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Please report if you find any blank chapters. If you want the novel you're following to be updated, please let us know in the comments section.

EP.83

       1.

       

       ‘사실 억울할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일린이 내심 아리송하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물론, 그녀는 그걸 겉으로 표출해서 루드릭의 화를 돋울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루드릭에 관련된 일이라면, 늘상 무표정한 표정에 변화부터 생기고 볼 만큼 가장 민감한 편이었기에.

       

       루드릭의 눈치를 살핀 에일린이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가끔 감정이 격양되면서 이렇게 싸움이 나게 되면, 그때마다 루드릭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끼어들어서 말리곤 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화를 내면서 싸움을 뜯어 말려 끝내던지, 아니면 한 명씩 잘 타이르고 다독이던지.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전부 애라고 하더니. 그 말대로인가.’

       

       에일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었지만,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라는 말처럼. 당연하듯 영위하던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은 지금에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니 지금도, 뭐가 그리 억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조차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아무리 둘이 싸우고 있다고 해도 에일린과 엘레나를 상대로 루드릭이 저리 고자세로 나오는 것부터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사랑만큼 달콤한 마약은 없었다. 한 번 빠진다면 중독되어 헤어 나올 수 없는 종류. 연수로 따지면 거의 십 년이 가까운 지금에도 여전히, 에일린의 눈에 씌인 콩깍지는 벗겨질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어쨌든 저마다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도착한 별궁, 그리고 루드릭의 방 앞.

       

       중요한 자리랍시고 시종들이 입힌 맞춤 정장이 못내 불편한지, 손목의 단추를 풀며 루드릭이 말했다.

       

       “저는 연구실에서 가져올 게 있으니까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지.”

       

       엘레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루드릭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들어가면 아르웬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새를 못 참고 저 없는 동안에 또 싸우지 말고요. 그때는 진짜 화낼 거예요.”

       “명심하겠다.”

       

       에일린이 그 말을 받았다.

       

       “대답이나 못하면.”

       

       투덜거린 루드릭이 잠시 연구실로 향하고, 오는 동안 어느 정도 감정을 정리한 둘이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아르웬은 돌아오지 않은 방 안.

       

       에일린과 엘레나는 마치 둘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방 안을 훑었다.

       

       벌써 머무른지 한 달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는 슬슬 본인의 취향에 맞춰 꾸밀 법도 한데 귀족 영식의 방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삭막한 공간.

       

       물론 가구나 기본 설비는 제대로 갖춰져 있었고, 명색이 황실에서 사용하는 물건이니 고급품이긴 했어도 흔히 생각하는 귀족 영식의 방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모양.

       

       하지만 오히려 이런 광경이 익숙한 건지, 둘 다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엘레나였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주인 있는 방을 살펴 볼 여유는 없었지만. 생각한 그대로군. 전혀 달라지질 않았어.”

       “그렇겠지. 사람이 한 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오히려 나이가 어릴 때면 조금 더 남자다운 느낌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뭐, 루드릭이야 처음부터 이런 스타일이었던 거겠지. 경도 알고 있었을 텐데.”

       “모르진 않았지.”

       

       아까 전만 해도 서로 죽일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루드릭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생각은 없는 둘이었다.

       

       그 증거로 한껏 격양되어 있던 아까에 비해 다소 차분하게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기에.

       

       엘레나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은 에일린이 중얼거렸다.

       

       “루드릭이 보통의 귀족 영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이지. 어떤 면에서는 여자보다도 더 여성스럽다고 해야겠군.”

       “털털한 편이기는 하다만…… 경도 알고 있을 터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 화가 난 건 아니거든.”

       

       엘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회귀 전을 합치면 함께 보낸 세월이 무려 팔 년. 루드릭의 이십 대 대부분을 함께 보낸 입장으로서, 엘레나는 물론이거니와 다섯 명 모두 루드릭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루드릭이 정말로 화가 났다면 저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오히려 말이 없어지고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던 걸로 기억한다만.”

       “경도 잘 알고 있군. 겪었나?”

       “한 번은.”

       “보기 드문 광경인데 용케 겪었군. 참고로 나는 두 번이다.”

       “엘레나, 그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닐 텐데…….”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러운 과거로군.”

       

       엘레나가 나직하게 웃었다.

       

       루드릭이 돌아오기까지, 당연히 둘의 대화 주제는 루드릭이었다. 과거에 루드릭과 있었던 추억부터 시작해서, 루드릭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화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경…… 아니, 사촌도 알다시피 알면 알수록 신기하거든.”

       “뭐가 말이지?”

       “성격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경직되고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어느새 엘레나가 에일린을 칭하는 이인칭의 대명사가 경에서 사촌으로 바뀐 게 그 증거.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건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나가 말을 이어갔다.

       

       “어쩔 때는 가끔 내 머리 위에서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는데, 또 어쩔 때는 철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볍다고 할까.”

       “……대충 비슷한 경험은 나도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주로 여자란 여자는 전부 홀리고 다니는 점에서 그 죄질이 무겁지. 그것도 본인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더 무섭고.”

