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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3

     

    “고트베르크, 동상과 고산병을 해결할 방법이 있단 말인가?”

     

    “있습니다. 이미 약제를 개발했습니다.”

     

    “오오!”

     

    내 대답에 1연대장이 화색을 띄웠다. 헤이케 역시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1연대 전체가 복용할 분량도 있는가?”

     

    “잠깐, 헤이케.”

     

    아셀라가 헤이케의 앞을 슬쩍 가로막았다.

     

    “물론 월광궁은 동맹으로서 야만족을 토벌에 협력하러 왔어. 하지만 약조한 건 군사뿐이었을 텐데?”

     

    “음.”

     

    “내 주치의까지 빌리겠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겠어.”

     

    아셀라의 당돌한 태도에 헤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건 당면한 적을 쓰러트리는 일이지. 아셀라, 무엇을 원하는가?”

     

    “야만족을 토벌하고 싶은 마음은 나도 같아. 활개 치게 내버려 두면 제국의 땅을 멋대로 유린할 못돼먹은 자들이지.”

     

    또각, 또각.

    아셀라가 여유로운 발소리를 내며 회의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런데 헤이케, 그 과정에서 쓸데없이 너와 의견을 충돌하다가 소중한 기사를 잃긴 싫거든.”

     

    “흠.”

     

    탁.

    아셀라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까딱이며 강한 어조로 선언했다.

     

    “이번 전투의 지휘 전권은 내가 가지겠어. 이 조건이면 너희 기사를 치료해주겠어.”

     

    “무슨 말씀을, 3황녀님.”

     

    1연대장이 바로 반발했다.

     

    “저희 1연대는 1황녀님의 지휘 아래에서 싸운 원정 경험이 다수 있습니다. 반면 월광궁이 실전 전투에 나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셀라가 강압적으로 노려보자 1연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긴 했다. 사실상 ‘어차피 못 쓸 거면 내가 갖겠다’는 생떼나 마찬가지다.

     

    아셀라가 총지휘를 맡으면 토벌에 성공했을 때 무훈 공적을 모두 월광궁이 가져오는 장점이 생긴다.

     

    아셀라의 노림수는 그것이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막중해진다.

     

    “아셀라, 여기는 지형도 변칙적이고 적에게 유리한 어려운 전장이다. 네가 올바른 지휘를 내릴 수 있겠나?”

     

    아셀라가 차분하게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을 브리핑해주겠어?”

     

    헤이케가 지시봉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음. 백작령은 산맥을 따라 성벽과 성채를 2중으로 구축했고, 드문드문 민간인 마을이 있는 지형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최종 라인의 중앙부인 남측 성채지.”

     

    “그래. 최북단의 북쪽 성채와 우리의 남쪽 성채 사이에 블뤼허 백작이 지내던 중앙 성채가 있었다.”

     

    “있었다?”

     

    헤이케가 심각한 표정으로 비보를 전했다.

     

    “점령당했다. 우리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돌파된 모양이더군.”

     

    “그럼 블뤼허 백작과 민간인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 야만족의 눈을 피해 전서구를 몇 번 날릴 수 있었다. 백작과 인근 마을의 민간인을 포함한 생존자는 중앙 성채 지하 창고에 숨어있다고 한다. 발각은 시간문제라고도 했다.”

     

    헤이케는 전투 지휘 경험이 많은 덕인지 요점을 신속하게 설명했다.

     

    “다행히 중앙 성채와 이곳 남쪽 성채 사이에는 깊은 절벽이 있다. 그들도 함부로 넘어오지는 못해. 제국으로 남하하려면 서쪽이나 동쪽 성채를 통해야 한다.”

     

    “양쪽 진입로를 틀어막고 적의 전력을 약화한 후 중앙 성채를 재점령해야겠네.”

     

    아셀라는 짧은 브리핑에서도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해냈다. 그녀가 지도를 가리켰다.

     

    “동쪽, 서쪽 성채를 점령하고 외부 방어선과 이어지는 다리를 모두 끊어서 중앙 성채의 잔병만 상대하면 돼. 소규모 백병전으로 끌고 가면 기술과 장비가 월등한 우리가 압도할 수 있어.”

     

    “양측 성채를 점령할 방법은?”

     

    “잊었니, 헤이케.”

     

    아셀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5위계에 도달한 빙결계 마법사야. 마침 여기엔 눈이 잔뜩 있어.”

