 연금술, 대장 기술을 한데 합친 마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이는 라이터, 화로, 아공간, 상하수도 등.

       

       묘하게 현대틱한 편리한 기술은 전부 마공학의 산물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신을 낳는 법.

       

       전쟁 도중에 생겨난 가장 어린 신. 기계장치의 신. 그는 시작부터 비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장장이 신의 배를 찢으며 태어나, 그 시체를 먹고 신좌를 찬탈했기 때문.

       

       전쟁의 비정함 속에서 태어난 신인 만큼, 그 자체의 성정도 비정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을 정교한 장치로 보고, 그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는 자기 자신마저 하나의 부품으로 여기는 존재.

       

       다만, 그렇다고 악신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기계장치의 신은 차갑고 인정머리가 없을지언정, 분명한 선신이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

       

       기계장치의 신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자기 신도마저 마도구화 시켜 ‘소모’할 수 있었고, 이는 자기 자신마저 다르지 않았으니.

       

       멸신전쟁의 막바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차가운 이성 덕에 살아남은 그는 자신 같은 무정한 신은 세상에 해악이 될 뿐이라 판단했다.

       

       한번 결정한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모든 대외활동을 멈추고, 마공학 지식을 남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 죽이는 기술, 비인간적인 기술, 과하게 발전한 기술을 최대한 끌어모아 폐기하고 스스로 영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아무리 신이라도 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법.

       

       기껏 폐기한 아티팩트 일부가 미궁화의 충격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당연히 모험가들은 좋다고 가져가 써먹었고…내가 노리는 것도 그러한 오버 테크놀러지의 산물이다.

       

       엘리의 비어있는 소매를 만지작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의 팔. 제가 멋있는 걸로 하나 장만해 드릴게요.”

       

       “……어?”

       

       엘리가 노란 눈을 끔뻑였다. 마치 생각도 못 해본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블아 카스미 천장, 느비에트 30연차에서 뽑기 성공….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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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2

EP.82





       숨 막히는 정적.


       


       입에 문 마력초 연초에 불을 붙인 엘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잠깐 이브이인지 뭔지 좀 죽이고 올게.”


       


       “살인 예고 멈춰…!”


       


       뭘 그리 담담하게 말하는 건데! 그러니까 진짜 저지를 것 같잖아!


       


       엘리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으며 붙잡았다. 하지만 근력의 차이일까. 내 몸을 질질 끌면서도 멈추지 않는 발걸음.


       


       “지, 진정해요 엘리! 제대로 거절했어요! 바람 같은 거 아니니까!”


       


       “…그건 잘했어. 하지만 내가 문제로 보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못해도 나이 차가 100년은 넘을 텐데 이렇게 어린애한테 프러포즈가 말이 돼?!”


       


       “어 어린이 아니거든요? 완전 어른이거든요?! 그리고 저한테 발정하는 건 엘리도 마찬가지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큭…!”


       


       너도 꼴렸잖아.


       


       그 말이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잇소리를 내며 멈춰 선 엘리. 이 틈을 타 계속해서 몰아붙여야 한다.


       


       “애초에 말이에요. 정작 제가 결혼하자고, 오늘 방문 열어놨다고 해도 이 악물고 아무것도 안 하던 건 엘리잖아요. 그런데 이제와서 제가 프러포즈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이렇게 화를 낸다고요?”


       


       “그건…!”


       


       “제가 무조건 처음은 엘리라고 정해둬서 다행이지! 만약에 엘리의 차가운 태도에 지쳐서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때도 지금처럼 화내게요?”


       


       “…벼, 별로 차갑게 대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해요?!”


       


       빼액 소리 지르자 움찔하는 엘리. 귀와 꼬리가 추욱 처진 것이 일견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아…엘리. 저 좀 보세요.”


       


       “응.”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엘리. 그런 그녀의 볼을 양옆으로 쭈왑쭈왑 늘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엘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엘리 생각은 어떤가요?”


       


       “음…미안?”


       


       “사과가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자, 따라해보세요 엘리.”


       


       그리 말하고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긴가민가하면서도 나를 따라 하나 남은 팔을 벌리는 엘리.


       


       아직 전신 슈트 차림이라 그런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몸의 라인.


       


       크게 부푼 가슴부터 시작해 잘록한 허리, 다시 솟아오르는 골반. 배꼽으로 추정되는 오목한 부분….


       


       여체 특유의 매혹적인 곡선에 홀린 듯 다가가 그대로 끌어안겼다.


       


       “얍.”


       


       “어? 어어…?”


       


       팔을 벌린 채 어버버거리는 엘리. 이런 모습이 귀엽다면 귀엽지만…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으음. 쉽지 않아.”


       


       어정쩡한 자세로 어색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제가 뭐라고 했나요? 저를 따라 해보라고 했죠? 제가 지금 팔 벌리고 있어요?”


       


       “…아니?”


       


       “잘 아시네요. 그럼 이제 똑같이 안아주세요.”


       


       “…응.”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내 말에 따르는 엘리. 그녀의 팔이 내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감싸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빈틈 하나 없이 밀착한 자세. 다만 평소에 그러하듯 야한 분위기는 아니다.


       


       은근슬쩍 어디 하나 비비는 것 없이 순수하게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는 허그.


       


       그 상태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리.”


       


       “듣고 있어.”


       


       “저는 이브 씨랑 결혼 안 할 거예요.”


       


       “응.”


       


       “그리고 엘리랑도 안 할 거예요.”


       


       “…응?”


       


       어이없어하는 엘리의 등을 꽈악 끌어안았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나를 마주 끌어안는 엘리.


       


       조금 강할 정도의 힘으로 휘감기는 것이 묘한 안정감이 든다. …그만큼의 책임감도 함께 딸려 왔지만.


