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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3

       토너먼트 행사는 중단됐다.

         

       테러범들의 목을 슥삭 하며 문제를 없애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시 속행하긴 무리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1학년 최강자가 누군지 가릴 수 없게 됐으나 정작 파스텔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호르몬 친구가 ‘준기사급? 무섭지 않다.’라 선언하고 마족 테러범 트마우트 씨를 샷건 빵야빵야 했기 때문이다.

         

       허억.

         

       호르몬 친구우!

         

       네가 해낼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한치의 겁도 먹지 않고 산탄총 든 테러범에게 맞섰지! 친구를 믿었기 때문이야!

         

       응응!

         

       인맥 파워를 맛본 파스텔은 친구를 더 늘리기로 했다.

         

       바로, 태양계 행성 친구들을.

         

       준기사급을 이겼으니 존재의 격을 냠냠해야지.

         

       “착한 파스텔은 친구를 위해 살아요~.”

         

       분홍 머리통에 얹어둔 마석 나이프가 흔들렸다.

         

       “인기인이라 너무 바쁘지만 조금의 사리사욕 없이 도와주죠~.”

         

       정장 차림의 악마가 팔짱을 끼고 말없이 응시했다.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허억.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악마님,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완전 뻔뻔한 불량아를 보는 눈빛.

         

       그럴 수가아.

         

       설마 악마님도 트마우트(사망) 씨의 유언비어를 믿어 버린 걸까?

         

       하지만 난 테러를 조장하지도 않았고 앨시어를 협박해 부하로 삼지도 않았는데에.

         

       허억.

         

       설마설마 존재의 격을 냠냠 하는 게 위험해 보이는 걸까.

         

       파스텔은 머리에 얹어둔 마석 나이프를 원격 조종으로 회전시켰다.

         

       빙글빙글.

         

       나이프 날이 분홍 머리카락을 스쳤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오잉.

         

       파스텔은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분홍 실오라기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이 벌어졌다.

         

       “으아아!”

         

       머리카락이!

         

       내 머리카락이……!

         

       “악마님! 악마님!”

         

       잘린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악마님 때문에 머리카락이 잘렸어요!”

         

       악마가 어이없어했다.

         

       『그게 왜 내 탓이지.』

       “악마님이 머리카락을 곱게 제대로 빗겨주셨으면 나이프 친구를 빙빙 돌려도 머리카락이 잘리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충격.

         

       충겨억.

         

       악마님 때문에 머리카락 잘린 불쌍한 파스텔은 비틀거렸다. 휘청이며 옆으로 몇 걸음 걷다가 침실 벽에 머리를 기댔다.

         

       동화책 읽듯이 중얼거렸다.

         

       “어느 하늘하늘 둥실둥실 섬에 착한 소녀가 살고 있었답니다.”

       『착한 소녀는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않아.』

         

       파스텔은 못 들은 척했다.

         

       “악마님이 말했어요. 존재의 격은 먹으면 안 된단다. 정신을 망가트리는 아주 나쁜 거예요. 무려 설탕보다 나쁜!”

         

       허억.

         

       설탕보다 나쁘다니……!

         

       파스텔은 입을 가리고 놀랐다.

         

       그러다 돌연 침착해졌다.

         

       “하지만 착한 소녀는 말을 듣지 않았어요.”

         

       응응.

         

       『그건 잘 아는군.』

         

       악마가 팔짱 낀 손으로 팔뚝을 톡톡 두들겼다. 떨떠름해하는 기색이다.

         

       “왜 말을 듣지 않았냐면…….”

         

       벽에서 머리를 뗀 파스텔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됐다.

         

       뿜뿜 한 태도로 보호자를 삿대질했다.

         

       “악마의 말을 따라선 안 되니까요!”

         

       침대로 달려가 폴짝 뛰어들었다. 분홍 머리카락과 하얀 옷자락이 펼쳤다.

         

       “우와앙!”

         

       추락하며 침대가 출렁였다.

         

       “완전 착해! 완전 착해!”

         

       파스텔은 침대를 뒹굴었다. 그러다 대충 구겨진 옷 상태로 벌렁 눕곤 마석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나이프 날에서 검은 점액질이 스며 나왔다. 둥둥 떠오르며 뭉치더니 젤리처럼 형태를 만들었다.

         

       “악마님 이거 보세요~.”

         

       존재의 격을 가리켰다.

         

       “이젠 악마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잘하는 파스텔!”

         

       악마님이 가끔 말하는 것처럼 혼자서도 잘하게 됐으니 이건 훌륭한 성장이 아닐까?