     

    “직접 전투에 참가할 각오인가.”

     

    헤이케가 턱을 쓰다듬더니 내게 물었다.

     

    “고트베르크, 자네는 약제를 전부 준비할 수 있겠나? 부상자는 약 이백이다.”

     

    “이백 명 분량이군요.”

     

    덧붙여 우리 쪽 사백에서 나올 부상자분까지 만들어야 한다.

     

    월광궁 본대가 합류하면 내 치유사들도 함께 도착한다.

     

    내가 재료의 성분 변화만 해서 그들에게 양산을 맡긴다 하면.

     

    “전투 예상 시간은 얼마입니까?”

     

    “하루야.”

     

    “하루 치는 반나절이면 됩니다. 동상에는 보온과 연고를, 고산병을 앓는 기사에게는 이뇨제를 처방하고, 정도가 약한 이는 아스피린만 먹으면 되겠습니다.”

     

    “음.”

     

    내 대답을 들은 헤이케가 판단에 나섰다.

     

    비실비실한 기사들을 익숙지 않은 지형에서 억지로 싸우게 하면 피해가 더 커진다.

     

    실제 내가 있던 미래에서 바위족이 건재했던 걸 보면 본래 이 전투에서 헤이케는 대승을 거두진 못했을 터다.

     

    헤이케는 현명하니 그런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고도 예상했겠지.

     

    반면 내 치료를 받으면 승산은 확실하게 높아진다.

     

    대신 이번 토벌전의 공적을 모두 아셀라에게 돌려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승리와 책임, 어느 쪽에 경중을 둘 것인가.

     

    헤이케의 고민은 짧았다.

     

    “고트베르크, 부탁한다.”

     

    “맡겨주시죠.”

     

    나는 즉시 전서구에 편지를 적어 본대로 날려보냈다.

     

    올라오는 길에 재료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제약 준비를 마쳐놓으라는 메시지였다.

     

    “3황녀님의 지휘인가.”

    “으음….”

     

    1연대장과 목휘궁 기사단장은 조금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전장 경험도 없는 어린 아셀라가 총지휘를 맡겠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아셀라는 군대의 운용도 빈틈없이 해내던 인간이었다.

     

    뭐, 아직은 이론만으로 전황을 판단하고 있을 테니 오류가 생길 수도 있긴 하겠지.

     

    그건 내가 끼어들어서 수정해야겠어.

     

    “헤이케, 바로 전략을 짜고 싶어.”

     

    “좋아. 제안해 보아라.”

     

    전권을 넘긴 헤이케는 시원하게 아셀라에게 지시봉을 건네주었다.

     

    “목휘궁이 동쪽 성채, 월광궁이 서쪽 성채를 맡아 적의 전력을 분산시켜 진입해. 적군의 증원 전까지 공략하면…”

     

    아셀라가 짠 전략은 정석적이었고 나무랄 데 없었다.

     

    1연대장과 목휘궁 단장 역시 전략을 듣더니 점점 아셀라의 주장에 빠져들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과연, 훌륭한 작전이다.”

     

    헤이케 역시 아셀라를 인정했다.

     

     

    다만, 나는 약간 보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트베르크, 이견이 있는가?”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는지 헤이케가 물어왔다.

     

    “감히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어디 해봐.”

     

    아셀라가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 툴툴대며 내게 지시봉을 넘겼다.

     

    나는 아셀라가 정확히 반반 나눠놓았던 병력을 우측에 몰아 편성했다.

     

    “이미 나뉘어있는 1연대와 2연대를 굳이 섞지 말고 원래 상태로 편성하면 어떨지요.”

     

    “아군의 연계력은 좋아지겠지. 하지만 병력이 동쪽에 몰려 서쪽 성채는 공략이 늦어진다. 적의 증원이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

     

    “중앙으로 가기 위해서는 길목이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 말은?”

     

    내가 강조했다.

     

    “동쪽은 미끼로, 서쪽을 통해 구조대가 진입하는 전략이 조금 더 효율적입니다.”

     

    자신들을 미끼로 쓰겠다는 말에 1연대장이 조금 술렁였다.

     

    반면 아셀라는 내 제안에 흥미가 돋았는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계속 얘기해 봐.”

     

    “동쪽 성채에 1연대가 먼저 진입해 모든 적군을 유인합니다. 충분히 모이면 빈틈을 타 2연대가 서쪽 성채를 점령합니다. 이후는 아셀라 전하의 작전대로 진행합니다.”

