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4

       악마가 떨어지는 커피잔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커피가 출렁이긴 했지만 흘리진 않는 섬세한 손길이었다.

         

       “우왕.”

         

       파스텔은 작게 박수 쳤다.

         

       “악마님 순발력 짱짱.”

         

       커피잔이 근처 탁자에 놓였다.

         

       악마가 살짝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돌아봤다.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냐니.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앗, 맞아!

         

       울고 싶을 때 울 이유가 생긴 것처럼 파스텔은 다시 울상이 됐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

         

       양손을 허우적댔다.

         

       “지구지구가 자기소개를 했더니 파사삭 해서 우아앙! 해버렸는데 생명 뿅뿅이 필요해서, 필요해서…….”

         

       파스텔은 말하다가 멍해졌다. 자리에 다시 눕더니 방금 행동을 재연하듯이 벌떡 일어난 다음 외쳤다.

         

       “생명은 어떻게 태어나요?!”

         

       완벽한 설명.

         

       악마가 천천히 미간을 문질렀다.

         

       『내면세계의 지구 친구와 생명을 뿅뿅 한다는 건가……? 애초에 지구 친구가 누구지?』

         

       으이잉.

         

       “지구 친구는 지구 친구죠!”

         

       그것도 모르시나.

         

       『아니.』

         

       악마가 시선을 조금씩 돌렸다. 내려놓은 커피잔을 별 의미 없이 보다가 침실 옆 책장을 쳐다봤다. 지성과 교양의 겉면에 의존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곤 굉장히 이성적인 눈빛으로 돌아봤다.

         

       『네겐 아직 이르다.』

         

       으에에?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뭐라구요?

         

       분명 준기사급도 이겼는데, 준기사급도 이겼는데에. 지구 친구와 사귀기에는 실력 미달이라는 의미?

         

       지구 친구우!

         

       “어째서요?!”

       『어째서냐니.』

         

       악마가 곤혹스러워했다. 괜히 창가로 걸어가 창틀이 튼튼한지 살피더니 손가락을 문질러 먼지를 확인했다.

         

       『흠. 깨끗하지만, 깨끗하지 않군.』

         

       헛.

         

       뭔가 엄청난 암시와 함축이 들어있는 거 같은 말이야.

         

       파스텔은 머리를 굴렸다.

         

       지구 친구를 만들 실력이 되지만 아직 지구 친구를 만들기엔 부족하다는 건가?

         

       으이.

         

       검술 스승의 대책 없는 선문답.

         

       제자는 그냥 노골적으로 말해줬으면 해.

         

       『네가 더 큰다면 알려주마.』

         

       악마가 손가락을 털었다.

         

       『그쯤 되면 내겐 묻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아하.

         

       신체 발달이 덜 됐다는 거구나.

         

       나이를 먹으면 재능이 좋으니 배울 필요도 없을 거란 거고.

         

       파스텔은 눈을 굴렸다.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그럼 곤란해요!”

         

       곤란곤란해.

         

       “당장 할 수 있는 방법 없어요? 막막 신체 성장의 마법이라거나, 뭔가 수상쩍지만 그럭저럭 감당 가능한 포션이라거나.”

         

       악마는 충격받은 표정이 됐다. 눈이 느리게 감았다 떠졌다.

         

       『누구와……?』

         

       악마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 또래가 많으니 한 명쯤은 마음에 담아뒀을 수도 있나.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의욕이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악마는 뭔가 생각해 냈는지 점점 침착해졌다.

         

       『흠, 그렇군. 뭔지 제대로 모르는 건가. 어른에 대한 선망과 이해 없는 흉내 내기는 흔하지.』

         

       이쯤 되자 파스텔은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으잉.

         

       두뇌 풀 회전~.

         

       윙윙 윙윙.

         

       설마설마 이거 보호자에게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요를 물어본 상황인가?

         

       헤에.

         

       민망.

         

       생각이 정리된 악마가 평소처럼 담담하게 말해왔다.

         

       『그게 뭔진 알고 묻는 건가?』

         

       파스텔은 뿌뿌 해졌다. 바보 취급당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의미다.