         

       악마가 침대맡으로 걸어왔다.

         

       헛.

         

       파스텔은 경계하며 젤리젤리를 손에 쥐었다.

         

       군것질거리를 빼앗으려는 못된 어른. 하지만 경계심 백만 배 파스텔은 쉽게 당하지 않지.

         

       팔짱을 낀 악마가 내려봤다.

         

       뿌뿌.

         

       『어린 크래프트.』

         

       악마의 손이 뻗어졌다. 흠칫 놀란 파스텔은 팔을 멀리 움직여 검은 젤리를 도피시켰다.

         

       하지만 빼앗으려는 게 아니었나 보다. 손은 파스텔의 이마를 덮었다. 굳은살 박인 온기가 느껴졌다.

         

       『근래 들어 정신이 어지러워지진 않았나?』

         

       진지한 목소리였다.

         

       손의 온기에 차분해진 파스텔은 눈을 굴렸다.

         

       “남의 격을 섭취하는 것 때문에 그래요?”

       『그것도 그거지만 지금은 식습관이 더 문제다. 넌 음식을 못 먹으니 별수 없긴 하지만 마석을 꾸준히 섭취하면 두뇌에 악영향을 줘. 마석 섭취가 신체를 강화시키는데 설마 머리에 영향이 없을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런가?

         

       잠시 생각해 봤다.

         

       “딱히 없어요.”

         

       악마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파스텔은 악마의 손을 잡고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곤 새침하게 미소 지었다.

         

       “설마 하극상이니 권력이니 얘기해서 그래요?”

         

       악마님은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략 그런 발언 때문 같다.

         

       “악마님, 악마님.”

         

       파스텔은 쿡쿡 웃었다.

         

       “그건 그냥 돈과 권력이 생기니 본성이 나오는 거죠.”

         

       응응.

         

       검은 젤리를 입에 넣었다.

         

       불량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악마가 이마에서 손을 뗐다. 붉은 눈동자로 복잡미묘하게 내려봤다.

         

       “그런데 악마님.”

         

       단맛을 삼켰다.

         

       “저 언제까지 어린 크래프트예요?”

         

       파스텔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권력자에게 어리다는 수식어는 너무 안 맞지 않아요?”

         

       맞아맞아.

         

       악마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말없이 손가락으로 파스텔의 배를 가리켰다.

         

       뒹굴며 구겨진 옷자락이 밀려 올라가 배가 드러나고 있었다.

         

       오잉.

         

       파스텔은 배와 악마를 번갈아 봤다.

         

       악마가 입을 열었다.

         

       『옷차림새부터 단정하게 해라.』

         

       오이잉.

         

       반박할 수가 없어……!

         

       파스텔은 양볼을 누르며 절망했다.

         

       우와앙!

         

       “기준이 너무 높아요……!”

       『어디까지 낮아져야 만족하는 거냐.』

         

       이것이 권력자의 책무?

         

       파스텔에겐 허들이 너무 높아아!

         

         

         

       #

         

         

         

       파스텔은 내면세계의 우주를 둥둥 떠다녔다.

         

       이글거리는 검은 태양과 태양계 친구들이 보였다. 검은 태양은 못 본척하고 수성과 금성을 바라봤다.

         

       양팔을 흔들었다.

         

       “수성 친구! 금성 친구! 안녕안녕! 나 보고 싶었어? 그랬을 거야! 미안미안!”

         

       그러다 멈칫했다.

         

       으엣.

         

       우주인데 목소리가 나오네.

         

       눈을 굴리다가 어차피 진짜 우주도 아닌데 어떤가 싶어 넘겼다.

         

       “푸푸푸.”

         

       파스텔은 양손을 슥슥 비볐다.

         

       “수성 친구, 금성 친구. 아니 이렇게 말하니 명칭이 너무 길구나.”

         

       손가락으로 볼을 눌렀다.

         

       “줄여서 수금 친구…….”

         

       허억.

         

       수금 친구?

         

       친구 앞에 돈 내놔라는 단어를 붙이면 오해의 소지가 너무 크지 않아?

         

       수금 친구면 돈 내놔 친구잖아……!

         

       당황한 파스텔은 양팔을 휘저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정말이야! 정말!”

         

       믿어줘어.

         

       “하여튼 친구들! 태양계 가족에 지구를 추가할 시간이 됐어! 지구래, 지구! 모두 박수! 짝짝! 짝짝!”

         

       파스텔은 손뼉을 쳤다.