     

    “적도 바보는 아니잖아. 설마 성 하나를 지키자고 모든 거점을 비우기까지 해서 우르르 몰려가겠어?”

     

    “그게, 바보가 맞습니다.”

     

    내 주장에 전원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야만족에는 부족이 나뉩니다. 저희가 상대할 바위족은 비교적 지능이 떨어지는 이들로, 전장 전체를 인식할 지능은 전무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위족? 부족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야만족을 몇 번 상대해본 헤이케도 고개를 갸웃했다.

     

    “북부의 야만족은 크게 네 부족이 있습니다. 족장이 현명한 천둥족이면 모를까, 바위족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마물에 가까운 놈들입니다.”

     

    나는 경험에서 배운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아셀라 황녀님의 작전은 물론 걸작입니다만, 상대 역시 전략을 펼치는 일반적인 군대라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지금은 마물을 상대할 때처럼 쉽게 이점을 가져와도 됩니다.”

     

    “그럼 지금 저들이 모든 성채에 골고루 편성된 배치는 왜 그래? 지능이 낮다면 그런 포진을 취했을까?”

     

    나는 아셀라의 일리 있는 질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단순히 각 성을 약탈한 후 배가 불러서 자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확실히 적군에게서 부대가 편성된 기색은 발견하지 못했다.”

     

    헤이케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트베르크, 그대는 1연대가 적의 시선을 끄는 동안 2연대가 중앙 성채의 인질을 구출하겠다는 뜻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직후 모든 다리를 끊고 적을 고립시켜 한 번에 섬멸합니다.”

     

    “전면전을 펼치는 것보다 피해가 적게 나올 방법이 분명하군.”

     

    “일리가 있습니다. 황실 기사단은 거점 방어 형태의 전투에 더 익숙하기도 합니다.”

     

    헤이케와 1연대장은 내 작전이 합리적이라 납득하는 눈치였다.

     

    “아셀라, 어떻게 생각하나?”

     

    아셀라는 나를 슬쩍 곁눈질하더니 턱을 치켜들며 헤이케에게 대답했다.

     

    “훌륭한 제안이야. 채용하도록 하겠어.”

     

    “황공한 말씀입니다.”

     

    아셀라는 혹시나 자기를 방해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예를 담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트베르크, 전략전술에도 능숙하군. 전장 경험이 있는가?”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치유술 공부만 한 건 아니었나. 알면 알수록 신기한 친구로군.”

     

    헤이케가 씩 웃고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생각보다 힘이 세서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럼 본 작전에 기반해 세부 편성을 진행하도록 하지. 우선 1연대 1대대는…”

     

    “야, 헤이케.”

     

    아셀라가 헤이케의 말을 끊었다.

     

    “왜 그러나, 아셀라.”

     

    “이번 토벌전에서 하나 주의할 게 있어. 미리 경고하겠는데.”

     

    아셀라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강조하며 나를 엄지로 가리켰다.

     

    “얘 건드리지 마. 두 번은 안 봐줘.”

     

     

     

    ***

     

     

     

    이틀 후 우리의 본대가 도착했다.

     

    월광궁 기사단, 2연대 1개 대대 400명, 내 파벌의 치유사들이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신 재료는 여기 있습니다.”

     

    휴고가 양팔 가득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도착했다. 고산병의 증상이 전혀 없는 것이 역시 건강한 체질이다.

     

    “에리는?”

     

    “분수대 상점가 빵집 아가씨에게 맡겼습니다. 종종 에리를 돌봐주시는 좋은 분이죠.”

     

    “헉. 그, 그거 혹시 썸― 끄악.”

     

    클로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 해서 허벅지를 꼬집어줬다.

     

    “증상자 비율을 생각하면 거의 오백 명분 이뇨제와 동상 연고를 만들어야 해. 시간 없는 거 알겠지? 바로 작업 들어가야 해.”

     

    ““옙!””

     

    내 치유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치유사는 열두 명이다.

    전원 나와 같은 흰 가운을 깔맞춤해 입고 있으니 슬슬 의사들이라는 느낌이 난다.

     

    “그럼 월광궁 치유사들, 움직이자고.”

     

    사탕을 빼물며 앞장선다.

     

    새하얀 가운을 휘날리는 치유사 부대가 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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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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