         

       “악마님! 맥락이 잘못됐잖아요! 전 지금 지구 친구를 어떻게 만들지 생각하고 있다구요! 수성 친구, 금성 친구를 만들었으면 당연히 지구 친구를 만들어야죠!”

         

       팔을 휘저었다.

         

       “그런데 지구 친구는 최소한 숲이 울창한 존재여야 하기 때문에 제가 질문한 거라구요! 방금까지 명상하고 있었는데 맥락 없이 그런 질문을 할 리 없잖아요!”

         

       보호자의 허둥지둥 혼란당혹에 대처하는 지적이고 냉철한 파스텔.

         

       이쯤 되면 악마님보다 내가 더 지적이고 냉철한 거 아닐까?

         

       이것이 권력자 파스텔?

         

       허억.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

         

       『숲…….』

         

       악마가 턱을 문질렀다.

         

       『그렇군.』

         

       민망해하는 모습이었다.

         

       지적 우위를 달성한 파스텔은 뿌듯해졌다. 양 옆구리에 손을 짚은 채 오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정말 바보도 아니고 아기 만드는 방법쯤은 알고 있죠!”

         

       바보바보 파스텔이 아니란 말씀.

         

       응응!

         

       악마가 굳더니 멍하게 바라봤다.

         

       『뭐라고?』

         

       파스텔은 반응을 보자마자 의기양양해졌다.

         

       “악마니임, 설마 모르세요~?”

         

       그럴 수가!

         

       그럴 수가아!

         

       사실 악마님은 바보바보 악마님이었던 거임!

         

       바보바보 악마님?

         

       “아하하!”

         

       파스텔은 혼자 빵 터졌다.

         

       바보바보 파스텔과 글자 수도 똑같잖아?

         

       완전 바보 같아!

         

       “바보~!”

         

       파스텔은 계속 웃다가 뭔가 깨닫고 멈칫했다.

         

       허억.

         

       바보바보 파스텔과 글자 수도 똑같아?

         

       뭔가 악마님에게 굉장한 조롱을 한 기분.

         

       하지만 바보바보 파스텔은 그 정도로 모자란 애가 아닌데…….

         

       그치만그치마안 악마님과 파스텔을 동급 취급하는 건 너무 죄송한 거 같아. 하극상을 넘어 인격 모독을 한 기분.

         

       설마 나 여태 잘못 살고 있던 걸까?

         

       파스텔은 급격한 자아 성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행실을 되짚고 어떻게 의젓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 갔다.

         

       자아 성찰이 끝난다면 악마님이 눈물 흘릴 정도로 번듯한 파스텔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눈물 줄줄.

         

       그런데 그러다 침대맡 탁자의 마석 쿠키가 맛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냥 쿠키나 먹기로 했다.

         

       냠냠.

         

       “우왕, 맛있어! 악마님도 드셔보세요! 완전 맛있어요! 아 맞아! 이거 악마님이 만든 거지!”

         

       질리도록 드셔봤겠네?

         

       “저 혼자 다 먹을래요!”

         

       파스텔은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쿠키를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촉촉한 단맛이 퍼졌다.

         

       볼이 발갛게 변했다.

         

       악마님을 놀리다가 악마님의 수제 쿠키를 냠냠 하는 삶.

         

       행복해……!

         

       악마가 멍하게 쳐다봤다.

         

       『하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말해왔다.

         

       『그래, 많이 먹어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드디어 쉴 시간이 생긴 보호자 같은 목소리였다.

         

       파스텔은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님 말씀 완전 잘 들을 수 있음!

         

       악마가 지친 기색으로 커피잔을 잡았다. 다 식은 커피를 보다가 그냥 내려놨다.

         

       『지구 친구, 라는 거에 꼭 숲을 만들어야겠다면 네게 어떤 변화가 생겨야 할 거다. 고민하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변할 수도 있겠지.』

         

       악마가 턱을 문질렀다.

         

       『섭취한 존재의 격 자체는 아직 원활히 통제되는 거 같으니 당장 내면세계의 질서에 억지로 편입시킬 필요는 없겠군.』

         

       대답하려던 파스텔은 입안을 채운 쿠키에 막혀서 말을 못 했다. 턱턱 막히는 게 어째 쿠키가 제대로 씹히지도 않았다.