         

       정작 수성과 금성은 박수를 안 치고 태양 주위를 그냥 빙빙 돌았다.

         

       왜냐하면…….

         

       행성이니까.

         

       행성은 박수를 칠 수 없었다.

         

       허억.

         

       그렇구나!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그러다 손으로 턱을 눌러 입을 다물고 우주 공간을 살펴봤다.

         

       섭취한 존재의 격은 어디 있으려나.

         

       우주 저편에 암석 파편 무리가 보였다. 꽤 많은 양이라 지구를 만들고도 남아 보였다.

         

       준기사급은 역시 많구나.

         

       혹시 화성 친구까지 만들 수 있는 양인가?

         

       파스텔은 일단 지구부터 만들기로 했다.

         

       지구지구.

         

       손을 움직여 암석 파편들을 조종했다. 암석이 서로 부딪치고 뭉치며 거대한 암석 행성을 만들었다.

         

       파스텔은 양손으로 행성을 가리켰다.

         

       태양계에서 가장 중요한 행성.

         

       “지구!”

         

       넌 앞으로 지구야.

         

       금성 다음으로 먼 공전궤도에 행성을 띄웠다. 중력에 안착한 암석 행성이 태양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지구 친구야, 어서 자기소개해! 취미는 뭐야? 잘하는 거 있어? 있다면 지금 보여줘!”

         

       수성과 금성도 기다리고 있어!

         

       야호야호.

         

       파스텔은 두근두근하며 지구를 빤히 쳐다봤다.

         

       말없이 공전하던 지구는 수학여행 직전에 전학 온 바람에 레크레이션 시간에 모두 앞에서 장기 자랑하게 생긴 전학생처럼 반응했다.

         

       암석 행성이 붕괴하더니 그대로 망가졌다.

         

       파사삭.

         

       암석 파편이 힘없이 흩날렸다.

         

       “지구 친구우!”

         

       파스텔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안해애! 사실 행성 붕괴도 세 번 째라 네가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 깜빡하고 자기소개를 부탁해 버렸어!”

         

       이런 날 용서해줘어.

         

       지구: 용서할게!

         

       응응! 고마워!

         

       파편을 다시 수습했다. 서로 부딪혀 암석 행성으로 만들곤 천천히 관찰했다.

         

       근데 왜 안 됐지?

         

       파편이 모자라진 않았다. 아마 지구다운 무언가가 없어서 아닐까 싶다.

         

       금성 친구는 현재 그냥 금덩어리지만 금성金星이라 내면세계가 인정해 줬으니까.

         

       파스텔은 지구란 무엇인가 고민했다.

         

       역시 생명이 있어야겠지?

         

       생명, 생명.

         

       외부 지성체의 이성적 개입. 현재 과정은 파스텔이라는 내면 우주의 신적 존재가 창조론적 방식으로 생명 탄생을 시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헛.

         

       이건 너무 똑똑한 발상!

         

       파스텔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분홍 머리카락이 파닥였다.

         

       정신을 다시 집중했다.

         

       생명, 생명.

         

       마법이 존재하는 현 세계를 고려했을 때 창조론의 가능성이 꽤 켜졌다곤 하나 지구 자체는 진화론의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절충안을 차용해 지적 설계 방식의 진화론을 택하면 두 견해가 큰 모순 없이 섞일 수 있을 것이다.

         

       번개가 바다에 내리쳐지며 무기화합물을 유기화합물로 합성하고 유기화합물이 오랜 시간 진화하며 생명체가 됐다는 진화론적 연구 결과를 응용해 신적 존재인 파스텔이 바다와 번개를 만들어 진화를 유도한다면…….

         

       허엇.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건 진짜 너무 똑똑한 발상!

         

       으아아!

         

       파스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 틀렸어! 친구는 머리로 사귀는 게 아니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구 친구는, 지구 친구는! 그런 식으로 사귀어선 안 되는 거라구!”

         

       안 되겠어.

         

       악마님한테 물어볼래!

         

       양팔을 휘저었다. 우주 크레파스 그림을 문지르듯이 우주 공간이 뭉개져 갔다.

         

       파스텔은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입가에 흐른 침을 대충 슥 닦았다.

         

       으에.

         

       복잡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던 악마가 다가왔다.

         

       『빨리 일어났군. 뭔가 제대로 안 됐나?』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악마님! 악마님!”

         

       파스텔은 울상이 됐다.

         

       “생명은 어떻게 태어나요?!”

         

       커피잔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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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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