       


       나는 앞으로 판 그레이브에 뿌려놓은 위험한 떡밥을 처리해 갈 예정이다. 엘리라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나를 도우려 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지금은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지만요.”


        


       “아. 그런 소리냐.”


       


       “네. 해야 할 일이 생겨버렸거든요. 그것도 꽤나 많이.”


       


       “그렇게 보이더라.”


       


       짧게 대답하며 내 등을 쓸어주는 엘리.


       


       사실 처음에는 이 세상을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뿌려놓은 위험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중간에 써먹을 수 있는 에피소드용 떡밥.


       


       즉, 최종장에 자주 나오는 피할 수 없는 종말 같은 게 아니라는 소리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급급했고, 소매치기로 좀 여유로워졌을 때도 엘리랑 함께 판 그레이브를 떠날 생각을 했었지.


       


       내가 무언가 하지 않더라도 주인공이 알아서 문제를 처리해 주리라 믿었다. 설령 몇 개 놓치더라도 그 불길이 나한테까지 뻗으리라는 생각도 안 했고.


       


       하지만 주인공은 죽었다. 내 손으로 죽였다.


       


       이젠 내가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언젠가. 제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끝마친다면. 그때 다시 한번 프러포즈할게요.” 


       


       “…일단 묻는데 그때는 언제쯤이야? 20살은 넘겼겠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엘리가 나름 진심인 것 같았으니 순순히 대답해 주기로 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미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데 1, 2년 걸리진 않을 테니까요.”


       


       “다행이네. 어른이기만 하면 괜찮……잠깐. 뭐라고?”


       


       엘리가 포옹을 풀고, 한쪽 어깨를 붙잡아 거리를 벌렸다.


       


       “에휴. 그렇게 다시 듣고 싶었나요? 어쩔 수 없네요…흠흠. 이제 한동안은 결혼해달라고 안 조를게요. 대신 제가 어른이 되면, 그때 저를 안아주실 수 있나요…?”


       


       “아니! 이거 말고!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거 있잖아!”


       


       “이보다 위험한 말이라니. 설마 엘리…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어린 제가 좋은 건가요?!”


       


       “그건 그것대로 위험한 말이긴 한데 종류가 달라! 내가 말한 건 미궁이야! 미궁의 밑바닥까지 간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인데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서 사랑의 여신님을 봐야 해요.”


       


       “사랑의 여신을 알현한다고…?”


       


       엘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사랑의 여신에게도 질투하는 건가?


       


       “걱정마세요 엘리. 저는 여신님보다 엘리가 조금 더 좋으니까요!”


       


       “그런 걱정한 거 아니거든? 스케일이 너무 커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을 뿐이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마구 긁적이는 엘리.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흐뭇하게 끄덕이던 리디아도 비슷한 반응이다.


       


       “요나. 아직 아무도 미궁의 끝에 도달한 적 없어. 지금 심층부라고 부르는 최전선도 겨우 7층. 그리고 멸신전쟁에서 살아남은 신은….”


       


       “열셋이죠. 그중에서 사랑의 여신을 빼면 열둘이고요.”


       


       “응. 그래서 추정 미궁 층수는 12층. 그리고 천 년 동안 모험가들이 개척한 층수는 겨우 7층. 심지어 아직 절반도 공략하지 못했어. …그럼에도 미궁의 끝을 보겠다고 하는 거야?”


       


       “네. 다 알면서 하는 말이에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해야 하는 거지.”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책임을 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해낼 뿐이다.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와 리디아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저도 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거 오늘 보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미궁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여신님 말고도 있어요.”


       


       3층. 기계장치의 신이 잠든 곳.


       


       멸신전쟁 중에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은 폭발적인 진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마법, 연금술, 대장 기술을 한데 합친 마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이는 라이터, 화로, 아공간, 상하수도 등.


       


       묘하게 현대틱한 편리한 기술은 전부 마공학의 산물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신을 낳는 법.


       


       전쟁 도중에 생겨난 가장 어린 신. 기계장치의 신. 그는 시작부터 비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장장이 신의 배를 찢으며 태어나, 그 시체를 먹고 신좌를 찬탈했기 때문.


       


       전쟁의 비정함 속에서 태어난 신인 만큼, 그 자체의 성정도 비정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을 정교한 장치로 보고, 그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는 자기 자신마저 하나의 부품으로 여기는 존재.


       


       다만, 그렇다고 악신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기계장치의 신은 차갑고 인정머리가 없을지언정, 분명한 선신이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


       


       기계장치의 신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자기 신도마저 마도구화 시켜 ‘소모’할 수 있었고, 이는 자기 자신마저 다르지 않았으니.


       


       멸신전쟁의 막바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차가운 이성 덕에 살아남은 그는 자신 같은 무정한 신은 세상에 해악이 될 뿐이라 판단했다.


       


       한번 결정한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모든 대외활동을 멈추고, 마공학 지식을 남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 죽이는 기술, 비인간적인 기술, 과하게 발전한 기술을 최대한 끌어모아 폐기하고 스스로 영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아무리 신이라도 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법.


       


       기껏 폐기한 아티팩트 일부가 미궁화의 충격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당연히 모험가들은 좋다고 가져가 써먹었고…내가 노리는 것도 그러한 오버 테크놀러지의 산물이다.


       


       엘리의 비어있는 소매를 만지작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의 팔. 제가 멋있는 걸로 하나 장만해 드릴게요.”


       


       “……어?”


       


       엘리가 노란 눈을 끔뻑였다. 마치 생각도 못 해본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블아 카스미 천장, 느비에트 30연차에서 뽑기 성공....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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