         

       입에 너무 넣었어!

         

       우아앙!

         

       볼 빵빵 파스텔은 울상이 됐다.

         

       악마님! 악마님!

         

       악마가 어이없어했다.

         

       『어이구.』

         

       고개를 젓더니 우유를 가져다줬다.

         

         

         

       #

         

         

         

       파스텔은 새벽바람부터 일어났다.

         

       학생 파스텔은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기 때문……, 은 아니고 테러의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무역 선배님이자 어른인 호레이스 교수에게 맡겨두긴 했어도 책임자로서 할 일은 해야 한다.

         

       “가스 중독은 모두 해결됐어요?”

         

       복도를 걷자 의료 직원들이 뒤따랐다.

         

       “거의 퇴원했습니다. 일부 학생도 안정이 필요할 뿐 건강 자체엔 문제가 없습니다.”

       “앨시어는요? 가장 많이 마셨잖아요.”

       “어제 각하께서 들리신 뒤 바로 퇴원했습니다. 공작 영애 본인의 퇴원 의사가 강하기도 했지만 준기사급의 경지니까요.”

         

       우와, 회복 완전 빨라.

         

       하긴 발길질로 바위를 부수고 나무검으로 강철을 벨 수 있는 경지인데 가스 중독에 크게 시달리진 않겠지.

         

       아직 입원한 학생들을 문병하곤 정박장으로 이동했다.

         

       테러범이 경기장에 추락시킨 비공정을 살펴보니 저번에 본 거대 철제함이 있었다.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자꾸 가져오는 건지 모르겠어서 확인해 보라 지시해 놨었다. 안전하게 하늘섬 밖에서 말이다.

         

       원래라면 기사단에 넘길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미심쩍게 한 기사단에게 맡기기 그래서 아카데미가 솔선수범했다.

         

       “각하!”

         

       저 하늘 어딘가에서 확인하고 왔을 교수가 비공정에서 급히 내렸다. 창백한 안색이었다.

         

       “새끼 하늘고래입니다!”

         

       비명 섞인 외침이 울렸다.

         

       “테러범 놈들이 납치해 여기까지 운반해 온 겁니다!”

         

       갑판의 열린 거대 철제함엔 웬 고래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아기라고 하기엔 어째 파스텔의 몇 배 크기긴 했지만 쫄쫄 굶었는지 피부가 갈라지고 진물이 나는 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오잉.

         

       파스텔은 멍해졌다.

         

       그러니까아, 아기 고래를 납치하면.

         

       “어미 고래가 복수하러 올 겁니다!”

         

       그러니까아, 어미 고래는 크기가.

         

       방학 때 하늘섬을 한 차례 방문했던 하늘고래를 떠올렸다. 지상을 뒤덮고 하늘을 채우며 등 위에 하나의 생태계를 만든 거체를.

         

       철제함 속에서 아기 고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래의 입이 벌어졌다. 입 앞에 에너지가 맺히고 빛을 냈다.

         

       오이잉.

         

       빛은 일순간 번쩍였다. 광선이 선을 긋고 직선 경로를 모조리 관통했다.

         

       정박해 있던 비공정들이 연달아 꿰뚫렸다. 빛보다 느리게 에너지가 몰아쳤다. 굉음이 울렸다. 대기가 떨리며 광풍이 비공정을 산산조각 냈다. 나무 잔해가 폭발적으로 비산했다.

         

       파스텔은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봤다. 바람에 뒤엉킨 분홍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갔다.

         

       날아온 나무 조각이 머리에 톡 떨어졌다.

         

       아기 고래를 천천히 내려봤다. 고래는 가쁜 숨을 내쉬다가 다시 진정했다.

         

       교수가 비명을 질렀다.

         

       “어미 고래가 올 겁니다!”

       “우와악!”

         

       파스텔은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광란의 혼란이 이어졌다.

         

       『흠.』

         

       악마가 담담히 말했다.

         

       『이건 실패한 테러군.』

         

         

         

         

         

       

       

    다음화 보기


           


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