       “아, 사촌의 말대로군. 나도 동의해. 어쩔 때는 정말 여자를 홀리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기도 할 정도니까.”

       “뭐어…… 그렇다고 단순히 밉살스러운 게 아니라, 잔망스럽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하겠군.”

       “옴므 파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야.”

       

       엘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촌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겠지만, 생각보다 속도 깊은 편이고. 가끔은 조금 답답할 정도로 상냥하기도 하고.”

       “‘그때’를 얘기하는 건가?”

       

       아까에 비해 조금은 무거워진 목소리로 꺼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에일린이 눈썹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엘레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분위기가 무겁게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끊어진 대화의 맥. 별로 기억하고 싶은 과거는 아니었는지, 미간을 좁힌 에일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의 에일린도, 그때의 엘레나도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까닭에.

       

       “그때라면 대충 아무나 한 명 골라도 수긍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남겨진 사람은 어떡하냐고 그랬었지, 아마.”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절한 슬픔이 얼굴에 묻어났다는 차이점 정도일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과거를 떠올린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벌컥하고 열린 문 사이로 연구실에서 챙겨온 책 몇 권을 손에 든 루드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요? 혹시 둘 다 또 싸운 거예요?”

       “경이 보도록. 내가 사촌과 싸웠다면 적어도 이 방이 남아나진 않았겠지.”

       “저는 지금 방이 좋거든요? 괜히 망가져서 다른 방 쓰지 않게 주의해 주세요.”

       “명심하지.”

       

       방금 전까지 오갔던 심각한 대화에 대해서 알 리가 만무한 루드릭이 엘레나를 째릿, 노려보며 말하자 엘레나는 짐짓 쾌활한 얼굴로 대꾸했다.

       

       루드릭이 도착했으니 무거운 분위기도, 무거운 대화도 일단은 여기까지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오갔다.

       

       “아르웬은 아직 안 돌아온 모양이네요.”

       “……루드릭, 혹시 몰라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항상 조심하는 편이 좋다.”

       “네?”

       “내 입으로 직접 말하자니 조금은 부끄럽지만, 그녀의 본질은 고양이가 아니라 진조다. 심지어 과년한 사내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마당이기도 하고.”

       “……?”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에일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정작 루드릭은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잠시 주저하던 에일린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풍부한 표정 변화를 보여주며 조심스레 말했다.

       

       “루드릭, 내가 저번에 말해준 건 기억하고 있을 테지.”

       “……뭐를요?”

       “혹여 누군가가 루드릭, 그대에게 손을 대려고 하면……?”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이거요?”

       “잘 기억하고 있었나.”

       

       이번에는 루드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런 대화가 오갈 때마다 이 세상이 어딘가 뒤틀렸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루드릭도 남자, 그것도 한창 때의 남자인 이상 미치지 않고서야 고양이 상태도 아닌 아르웬에게 침대로 올라와서 같이 자자고 할 이유는 없을 터다. 게다가 바로 어제 자다가 변신이 풀린 아르웬과 한 침대에서 외설적인 의미 없이,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의 동침까지 했던 터라 주의할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과 별개로 에일린은, 아예 눈이 돌아간 아르웬이 루드릭을 덮치는 상황을 상정하고 꺼낸 말이라는 점이 특히 그 기분을 미묘하게 만들고 있었다.

       

       루드릭에게 있어 당연한 상식대로라면 보통은 반대의 상황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기, 에일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비약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잠시 고민하던 루드릭이 그런 말을 꺼냄과 동시에, 주변의 온도가 몇 도는 낮아진 듯한 착각과 함께 재차 방문이 열렸다.

       

       살랑살랑.

       

       가느다랗고 기다란 하얀색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리고, 고양이 주제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루드릭에게 얼굴을 부비적거리고는, 에일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약이 심하구나. 차라리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하거라.”

       “……뭐?”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악.

       

       태연하게 대꾸한 아르웬이 어설픈 하악질을 하는 모습에, 엘레나와 에일린의 말문이 동시에 막혔다.

       

       이상했다.

       

       분명히 그녀들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 속의 아르웬은 고고한 진조의 이미지였을 터.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애완동물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며 지내는 고양이 한 마리였다.

       

       “너희들도 가서 배우는 게 좋겠구나.”

       “……?”

       “변신 마법.”

       

       폴짝 뛰어오른 아르웬이 루드릭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태연하게 덧붙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최근에 허리 핑계로 연재주기가 박살났던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오늘도 연참 갈겼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Don’t Want To Be the Protagonist of a Romance Novel

I Don’t Want To Be the Protagonist of a Romance Novel

로판 주인공 하기 싫습니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reincarnated as the eldest son of a noble family with nothing to do.

Even if I put aside the fact that the world I was reincarnated into is a little strange.

– Northern Grand Duchess Eileen is confused after realizing she has regressed.

– Admiral Lassiel realizes she has regressed and immediately turns the fleet around.

– Princess Elena prepares to inspect the Weiss County, chewing over the past.

What is this?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